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수고가 있는 자만이 기쁨의 수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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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73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시 편 126:1-6눈물의 수고가 있는 자만이 기쁨의 수확이 있습니다.
숙명여대가 기독교 대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문에 성경구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너무나도 믿음적인 내용들 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9절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히브리서 11장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사야 60장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등의 믿음적인 성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숙대 음악 홀의 이름도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으로 한 건설회사가 100억 원을 기부하며 요청한 이름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믿음의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대학교를 변화시키려면 1,000억 원의 자금이 필요하여 그 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을 때에 당시의 교수들은 지금 빛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1,000억은 허황된 생각이라며 비아냥거렸지만 그 목표가 달성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성사 될 수 있음은 숙명여대 이경숙(63·소망교회 권사·사진) 총장의 믿음적인 눈물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총장은 최근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비즈니스 세미나에 참석하여 지난 20일로 학교발전기금 1,000억 원 모금을 달성했다면서 발표하면서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터득한 하나님께 응답 받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고 기도한 뒤에는 절대 의심하지 말고, 받은 줄로 믿고 먼저 감사드리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이 총장은 취임할 때부터 숙대는 하나님이 총장이시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라고 기도했는데 숙대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한 달간 아침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얻은 아이디어로 동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면서 1,000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응답은 내 스스로 믿음으로 잘 감당하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오늘 본문에서도 인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일 꿈을 꾸는 것 같은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다 민족은 유다 왕 시드기아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제국에 나라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는 폐허가 되고 젊은이들과 능력 있는 자들은 다 포로로 잡혀가고 나이든 자와 힘이 없는 자들만 폐허된 나라에 남아 있으니 다시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전혀 상상 조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민족도 일본에 망하였을 때에 민족의 문화도 민족 사상도 말살을 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여 우리 언어도 성도 사용 할 수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도 그러하였습니다. 바벨론 문화와 언어와 성으로 모든 것을 다 바꿔 버렸습니다.
그러니 유대 민족의 해방은 어느 모로 보나 불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포로 된지 70년 만에 해방의 날이 돌아 온 것입니다.
이 해방의 날의 기쁨은 누군가가 이 일을 기대하며 수고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을 믿고 눈물의 수고를 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농부들의 수고를 통하여 결실을 가져오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의 수고가 있는 곳에는 생각하지도 않는 기적을 가져 오게 됩니다.
이번 맥추절은 봄 농사가 확실한 수확을 가져 왔음에 대한 감사하는 절기가 아닙니까?
누군가가 뿌리는 수고가 있을 때에 하나님은 확실한 결실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시는 것 아닙니까?
이번 맥추절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교회와 사랑하는 성도들의 가정과 자녀와 그리고 생업에 깜짝 놀랄 기적의 수확을 가져 오는 축복의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는 것 같은 기적의 축복을 가져왔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간절한 열정(熱情)이 수확의 기쁨을 가져왔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아니면 가나안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태초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족이 형성되기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 있는 다른 민족들의 방해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이 가는 길에 결코 장애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민족들이 굴복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일용할 양식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죽은 시체를 검시해 보니 죽는 순간까지 고기를 얼마나 먹었는지 잇 털 사이에 아직도 고깃점이 붙어 있었습니다. 먹을 양식은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열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확실한 믿음의 약속이 있다면 가는 길에 무슨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에 열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현실만을 탓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일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일에 매여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나안을 바라보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10번이나 시험을 하고 원망을 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축복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개가 짖으면 기차가 서지요 당연히 기차는 목적을 향하여 가는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이 비참하다 못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약속의 말씀의 끈은 놓지를 않았습니다.
70년 후에 다시 돌아 갈 고국 그리고 자유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루에 3번 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사자굴 속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한 일이 환경적으로 생긴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새벽 기도회에 초신 자이지만 열심을 내는 자매가 계십니다.
그 자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그 열망을 귀하게 여기시고 축복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사로운 생활에만 매이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가 기도의 제목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진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련지를 모릅니다.
나의 삶에 기적 같은 역사를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사사로운 일에 내 자신을 허락하지 마시고 약속의 말씀에 열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누가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의 결실을 보는 자입니까?
선한 뜻에 합당한 씨앗을 뿌리는 자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육체로 심고 거두는 것은 갈 5:19-21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권모술수, 원수 맺는 행동,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 이단, 투기, 방탕 같은 것들이고 이런 열매들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심고 거두는 것은 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열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대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을 심지 않는 인간의 기대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거둘 것이 없습니다.
유다 민족의 해방의 기쁨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진정 자신의 기쁨이 되지 못한 지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자들입니다.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 갈 것을 알았던 자는 돌아 갈 준비를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이방인들과 시집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기대를 두고 땅을 사고 밭을 사고하는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돌아가기 위한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방황기 때에 세계 도처의 유대인들은 금은보석에 투자합니다.
