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는 위기(危機)의 시대입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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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0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14:31-38 이 세대는 위기(危機)의 시대입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만듭니다.
누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주기도는 인간이 구하여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시간적인 흐름을 이야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구한 것은 현재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용서를 구한 것은 과거입니다.
과거에 죄에 대한 용서의 말이 나왔으니 항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겠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5월 20일은 김장환 목사님이 사장인 기독교 극동 방송 50주년이었습니다.
이 50주년 기념행사로 홈커밍데이를 소공동 롯데 호텔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극동방송 전 현직 직원과 선교사등 교계인사 700여명이 참석을 하였는데 그 중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불교 신자인 전 씨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5·18항쟁의 주역인 원흉인 그를 그것도 이 5월 달에 성스러운 기독교 방송 50주년 창사 기념일에 축사 연사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과감히 세운 자나 과감히 축사를 한 자나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거기에다가 그 축사 내용은 더 놀라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지배할 자세로 확산될 때 극동방송이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그들을 설득시켜 자유와 해방과 참된 삶을 찾아주었다 라고 말했으니 이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또 북한을 두고 하는 말이 지구상의 어느 한 지역은 아직도 자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도록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부 예배를 마치고는 행사장을 빠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극동 방송국 홈페이지는 5월의 원흉(元兇)을 이 신선한 자리에 세웠다고 후원을 중단하겠다고 하고 등등 별 별 항의 내용들이 올라와 다운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게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판 가륫유다도 끝까지 사랑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로마 병사들도 용서하셨습니다.
비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극동 방송이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이렇게도 표용하고 표현 할 수 있는 용기도 있구나를 생각 할 적에 오히려 분개를 가지는 마음보다 받아드리는 마음이 훨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과거의 죄 사함 그리고 현재의 일용한 양식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 된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는 미래를 위한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오늘도 드리는 기도는 나의 미래의 좌표를 은혜 가운데 행 할 수 있도록 하는 설정하는 일입니다.
나의 인생이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위하여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이시면서 가르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의 육적인 힘으로 감당 할 수없는 엄청난 일이 다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은혜롭게 극복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가만히 지난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면 또한 지금의 나의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나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진정한 축복의 삶을 경험하지 못할 때는 언제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적인 조건이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은 하나의 방편과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육체적인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 졌을 때에 내가 만족이 되어 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내가 시험에 들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악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죄를 계속 짖고 있었을 때입니다.
시험에 들고 악에 빠져 범죄하면 우리의 내일은 소망이 없습니다.
시험들이고, 악에 빠질 때\\우리의 신앙에는 힘도 없고 즐거움도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나에게 예수 믿는 재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인생의 재미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재미가 없으면 인생자체가 재미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저 예수 믿는 재미가 있을 때에 인생의 살맛도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기도는 생사를 걸고 드려야 할 절박한 기도이며, 날마다 올려야 할 간절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시험에 노출되어 있고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시험스러울 뿐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고 이기고 화라도 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이 세상은 죄의 유혹과 시험거리로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시험스러운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죄의 유혹거리가 나를 유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시험과 악으로 부터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루 한 순간들이 시험이며, 악으로의 유혹입니다.
이 시험은 에덴동산에도 침범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들어갑니다.
사람이 시험에 들고 죄의 유혹에 빠지면 이 세상에 별별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부부 사이도 원수지간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있는 일입니다.
딸이 엄마가 재혼을 하였다고 시험에 들어 찾아오는 엄마를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박대하여 보내고 그렇게 하여 33년간에 생이별을 하였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예배당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아니 예배시간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것은 교회 안에서 시험당하는것입니다.
성도와의 관계 등에서 목사의 설교 듣다가도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후에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 가운데 한 성도가 제게 하는 말이 왜 자기 보고 설교를 하느냐? 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은혜로 받아 드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일을 시험될 일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 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에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에 시므온은 예수님을 안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아기는 모든 사람의 흥하고 패하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는 자가 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는 흥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시험당하고 교회 와서 그 시험을 이기며 평화를 얻고 새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 교회에서 시험이 든다면 도대체 이게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전하여야 하는데, 그 말씀에 시험 들면 세상 어디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으렵니까?
히스기야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은혜로 받지를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사사건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험스러워 하였습니다.
