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속임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행하는 대로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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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7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사무엘하 22:21-27 하나님은 속임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행하는 대로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2004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연간 자살자 수는 1만1523명에 이르고 자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간접비까지 포함하면 연간 3조856억 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국립서울병원과 이화여대는 7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대한 사회정신 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우리나라 자살의 사회. 경제적 비용 부담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고 합니다.
인생의 삶에 부정적인 사고를 지신 자살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피해만 남기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또 한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새들백 처지의 릭 워런의 아버지입니다.
릭 워런의 아버지 지미 워런 목사는 암으로 투병을 생활하다가 80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평소 생전에 지미 워런 목사는 이스라엘 과테말라 호주 등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직접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소천(所天)하기 전 수주일 동안 아들 릭 워런 집에 머물 때에 릭 워런 목사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계속 침대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시기에 아버지를 진정시키려고 아버지 지금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무엇을 원하세요?”라고 묻자 아버지가 힘들게 입술을 떼며 말씀하시기를 “한 명이라도 더 예수님께 가도록 해야 해. 한 명이라도 더…” 그는 병상에서 이 말을 수백 번이나 되뇌었다고 합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아버지가 한 말씀은 바로 ‘한 명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주님의 지상명령이었습니다.
육신의 마지막 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옆에 두고 나는 머리를 수그리고 울기 시작했을 때에 아버지는 손을 내 머리에 얹으시더니 축복하시듯 말씀하셨습니다.
“릭, 한 명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하거라. 한 명이라도 더!” 그 순간 나는 그 말씀을 내 인생의 주제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마당에서 너무나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아버지의 유언은 릭 워런 목사님에게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워런 목사는 한 영혼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로 알려졌는데 이번 7월 13-14일 ‘목적이 이끄는 교회 콘퍼런스’가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국민일보와 극동방송, 국제제자훈련원 공동 주최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자는 2300만부나 세계적으로 팔렸다고 합니다.
결코 하나님은 속임이 없으십니다.
내가 행하는 대로 그대로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둔 행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결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합니다.
인간 사울과 다윗입니다.
인간 사울은 끝까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의 삶을 이루었고 결국은 인간적인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삶이 결국은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결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21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사울과 다윗와의 관계를 결말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은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모든 성도가 폐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세우시는데 사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느낍니다.
인간적인 것은 결국은 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국은 세우심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속임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윗이 좋은 결말을 가져오게 됨은 어떤 이유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됨을 알았습니다.
시편 18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힘이 많이 드십니까?
온갖 무거운 짐을 지고 사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연령과 능력에 따라서 차이는 나지만, 이 세상에서 전혀 수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릇 생명체는 수고한 만큼 먹을 수 있고, 수고한 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땅에 붙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동물은 거의 모든 생애 동안 먹고 번식하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영양을 가급적 많이 뺏어 먹으려고 어머니와 치열하게 싸운다고 합니다.
태어난 아기는 젖꼭지에서 피가 나오도록 세차게 빱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온갖 수고를 다 해야 합니다.
요사이는 유치원 초등학생들만 보아도 살아가기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데 보장도 없으면서 앞날을 위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활 상태는 상당히 좋아졌지만,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해마다 100 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학업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다고 합니다.
청년과 장년이 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지나친 노동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한국 남자들이 40대에 사망하는 비율은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다윗은 이 힘든 세상에서 자신의 힘만 가지고는 살아 갈 수없음을 알았습니다.
다윗도 사울왕의 하는 일을 볼 때에 자살이라도 해야 할 것이요 무슨 일이라도 저질려야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 때문에 큰 좌절과 낙심에 힘이 쑥 빠져 버릴 것입니다 만은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공급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힘을 공급 받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은 그러나 육체적인 힘이 빠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 자체가 힘이 지만 지금은 젊음의 혈기로 살 수가 없습니다.
야! 힘을 축적해야겠다 하고 힘의 근원을 찾아보았습니다.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잘 먹어야겠습니다.
제가 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단백질이 공급이 되지 않으면 눈이 흐려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고기를 찾아서 챙겨 먹습니다. 그러면 눈이 밝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이 생기고 움직이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입니다. 먹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만큼 움직여 주어야 합니다.
