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질고와 슬픔, 허물과 죄악은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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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87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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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 야 53:1-6 당신의 질고와 슬픔, 허물과 죄악은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까마귀 우는 곳을 병든 다리 절어 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이 글은 전남 구례군 산동면 백씨 집안의 5남매 중 막네 딸인 백순례는 여순 사건 때 부역혐의로 오빠대신 끌려가서 처형당한 열아홉 살 처녀의 사연을 담은 노래입니다. 아들 둘을(큰오빠 백남수 일제 징용 이후 사망, 둘째 오빠 백남승 여순사건으로 처형) 잃은 어머니 고선옥(1987년 사망)은 순례에게 당부하기를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셋째오빠(백남극·여순사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대신 순례가 잡혀가도록 하였습니다.오빠의 죽음대신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여 셋째오빠를 살려낸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순례 씨는 순수하였기에 어머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말씀 한마디에 오빠 대신 죽을 수 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지금도 산동 애가(哀歌)가 되어 불린다고 합니다.
오빠를 살리기 위하여 처녀의 한 몸을 바친 참으로 아름다운 사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한 노래가 있으니 한번 들어 보시지 않으려십니까?
노래와 가사를 십자가를 등에 지고 병정들에 이끌려 주님 갈보리의 길을 걸을 때사람들은 몰려왔네 죽음의길 걷는 그를 보려고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를 조롱하였네 채찍소리에 흥겨워하면서그들은 소리쳤네 자칭 메시아를 못 박으라고사랑하는 제자마저 모두 떠나 버리고 증오와 멸시와 비웃음속에서너와 나를 위한 그애절한 사랑 때문에 주님은 그길을 걸어가셨네 갈보리길사람들은 말을 했네 이젠 모두 끝이라고 더 이상 그를 기대할 수 없다고자신마저 못 구원한 그는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갈보리의 그길 만이 진정 구원의 길인 것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너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은 그 길을 걸어가셨네 고난의길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은 예루살렘유다와 땅 끝까지구원의 강물이 되어 온 세상을 덮었네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했네모두 비웃고 조롱하며 떠났던 바로 그 길을 이젠 너와 내가 가야만하네 생명의 길우- 우- 우- 우
죄인된 인간이 받을 진노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이 죄 없는 자신의 아들을 죄인 대신 죄값으로 죽게 하심으로 죄인이었던 우리 인생은 죄와 세상에 대하여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것은 진리이고 인간을 구속시키는 것은 비 진리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시리라\\(요한 8:31- )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다시 세상의 노예로 만들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자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로마 8:15) 할렐루야!
벧자예브(N. Berdjaev)는 사람의 의식세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노예의식, 주인의식 그리고 자유인의식의 세 가지인데 노예의식은 죽음의 의식이고 주인의식은 남의 위에 군림하는 지배의식이고 자유인의식은 스스로의 의무와 권리를 지키고 이행하는 의식으로 자유인의식만이 사람이 지녀야 할 건전한 의식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자유인의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자유하는 의식은 세상에서 인간이 소유한 혈육으로는 얻을 수없는 의식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이 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케 하리라
사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을 때에는 세상에 종이 되었지 않았습니까?
돈의 노예, 명예의 노예, 자존심의 노예, 정욕의 노예 등등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무엇이든지 지배하려는 정신으로 살아 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살면 멸망하지 않고 불신앙으로 살면 멸망하다는 것이 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없느니라 그러나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시행하리라
사람은 모두가 태어 날 때부터 원죄로 죄인이지만 그 죄의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성인군자의 이름으로도 아니고 그 어떤 권력자의 이름으로도 절대 부호의 이름으로도 그 누구도 섞어질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이름으로는 구원을 주신 일이 역사상으로 없습니다.
이 세상에 썩어서 없어지지 않는 육체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온갖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었고 이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외쳤을 때에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 내용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못을 박도록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으며 그 아들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온갖 죄에서 깨끗하게 하였다고 할 때에 많은 이들이 그 아들을 믿고 세례를 받고 죄에서 자유함을 입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려 하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요한 3:16)
오늘은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종려 주일입니다.
그는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그는 겸손하시어 나귀 세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훌륭한 준마를 타거나 병거를 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융단과 카페트를 깔지 않았습니다.
여인네들이 두르고 있는 겉옷을 깔았습니다.