결국은 시험 끝에 죄를 범하고 그 나라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휘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정말 이 세상은 시험 받을 일과 악의 유혹이 많은 위험가운데 살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에게 구하며 살아야 할 연약한 존재임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강하다면 이 세상이 아무리 시험이 많고 유혹이 많아도 별 걱정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죄의 성향이 있습니다.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단 한 가지 육신적인 핑계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보면 대체로 자신의 육신적인 핑계를 앞세웁니다.
이런 사람 절대로 육체적인 핑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와야 합니다.
사람 핑계. 물질 핑계, 등등의 핑계는 들 수 있지만 한 번도 역사이래로 그 핑계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슨 핑계가 그리 많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두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는 것을 알고도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 죽을 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환경과 형편에 절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육신적인 핑계가 나를 얼마나 육신적으로 살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가진 실력으로만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것 아닙니까?
한번 열거해 볼까요
시기, 분쟁, 다툼, 욕심, 음란, 호색, 당짓기, 수군수군 하기, 술 취함, 방탕함, 우상 숭배, 이런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사실 이런 육체적인 것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무슨 기대치를 가져 올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이해타산을 따지는 가륫유다는 일찌감치 이익을 챙겨 은 30으로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성질 급한 베드로는 죽음을 불사하고 함께 하겠다고 하였지만 혈기로 칼을 들어 남에게 해를 주고 자신 역시 예수님을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들이 회복 될 수 있었음은 마가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함으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참으로 고민하고 죽게 생겨서 피하고 싶을 정도였던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그 시험을 이기고 그 십자가를 감당하고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기도하면 성령의 소욕을 쫒아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그의 도우심을 공급 받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소욕을 쫒아 가기 때문에 생명과 평안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 등입니다.
이 같은 법은 세상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로 잘 감당한 위기는 새로운 축복이 따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결코 핑계가 되지를 못합니다.
기도하면 육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골 3: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기도가 되지 않으면 육체를 죽이기 위하여 금식이라도 하십시요
사58:6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제 기도에 승리하면 인생이 승리가 되고 기도에 실패하면 인생도 실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주기도는 인간이 구하여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시간적인 흐름을 이야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구한 것은 현재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용서를 구한 것은 과거입니다.
과거에 죄에 대한 용서의 말이 나왔으니 항간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야 겠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5월 20일은 김장환 목사님이 사장인 기독교 극동 방송 50주년이었습니다.
이 50주년 기념행사로 홈커밍데이를 소공동 롯데 호텔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극동방송 전 현직 직원과 선교사등 교계인사 700여명이 참석을 하였는데 그 중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불교 신자인 전 씨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5·18항쟁의 주역인 원흉인 그를 그것도 이 5월 달에 성스러운 기독교 방송 50주년 창사 기념일에 축사 연사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과감히 세운 자나 과감히 축사를 한 자나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거기에다가 그 축사 내용은 더 놀라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지배할 자세로 확산될 때 극동방송이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그들을 설득시켜 자유와 해방과 참된 삶을 찾아주었다 라고 말했으니 이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또 북한을 두고 하는 말이 지구상의 어느 한 지역은 아직도 자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도록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부 예배를 마치고는 행사장을 빠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극동 방송국 홈페이지는 5월의 원흉(元兇)을 이 신선한 자리에 세웠다고 후원을 중단하겠다고 하고 등등 별 별 항의 내용들이 올라와 다운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게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판 가륫유다도 끝까지 사랑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을 박은 로마 병사들도 용서하셨습니다.
비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극동 방송이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이렇게도 표용하고 표현 할 수 있는 용기도 있구나를 생각 할 적에 오히려 분개를 가지는 마음보다 받아드리는 마음이 훨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과거의 죄 사함 그리고 현재의 일용한 양식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 된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는 미래를 위한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오늘도 드리는 기도는 나의 미래의 좌표를 은혜 가운데 행 할 수 있도록 하는 설정하는 일입니다.
나의 인생이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위하여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이시면서 가르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의 육적인 힘으로 감당 할 수없는 엄청난 일이 다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은혜롭게 극복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가만히 지난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면 또한 지금의 나의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나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진정한 축복의 삶을 경험하지 못할 때는 언제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육체적인 조건이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은 하나의 방편과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육체적인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 졌을 때에 내가 만족이 되어 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내가 시험에 들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악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고 죄를 계속 짖고 있었을 때입니다.