돌아가자 하면 언제든지 가방 하나만 챙기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갑시다. 해방입니다 할 때에 이들은 얼른 준비하여 돌아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그리고 그곳에 집을 짓고 기업을 마련한 자는 돌아가고 싶지만 살아온 생활의 조건들이 그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자 우리는 나 스스로를 이 시간에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면 그 축복을 받을 토양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과 행동 그리고 언어와 생각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인가 아니면 복을 받지 못한 일인가를 생각해보야 할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는 그가 행하는 행동이 합당하지 않음을 알고는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는 죽겠구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하고 돌아갈 때에 사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나의 신앙생활이 대충 대충 아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내게 다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나 뿐 아니라 내 자손들에게도 돌아갑니다.
나 때문에 내 자손의 앞길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행동 하나 말 하나 생각 하나 함부로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얼마나 조심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진지하다 조심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이리 저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피하는 자는 그 당시에는 좋을지 모르나 그 나중에는 결코 결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울면서 아픔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자가 그 결실을 가져 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울면서 아픔의 수고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생각 할 적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떤 자가 꿈꾸는 것 같은 사실이 이루어지는 복을 받습니까?
반드시 가져올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입니다.
인내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겠습니다 만은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기도하는 사람이 인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제가 아는 친구 교회의 장로님은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 회사의 샐러리맨으로 지나지 않았는데 거기에서 출발하여 중소기업 사장이 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갓 50대가 되었는데 무역 유통 섬유 전자 건설 식품 등 여러 기업을 이끄는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번 미국 여행에 함께 동참을 하였는데 제가 친구 목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저 장로내외분들 지금도 새벽기도에 출석 잘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구나! 그렇게 기도하는데 안 될 리가 없지 …….
그 정도면 그만 나올 만도 하는데 아니죠 기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기다림을 배우고 아직도 이루어야 할 일이 있기에 기도에 욕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열정 등에 인내심을 잃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하는 것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그발 강가에 모여 울며 회개하며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진 자마다 기도하는 자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기도하는 자 아닙니까?
일마다 시마다 문제마다 시험에 드는 자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그런 축복의 제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고 무엇인가 잘되기를 바라는 요행주의자가 되지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맥추절을 당하여 씨도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는 그런 미련한 자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기도를 심읍시다. 기도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많은 물질의 수고를 심으십시오 나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부요해지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많은 봉사와 전도도 심읍시다.우리 육체의 건강함과 생활의 안전과 평안을 보장 받을 것입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숙명여대가 기독교 대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문에 성경구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너무나도 믿음적인 내용들 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9절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히브리서 11장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사야 60장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등의 믿음적인 성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숙대 음악 홀의 이름도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으로 한 건설회사가 100억 원을 기부하며 요청한 이름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믿음의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대학교를 변화시키려면 1,000억 원의 자금이 필요하여 그 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을 때에 당시의 교수들은 지금 빛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1,000억은 허황된 생각이라며 비아냥거렸지만 그 목표가 달성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성사 될 수 있음은 숙명여대 이경숙(63·소망교회 권사·사진) 총장의 믿음적인 눈물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총장은 최근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비즈니스 세미나에 참석하여 지난 20일로 학교발전기금 1,000억 원 모금을 달성했다면서 발표하면서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터득한 하나님께 응답 받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고 기도한 뒤에는 절대 의심하지 말고, 받은 줄로 믿고 먼저 감사드리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이 총장은 취임할 때부터 숙대는 하나님이 총장이시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라고 기도했는데 숙대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한 달간 아침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얻은 아이디어로 동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면서 1,000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응답은 내 스스로 믿음으로 잘 감당하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오늘 본문에서도 인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일 꿈을 꾸는 것 같은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다 민족은 유다 왕 시드기아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제국에 나라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는 폐허가 되고 젊은이들과 능력 있는 자들은 다 포로로 잡혀가고 나이든 자와 힘이 없는 자들만 폐허된 나라에 남아 있으니 다시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은 전혀 상상 조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민족도 일본에 망하였을 때에 민족의 문화도 민족 사상도 말살을 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여 우리 언어도 성도 사용 할 수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에도 그러하였습니다. 바벨론 문화와 언어와 성으로 모든 것을 다 바꿔 버렸습니다.
그러니 유대 민족의 해방은 어느 모로 보나 불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포로 된지 70년 만에 해방의 날이 돌아 온 것입니다.
이 해방의 날의 기쁨은 누군가가 이 일을 기대하며 수고의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을 믿고 눈물의 수고를 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농부들의 수고를 통하여 결실을 가져오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의 수고가 있는 곳에는 생각하지도 않는 기적을 가져 오게 됩니다.
이번 맥추절은 봄 농사가 확실한 수확을 가져 왔음에 대한 감사하는 절기가 아닙니까?
누군가가 뿌리는 수고가 있을 때에 하나님은 확실한 결실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시는 것 아닙니까?