손에 힘이 없으면 손이 움직여야 하고 하체에 힘이 없으면 하체가 움직여야 합니다.
먹고 움직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세상에서 내 힘으로만 살아 갈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먹고 그리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크게 승리한 사람입니다.
30절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세상적으로 힘이 다하였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공급 받을 때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할렐루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세상을 잘 살아 가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길이요 나의 생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추상적이 아니라 사실적입니다.
시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솔로몬에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때때로 성도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오늘 같은 날 야외로 놀러 가면 좋겠는데 놀러가지도 못하고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성질내고 욕하고 행동하고 싶은데 그것도 못하고
돈을 벌어 내가 다 쓰도 부족한데 십일조를 내라 선교헌금을 하라 건축 헌금을 하라 그것도 부족하여 천번제를 내라
학생회에서 성경을 필사하기로 하였는데 다른 공부 할 것도 많은데 아니지요
솔직히 말해 봅시다
왜 이렇게 꼭 하느냐 하고 따지고 순종하지 않을 때가 좋았습니까? 순종하며 따를 때가 좋았습니까?
바로 이것이 나를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을 아시고 감사히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도 말을 안 들어니 니 마음대로 하시오 하면 큰 일입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가면 아주 물살이 강한 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강의 양쪽에는 아주 묵직한 돌들을 쌓아두었습니다. 그 돌들은 그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돌입니다. 그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묵직한 돌을 짊어지고 가야만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강의 물살이 너무 세서 그냥 건너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가면 물살이 강한 그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까?
세상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입니다.인생의 강을 건너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인생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세속의 물결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건너려면 십자가의 짐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과 욕심과 정욕대로 살아 보십시오 편 할 것 같지만 결국은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자칫 잘못하면 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일에 온전한 자로 세우기에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책망과 바르게 하도록 교육을 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목동들이 양을 칠 때 양떼 사이에 염소를 한 마리 넣어 기릅니다. 그 이유는 양떼 사이에 염소를 넣어 놓으면 양과 염소가 싸움으로서 양들은 운동량이 많아져 튼튼해지고, 또 질 좋은 양털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양털을 생산하는 곳에는 반드시 염소가 한 마리 있습니다. 아주 사나운 염소가 있는 곳에는 더 좋은 양질의 털을 생산하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 7: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형통한 날과 곤곤한 날을 병행하여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형통한 날, 좋은 날만 주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한 날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곤고한 날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나쁜 일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형통한 날이든 곤고한 날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인 줄로 알고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의 삶은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어렸을 때 템즈 강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생명이 위태로울 때, 마침 지나가던 풀레밍이라는 청년이 뛰어 들어가 구해주었습니다. 처칠의 할아버지는 대단한 부자였는데 귀한 손자의 생명을 구해준 그 청년이 너무나 고마워서 청년의 소원대로 의과대학을 보내주었습니다. 그가 후에 의대를 졸업 맡고 페니실린이라는 약을 발견하여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후에 처칠이 군인 장교로 1차 대전에 참전하던 중 아프리카에서 폐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풀레밍은 자기가 만든 페니실린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에 가서 처칠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이 사람이 심은 선한 씨앗을 저 사람이 먹고 저 사람이 심은 씨앗을 이 사람이 먹음으로 서로가 도움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만드시고 화라도 복이 되게 하십니다.
26-27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는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무런 하나님을 향한 의식이 없고 선의 목적도 없이 살았던 삶을 회개할 때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찬송을 지은 존 뉴턴은 어린 시절에는 신앙심이 있던 아이였는데 자유사상가인 하나님은 없다 \\샤프츠베리\\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 타락과 방종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노예선의 선장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실어 와서 유럽에 팔아 넘겼던 사람이지만 아무런 가책이 없이 살아 왔습니다.
어느 날 대서양 부근을 항해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도무지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때 그에게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었던 하나님이 생각났고 그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을 붙드는 것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항해를 마치고 육지로 상륙한 그는 노예선의 선장직을 내어던졌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방탕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회심한 뉴턴은 그 후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노예무역을 폐지를 위해 앞장서서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일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내가 죽도록 순종하는 자세가 있을 뿐입니다.