시험에 들고 악에 빠져 범죄하면 우리의 내일은 소망이 없습니다.
시험들이고, 악에 빠질 때\\우리의 신앙에는 힘도 없고 즐거움도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나에게 예수 믿는 재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인생의 재미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재미가 없으면 인생자체가 재미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저 예수 믿는 재미가 있을 때에 인생의 살맛도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기도는 생사를 걸고 드려야 할 절박한 기도이며, 날마다 올려야 할 간절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시험에 노출되어 있고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시험스러울 뿐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고 이기고 화라도 복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이 세상은 죄의 유혹과 시험거리로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시험스러운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죄의 유혹거리가 나를 유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시험과 악으로 부터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루 한 순간들이 시험이며, 악으로의 유혹입니다.
이 시험은 에덴동산에도 침범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들어갑니다.
사람이 시험에 들고 죄의 유혹에 빠지면 이 세상에 별별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부부 사이도 원수지간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있는 일입니다.
딸이 엄마가 재혼을 하였다고 시험에 들어 찾아오는 엄마를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박대하여 보내고 그렇게 하여 33년간에 생이별을 하였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예배당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아니 예배시간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것은 교회 안에서 시험당하는것입니다.
성도와의 관계 등에서 목사의 설교 듣다가도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후에 교인들과 인사를 하는 가운데 한 성도가 제게 하는 말이 왜 자기 보고 설교를 하느냐? 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은혜로 받아 드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일을 시험될 일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 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에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였을 때에 시므온은 예수님을 안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아기는 모든 사람의 흥하고 패하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 걸려 넘어지는 자가 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는 흥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시험당하고 교회 와서 그 시험을 이기며 평화를 얻고 새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 교회에서 시험이 든다면 도대체 이게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전하여야 하는데, 그 말씀에 시험 들면 세상 어디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으렵니까?
히스기야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은혜로 받지를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사사건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험스러워 하였습니다.
결국은 시험 끝에 죄를 범하고 그 나라는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휘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정말 이 세상은 시험 받을 일과 악의 유혹이 많은 위험가운데 살아 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에게 구하며 살아야 할 연약한 존재임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강하다면 이 세상이 아무리 시험이 많고 유혹이 많아도 별 걱정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죄의 성향이 있습니다.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단 한 가지 육신적인 핑계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보면 대체로 자신의 육신적인 핑계를 앞세웁니다.
이런 사람 절대로 육체적인 핑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와야 합니다.
사람 핑계. 물질 핑계, 등등의 핑계는 들 수 있지만 한 번도 역사이래로 그 핑계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슨 핑계가 그리 많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두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는 것을 알고도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 죽을 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환경과 형편에 절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육신적인 핑계가 나를 얼마나 육신적으로 살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가진 실력으로만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것 아닙니까?
한번 열거해 볼까요
시기, 분쟁, 다툼, 욕심, 음란, 호색, 당짓기, 수군수군 하기, 술 취함, 방탕함, 우상 숭배, 이런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사실 이런 육체적인 것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무슨 기대치를 가져 올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이해타산을 따지는 가륫유다는 일찌감치 이익을 챙겨 은 30으로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성질 급한 베드로는 죽음을 불사하고 함께 하겠다고 하였지만 혈기로 칼을 들어 남에게 해를 주고 자신 역시 예수님을 부인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들이 회복 될 수 있었음은 마가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함으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참으로 고민하고 죽게 생겨서 피하고 싶을 정도였던 예수님은 기도하심으로 그 시험을 이기고 그 십자가를 감당하고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기도하면 성령의 소욕을 쫒아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그의 도우심을 공급 받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의 소욕을 쫒아 가기 때문에 생명과 평안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 등입니다.
이 같은 법은 세상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로 잘 감당한 위기는 새로운 축복이 따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결코 핑계가 되지를 못합니다.
기도하면 육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골 3: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기도가 되지 않으면 육체를 죽이기 위하여 금식이라도 하십시요
사58:6절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제 기도에 승리하면 인생이 승리가 되고 기도에 실패하면 인생도 실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