제가 예루살렘에서 나귀를 보았는데 참으로 나지막하고 배는 옆으로 볼록하게 나와서 볼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모습을 생각하기만 해도 폼이 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 같아도 걸어서 갔으면 갔지 타고 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나귀 세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속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형을 받기 위하여 오늘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으로 오는 고통의 짐을 져 주시기 위해서 대신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드디어 고난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 예수님의 고난이 내 허물과 내 죄악임을 깨닫는 자만이 삶의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극복하고 더욱 보람찬 일을 위하여 매진하는 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톰 아저씨의 오막살이\\라는 책을 쓴 스토우부인은 딸을 낳았는데 중병으로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부인은언제나 죽은 딸이 생각나서 날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부둣가의 노예시장에서 팔려가는 어린 한 노예소녀가 엄마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발버둥치는 그 노예소녀의 울부짖음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순간에 부인은 딸을 잃은 자신의 슬픔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꼈으며 그 흑인 소녀의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를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서 펜을 들었습니다. 눈앞에는 짐승처럼 끌려가는 그 소녀가 아른아른 거립니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 속에서의 힘에 겨워하고 있는 노예어머니의 입장에서 그녀는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이 소설은 당시 노예 제도에 익숙한 미국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수많은 미국인의 양심을 찔렀던 것입니다. 그녀의 글을 읽는 링컨 대통령은 그곳의 아픔을 읽고 이 미국노예해방의 깃발을 들게 했습니다.
그녀는 고통 가운데서 남의 고통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감격해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 내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역시 인간의 모든 질고와 슬픔과 그리고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시는 예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의 노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 주님만 바라보기만 하면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맛보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죄로 인해 독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치유가 되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고 치료의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진작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드려야 할 오늘날 죄인들은 영접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각기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하는 행동을 봅시다
벌레와 짐승보다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22편에 자신은 벌레와 같이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악의 행위가 침을 뱉음을 당하고 아이 재수 없다 하고 침을 뱉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은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치고 때리고 뺨을 때리고 놀림을 당하고 속임을 당하고 저주를 당하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장 흉악한 죄인 되고 죽일 놈이 되어서 십자가의 극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내가 당 할 형벌을 하나부터 끝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다 감당 하셨습니다.
세기적인 음악가였던 헨델(Hendel)은 유명한 곡 \\메시야\\를 작곡할 때, 바로 이 이사야서 53장 부분을 작곡하다가 그만 붓을 멈추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식사시간도 잊은 채 한없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식사시간을 알려 오는 하인에게 \\나는 지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작곡한 헨델의 곡 \\메시야\\가 지금도 전 세계의 영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외치는 내가 외치는 소리는 할렐루야! 뿐인 줄 믿습니다.
이제 내가 살고 당신이 사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뿐 인줄 믿으시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주위에는 예수님의 구속의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항간에는 영화화 하려는 미국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영지주의 복음서에 의존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전면 부인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프랑스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고 주장을 하고 AD 1-2세기에 영지주의자에 의하여 기록된 예수를 배신한 제자 가롯유다의 입장에서 쓰여진 유다복음은 ANSA 통신에 따르면 “가롯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은 그에게 내려진 신학적 임무이기 때문에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신의 계획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며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을 번한 유다를 거의 영웅시하고 예수가 갈릴리호수에서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얼음 위를 걸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아직도 세상은 끊임없이 도전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의 제자들에 의한 시체 도적설, 예수와 제자들이 연출한 기절설, 제자들이 죄책감으로 예수의 부활을 환상으로 목격했다는 환상설, 제자들에 의해 꾸며진 전설이라고 주장하는 전설설, 고대 근동의 여러 부활 신화의 영향으로 전승된 일종의 신화라는 신화설, 예수는 원래 영적인 존재로서 가현(假現)했기에 영적으로만 부활하였다는 영적 부활설,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한 시체 재매장설, 예수의 쌍둥이인 도마의 대리 처형설, 키레네 시몬의 대리 처형설등이 설들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많은 도전이 있음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구속을 무효화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내 마음에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우리의 전의 모습은 죄의 종이였습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자유하는 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오직 죄인 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지식 중에 가장 얻기 힘든 지식이 있다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습니다. 성경은 시종여일하게 죄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죄에서 자유 함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좋지 않는 것은 주님이 다 가져가시고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주님께 받아 갈 수 있는 자격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세상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 역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하여 교회는 40일 새벽 기도회를 가지고 오십 부장 백부장으로 오십 명 백 명의 영혼을 위하여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남은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기도로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고 전도로 예수님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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