믿음의 선진들을 따라서 모세와 예수님과 바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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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33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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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3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서 모세와 예수님과 바울을 따라서
저는 성도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아 그 동안 가고 싶었던 성지 방문을 지난 2주간 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고향 땅으로 가는 설레는 기분이었습니다.
무엇인가 거기에는 꼭 나를 위하여 기다리는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역만리의 땅이지만 결코 낮 설지 않았으며 너무나도 친근감과 애착이 갔습니다.
제가 성경을 통하여 이미 느꼈던 곳이고 그리고 평소에 사모하는 자들의 모습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첫날부터 거의 24시간의 여행 끝에 도착하여 호텔에 투숙 할 적에는 새벽 2시였습니다.
그날 6시에 일어나서 모세의 출애굽 여정을 따라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광야를 통과하여 밤 10시나 되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여 시내산 밑 별장에 도착하여 새벽 2시에 기상하여 돌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대충 일정이 그러합니다. 밤낮이 구분 없이 움직였습니다.
만약에 믿음이 없는 자들과 이방인들이 이 코스로 여행을 하라고 하면 벌써 다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감동이요 그 장소 하나 하나가 은혜가 될 뿐 이였습니다.
마침 이 여정에 모 교회에서는 350명이나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기회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이번 여행은 이집트에서 모세의 출애굽 한 여정을 따라 광야와 시내산 그리고 또 광야를 거쳐 이스라엘에 입성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갈릴리와 나사렛 동네 베들레헴과 십자가의 골고다까지의 예숭님의 일생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리스의 고린도 교회와 터키의 에베소 등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봄으로서 바울의 전도한 지역과 사도요한의 계시록에 예언들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또 갑바도기아 지역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산속 돌에다가 굴을 파서 생활을 하는 선진들의 신앙의 열정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등 믿음의 선진들의 자취도 그와 관계된 자들의 흔적도 더듬어 보았습니다.
이러한 여행 가운데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신앙의 여정에 도전하는 악의 세력들이 끊임없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믿음은 꺾어지지 않고 오늘날 아에게까지 전하여 졌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애굽은 이슬람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몸을 희생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전도지역 이스라엘은 이슬람과 유대교가 장악을 하고 있었으며 바울의 전도 무대였던 터키 역시 이슬람 국가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복음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세계를 향하여 나아갔으며 혈육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에게까지 전하여 진 사실이 너무나도 놀랍고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과연 믿음이 무성ㅅ인가를 생각하면서 정말로 놀랍고 신기하고 대단하고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임을 실감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믿음이 이렇게도 귀한 것이구나? 새삼 감동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꼈던 믿음의 일들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받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이 세상에서 진정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어떻게 나올 수가 있었을까요?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자우를 향하여 나오게 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에는 30여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신학교 교수와 일반 대학교수 그리고 초 중 고등학교 교사 목사님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어제 인천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마침 암사동 선사초등학교 여교사의 남편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와서 그 차를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 남편은 믿지 않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내를 성지순례를 보내주고 차를 가지고 태워주고 태워 오고하였습니다.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를 하던 중에 세상적으로 훌륭한 남편이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살아온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보지 못하고 세상적은 것으로 삶을 풀이를 하였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내 힘으로 살아가고 만족 할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믿지는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 주고 있지만 그의 눈에는 인간적인 것 외에는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세상에서 자유 할 수가 있는데 그리고 더 풍성한 삶이 있을 것인데…….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는 너무나도 놀라운 일들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기도의 응답의 생활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알게 되고 내 기도가 하나도 응답되지 않는 것이 없고 세상에서 얼마든지 벗어나 자우하며 하나님의 축복 아래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남편은 세상에서 애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믿음이 있는 아내는 세상에서 벗어나 가나안의 축복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히 11:23 믿음으로 애굽을 벗어나 더 나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애굽의 보화보다도 하나님으로 함께하는 고생이 더 큰 축복이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그의 이러한 믿음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축복의 가나안으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사실 광야 길을 한번 경험해보니 너무나도 곤고하고 힘이 들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의문을 종식시키고 세상 충동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광야는 인간적으로 가다가는 죽는 길입니다.
결코 갈 수가 없습니다. 못갑니다. 가다가 다 죽고 맙니다.
믿음으로만 가는 길입니다.
믿음의 길에는 반석에서 물이 터지고 사막의 광야에서 맛나가 내리고 낮에는 서늘하게 밤에는 따뜻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오로지 광야의 길에는 하나님이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믿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성도들의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자유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갈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내 산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새벽 2시에 그 산 아래 숙소에서 일어나 모세 봉이라 이름 하는 산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장장 3시간을 돌산을 오르는데 다른 이들은 낙타를 타고 올라가서 돌산을 오르는데 집사람이 낙타 타기를 꺼려하는 바람에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마음으로 올라갔습니다.