2004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연간 자살자 수는 1만1523명에 이르고 자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간접비까지 포함하면 연간 3조856억 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국립서울병원과 이화여대는 7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대한 사회정신 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우리나라 자살의 사회. 경제적 비용 부담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고 합니다.
인생의 삶에 부정적인 사고를 지신 자살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피해만 남기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또 한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새들백 처지의 릭 워런의 아버지입니다.
릭 워런의 아버지 지미 워런 목사는 암으로 투병을 생활하다가 80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평소 생전에 지미 워런 목사는 이스라엘 과테말라 호주 등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직접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소천(所天)하기 전 수주일 동안 아들 릭 워런 집에 머물 때에 릭 워런 목사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계속 침대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시기에 아버지를 진정시키려고 아버지 지금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무엇을 원하세요?”라고 묻자 아버지가 힘들게 입술을 떼며 말씀하시기를 “한 명이라도 더 예수님께 가도록 해야 해. 한 명이라도 더…” 그는 병상에서 이 말을 수백 번이나 되뇌었다고 합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아버지가 한 말씀은 바로 ‘한 명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주님의 지상명령이었습니다.
육신의 마지막 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옆에 두고 나는 머리를 수그리고 울기 시작했을 때에 아버지는 손을 내 머리에 얹으시더니 축복하시듯 말씀하셨습니다.
“릭, 한 명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하거라. 한 명이라도 더!” 그 순간 나는 그 말씀을 내 인생의 주제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마당에서 너무나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아버지의 유언은 릭 워런 목사님에게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워런 목사는 한 영혼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로 알려졌는데 이번 7월 13-14일 ‘목적이 이끄는 교회 콘퍼런스’가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국민일보와 극동방송, 국제제자훈련원 공동 주최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자는 2300만부나 세계적으로 팔렸다고 합니다.
결코 하나님은 속임이 없으십니다.
내가 행하는 대로 그대로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둔 행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결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합니다.
인간 사울과 다윗입니다.
인간 사울은 끝까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의 삶을 이루었고 결국은 인간적인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삶이 결국은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결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21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사울과 다윗와의 관계를 결말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은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모든 성도가 폐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세우시는데 사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느낍니다.
인간적인 것은 결국은 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국은 세우심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속임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다윗이 좋은 결말을 가져오게 됨은 어떤 이유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됨을 알았습니다.
시편 18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힘이 많이 드십니까?
온갖 무거운 짐을 지고 사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연령과 능력에 따라서 차이는 나지만, 이 세상에서 전혀 수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릇 생명체는 수고한 만큼 먹을 수 있고, 수고한 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땅에 붙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동물은 거의 모든 생애 동안 먹고 번식하는 일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영양을 가급적 많이 뺏어 먹으려고 어머니와 치열하게 싸운다고 합니다.
태어난 아기는 젖꼭지에서 피가 나오도록 세차게 빱니다. 철이 들 무렵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은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온갖 수고를 다 해야 합니다.
요사이는 유치원 초등학생들만 보아도 살아가기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살아 보려고 애쓰는데 보장도 없으면서 앞날을 위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활 상태는 상당히 좋아졌지만,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해마다 100 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학업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다고 합니다.
청년과 장년이 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지나친 노동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한국 남자들이 40대에 사망하는 비율은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다윗은 이 힘든 세상에서 자신의 힘만 가지고는 살아 갈 수없음을 알았습니다.
다윗도 사울왕의 하는 일을 볼 때에 자살이라도 해야 할 것이요 무슨 일이라도 저질려야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 때문에 큰 좌절과 낙심에 힘이 쑥 빠져 버릴 것입니다 만은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공급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힘을 공급 받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은 그러나 육체적인 힘이 빠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 자체가 힘이 지만 지금은 젊음의 혈기로 살 수가 없습니다.
야! 힘을 축적해야겠다 하고 힘의 근원을 찾아보았습니다.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잘 먹어야겠습니다.
제가 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단백질이 공급이 되지 않으면 눈이 흐려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고기를 찾아서 챙겨 먹습니다. 그러면 눈이 밝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이 생기고 움직이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입니다. 먹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먹는 만큼 움직여 주어야 합니다.