이번 맥추절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 교회와 사랑하는 성도들의 가정과 자녀와 그리고 생업에 깜짝 놀랄 기적의 수확을 가져 오는 축복의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는 것 같은 기적의 축복을 가져왔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간절한 열정(熱情)이 수확의 기쁨을 가져왔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아니면 가나안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태초로부터 이스라엘의 민족이 형성되기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 있는 다른 민족들의 방해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이 가는 길에 결코 장애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민족들이 굴복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일용할 양식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죽은 시체를 검시해 보니 죽는 순간까지 고기를 얼마나 먹었는지 잇 털 사이에 아직도 고깃점이 붙어 있었습니다. 먹을 양식은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열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확실한 믿음의 약속이 있다면 가는 길에 무슨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에 열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현실만을 탓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일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일에 매여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나안을 바라보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10번이나 시험을 하고 원망을 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축복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개가 짖으면 기차가 서지요 당연히 기차는 목적을 향하여 가는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이 비참하다 못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약속의 말씀의 끈은 놓지를 않았습니다.
70년 후에 다시 돌아 갈 고국 그리고 자유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루에 3번 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사자굴 속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한 일이 환경적으로 생긴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새벽 기도회에 초신 자이지만 열심을 내는 자매가 계십니다.
그 자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그 열망을 귀하게 여기시고 축복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 사사로운 생활에만 매이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가 기도의 제목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진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련지를 모릅니다.
나의 삶에 기적 같은 역사를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사사로운 일에 내 자신을 허락하지 마시고 약속의 말씀에 열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누가 꿈꾸는 것 같은 기쁨의 결실을 보는 자입니까?
선한 뜻에 합당한 씨앗을 뿌리는 자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육체로 심고 거두는 것은 갈 5:19-21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권모술수, 원수 맺는 행동,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 이단, 투기, 방탕 같은 것들이고 이런 열매들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심고 거두는 것은 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열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대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을 심지 않는 인간의 기대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거둘 것이 없습니다.
유다 민족의 해방의 기쁨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진정 자신의 기쁨이 되지 못한 지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자들입니다.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 갈 것을 알았던 자는 돌아 갈 준비를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이방인들과 시집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기대를 두고 땅을 사고 밭을 사고하는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돌아가기 위한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방황기 때에 세계 도처의 유대인들은 금은보석에 투자합니다.
돌아가자 하면 언제든지 가방 하나만 챙기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갑시다. 해방입니다 할 때에 이들은 얼른 준비하여 돌아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그리고 그곳에 집을 짓고 기업을 마련한 자는 돌아가고 싶지만 살아온 생활의 조건들이 그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자 우리는 나 스스로를 이 시간에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하시면 그 축복을 받을 토양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과 행동 그리고 언어와 생각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인가 아니면 복을 받지 못한 일인가를 생각해보야 할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는 그가 행하는 행동이 합당하지 않음을 알고는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는 죽겠구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하고 돌아갈 때에 사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나의 신앙생활이 대충 대충 아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내게 다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나 뿐 아니라 내 자손들에게도 돌아갑니다.
나 때문에 내 자손의 앞길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행동 하나 말 하나 생각 하나 함부로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얼마나 조심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진지하다 조심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이리 저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피하는 자는 그 당시에는 좋을지 모르나 그 나중에는 결코 결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울면서 아픔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자가 그 결실을 가져 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울면서 아픔의 수고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을 생각 할 적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떤 자가 꿈꾸는 것 같은 사실이 이루어지는 복을 받습니까?
반드시 가져올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입니다.
인내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겠습니다 만은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기도하는 사람이 인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제가 아는 친구 교회의 장로님은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 회사의 샐러리맨으로 지나지 않았는데 거기에서 출발하여 중소기업 사장이 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갓 50대가 되었는데 무역 유통 섬유 전자 건설 식품 등 여러 기업을 이끄는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번 미국 여행에 함께 동참을 하였는데 제가 친구 목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저 장로내외분들 지금도 새벽기도에 출석 잘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구나! 그렇게 기도하는데 안 될 리가 없지 …….
그 정도면 그만 나올 만도 하는데 아니죠 기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기다림을 배우고 아직도 이루어야 할 일이 있기에 기도에 욕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열정 등에 인내심을 잃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하는 것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그발 강가에 모여 울며 회개하며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진 자마다 기도하는 자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기도하는 자 아닙니까?
일마다 시마다 문제마다 시험에 드는 자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그런 축복의 제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고 무엇인가 잘되기를 바라는 요행주의자가 되지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맥추절을 당하여 씨도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는 그런 미련한 자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기도를 심읍시다. 기도는 인내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많은 물질의 수고를 심으십시오 나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부요해지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많은 봉사와 전도도 심읍시다.우리 육체의 건강함과 생활의 안전과 평안을 보장 받을 것입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