정말로 후들 후들 떨리는 다리를 가지고 어떻게 올라 온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산 정상은 얼마나 바람이 많이 부는지 참으로 돌산이었습니다.
이곳으로 모세가 올라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생명이요 구원이요 길이요 진리요 축복이요 소망이요 나의 모든 것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한국 사람은 물론이지만 중국인 일본인 유럽인 미국인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다 올라와 있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요 믿음은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광야를 거쳐 이스라엘에 입성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믿음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임마누엘이 되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이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광야와 소돔의 땅을 지나서 갈릴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광야에는 거친 땅에서 가시나무 등이 겨우 자라는 척박하였습니다.
소돔 땅은 말 그대로 소금 덩어리 이었습니다.
땅도 소금 덩어리요 사해 물속도 소금 덩어리 이었습니다.
그런데 각릴 리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온 산천에 푸른 풀이 돋고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으며 과일 열매들이 산천에 깔려 있었습니다.
이 겨울에 길가에 바나나가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는데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눈을 의심케 할 정도였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차이를 실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가는데 모든 순간순간이 은혜롭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산상 8복을 말씀하신 곳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가버나움 동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곳 그리고 출생하신 베들레헴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땅이 아닌팔레스틴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의 길과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갈보리 언덕 부활하신 빈 무덤 모두가 감동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 말씀을 하시고 그의 은혜를 베푸시고 계셨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사건사건마다 주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의 손길은 사랑이요 구원이요 생명이요 축복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시인하고 받아 드리고 인정하고 나의 구주로 모신다면 얼마나 나의 삶이 풍성하게 되겠습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희들은 갈릴리 호수에 배를 띄워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시고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후 5시30분쯤 배를 탔는데 갈리리 호수에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 할 즈음이었고 바람이 조금씩 불어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주님이 이 배에 함께하는 것 같았고 저희들은 12제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 때에 우리 집사람이 모든 이들 앞에서 찬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고 갈릴리의 험한 풍파 잔잔케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위하여 눈물짓고 기도하신 고난의 주님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 주셨네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같은 주 예수께 찬양합시다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시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만나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끝날 까지 임마누엘이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믿음은 나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여행을 마치고 그리스와 터키를 방문하면서 사도 바울의 열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 넓고 넓은 지역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을까?
이것은 그가 만난 주님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아테네, 아덴은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고치니 그를 허메나 쓰스같은 신으로 여기고 경배 하려고 할 정도로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보이는 아르바고 언덕에서 바울은 당시의 많은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였습니다.
알바고 언덕에서 보이는 아르바고 언덕에서 바울은 당시의 많은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였습니다.
알바고 언덕에서 실제적으로 파르테논 신전은 크게 보였습니다.
이 우상의 도시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그를 돌로 치려는 자들을 피하여 고린도 지역을 전도하러 떠나지 않습니까?
아테네에서 차로 2시간을 타고 고린도 지역을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무역업이 성행하여 경제적으로 아주 풍성한 지역이었습니다.
실제로 가보니 대리석으로 깔은 도시의 길은 지금의 대로에 못지않았습니다.
인도 역시 모자이크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화려하였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인구를 60만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 중에 노예가 40만 명이나 될 정도라 하니 얼마나 강대한 도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온 도시에는 음란이 풍성하고 심지어 바울의 서신에서 보듯이 교회 안에서도 아버지의 아내와 음란 하는 자를 용납할 정도로 더러운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를 지금도 파보면 음행행위에 사용한 물건들이 많이 발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린도 뒤편에 산이 있는데 그 산 중턱에는 양쪽 바다가 보이는 지역에 한 신전이 있는데 그 곳에는 창기들이 1000여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신전에서 무역선이 들어오는 것이 보이면 창기들이 그들과 음행을 하기 위하여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터키에 에베소에 들렸을 때에 참으로 놀라운 광고지를 보았습니다.
돌에다가 새겨 놓았는데 이것은 마치 지금 술집 광고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림으로 이곳에는 예쁜 여자들이 있습니다. 카드도 됩니다.
약속 어음이 그 때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이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그래도 그가 받은 복음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가만히 두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내가 벌 받을 일이라고 여기며 복음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 않았습니까?
그린도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겐그리아 항구를 가보았습니다.
그 곳에서 바울은 머리를 깎고 자신에게 많은 고난이 있음을 알고도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을 연상 할 때에 내가 받은 복음을 나에게만 머물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에 너무나도 부끄럽지 않을 수 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볼 때에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라는 각오가 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생명과 구원과 축복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모세와 같이 예수님의 심정으로 바울의 열정으로 나의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아니 주님 앞에 설 때에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며 나를 축복 할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증인으로 살아 온 것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인간적인 사사로운 일에 내 귀중한 시간을 보내지 마시고 주와 복음을 위한 나의 인생의 여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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