손에 힘이 없으면 손이 움직여야 하고 하체에 힘이 없으면 하체가 움직여야 합니다.
먹고 움직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세상에서 내 힘으로만 살아 갈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먹고 그리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크게 승리한 사람입니다.
30절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세상적으로 힘이 다하였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공급 받을 때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할렐루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세상을 잘 살아 가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길이요 나의 생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추상적이 아니라 사실적입니다.
시2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솔로몬에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때때로 성도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오늘 같은 날 야외로 놀러 가면 좋겠는데 놀러가지도 못하고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성질내고 욕하고 행동하고 싶은데 그것도 못하고
돈을 벌어 내가 다 쓰도 부족한데 십일조를 내라 선교헌금을 하라 건축 헌금을 하라 그것도 부족하여 천번제를 내라
학생회에서 성경을 필사하기로 하였는데 다른 공부 할 것도 많은데 아니지요
솔직히 말해 봅시다
왜 이렇게 꼭 하느냐 하고 따지고 순종하지 않을 때가 좋았습니까? 순종하며 따를 때가 좋았습니까?
바로 이것이 나를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을 아시고 감사히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도 말을 안 들어니 니 마음대로 하시오 하면 큰 일입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가면 아주 물살이 강한 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강의 양쪽에는 아주 묵직한 돌들을 쌓아두었습니다. 그 돌들은 그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돌입니다. 그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묵직한 돌을 짊어지고 가야만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강의 물살이 너무 세서 그냥 건너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가면 물살이 강한 그 강에 떠내려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까?
세상의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입니다.인생의 강을 건너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인생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세속의 물결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건너려면 십자가의 짐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과 욕심과 정욕대로 살아 보십시오 편 할 것 같지만 결국은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자칫 잘못하면 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의 일에 온전한 자로 세우기에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책망과 바르게 하도록 교육을 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목동들이 양을 칠 때 양떼 사이에 염소를 한 마리 넣어 기릅니다. 그 이유는 양떼 사이에 염소를 넣어 놓으면 양과 염소가 싸움으로서 양들은 운동량이 많아져 튼튼해지고, 또 질 좋은 양털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양털을 생산하는 곳에는 반드시 염소가 한 마리 있습니다. 아주 사나운 염소가 있는 곳에는 더 좋은 양질의 털을 생산하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 7: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형통한 날과 곤곤한 날을 병행하여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형통한 날, 좋은 날만 주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한 날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곤고한 날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나쁜 일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형통한 날이든 곤고한 날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인 줄로 알고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의 삶은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습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어렸을 때 템즈 강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생명이 위태로울 때, 마침 지나가던 풀레밍이라는 청년이 뛰어 들어가 구해주었습니다. 처칠의 할아버지는 대단한 부자였는데 귀한 손자의 생명을 구해준 그 청년이 너무나 고마워서 청년의 소원대로 의과대학을 보내주었습니다. 그가 후에 의대를 졸업 맡고 페니실린이라는 약을 발견하여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후에 처칠이 군인 장교로 1차 대전에 참전하던 중 아프리카에서 폐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풀레밍은 자기가 만든 페니실린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에 가서 처칠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이 사람이 심은 선한 씨앗을 저 사람이 먹고 저 사람이 심은 씨앗을 이 사람이 먹음으로 서로가 도움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만드시고 화라도 복이 되게 하십니다.
26-27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는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무런 하나님을 향한 의식이 없고 선의 목적도 없이 살았던 삶을 회개할 때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찬송을 지은 존 뉴턴은 어린 시절에는 신앙심이 있던 아이였는데 자유사상가인 하나님은 없다 \\샤프츠베리\\라는 사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 타락과 방종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노예선의 선장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실어 와서 유럽에 팔아 넘겼던 사람이지만 아무런 가책이 없이 살아 왔습니다.
어느 날 대서양 부근을 항해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그는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도무지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때 그에게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들었던 하나님이 생각났고 그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을 붙드는 것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항해를 마치고 육지로 상륙한 그는 노예선의 선장직을 내어던졌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방탕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회심한 뉴턴은 그 후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노예무역을 폐지를 위해 앞장서서 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일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내가 죽도록 순종하는 자세가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