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이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사는 가장 좋은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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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23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로마서 1 : 10 - 15나와 당신이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사는 가장 좋은 길은
지난 13일 저녁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는 미국 새들백 처치 릭 웨런목사님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경기장은 월드컵 기간 동안 붉은 악마들이 그득했던 그 자리에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 10만 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앞서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는 신학생 목회자등 약 2만 명이나 모였다고 하니 제가 가지도 않았고 제 주위에 안간 목회자들이 거의 대부분인데 이렇게 모였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미국에 경제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의존하지 말고 자립하자 하고 외치지 만은 아직 시기상조라 하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가 믿음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아직도 미국인들의 신앙적인 부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 할 수없는 사실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위대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배출되는 것은 부인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근래 한국 교회에서 부활절등 연합 집회를 가졌지만 아무리 광고를 하고 하여도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이지 않았고 목회자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의 전하는 주된 내용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요 또한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힘을 쓰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목적이 이끄는 교회를 세우라, 지역 사회를 전도하라, 군중을 예배로 끌어 들려라등록 교인을 만들어라, 성숙한 교인을 키우라, 핵심 멤버에게 사역을 위임하라 등이었습니다.
이러면 교회는 부흥을 가져 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몰라서 부흥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잘 살고 잘 되는 방법을 몰라서 잘 못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잘 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더 잘 안 되고 있더라고요
돈 버는 방법을 몰라서 돈을 못 버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돈 버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돈을 못 벌고 있는 사람 많습니다.
가정의 화목의 방법을 몰라서 화목하지 않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잘 이끌어 나가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니 짐승에다가 비유를 하지 않았습니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개미같이 부지런 하고 이런 것은 좋은 모습이지만
수태된 암콤같은 무식함이라든지 노략질 하는 이리 같다든지 교활한 여우같다는 좋은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의 모습을 짐승들의 본성에다가 그렇게 견주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 개인의 모습을 가지고서는 결코 더 발전적일 수도 없고 더 나아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진리를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복음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포행자요 불량자요 혈기가 등등한 자요 형편이 없었던 자인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어디를 가든지 무슨 문제가 있든지 복음만이 살 길 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역량만을 가지고 상당히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역량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게 생겼고 죽지 못하여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내 역량으로 되지 않아 상당히 고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삶과 말에는 항상 부정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얼굴에다가 나는 부정적이다 라고 써서 다니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고 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바울이 로마로 가야 할 이유, 즉 로마를 살리는 복음을 들고 갈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확신해야 합니다.
나와 당신이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리는 가장 좋은 길이 복음을 전하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복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적인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보다 저질이 아닐까?
참으로 내 생각보다 나은 것일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보다 고질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세 나무가 모여서 각기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나는 여기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쓰였으면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둘째 나무가 내가 해변으로 인도되어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를 항해하였으면 좋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세 번째 나무도 여기에서 내 가지를 하늘을 향하여 지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런데 드디어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작은 마을 베들레헴 어느 집 말구유를 만드는데 쓰여졌습니다. 꿈은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두 번째 나무 큰 범선이 되기는커녕 갈릴리라는 호수에서 작은 어선이 되어 매일 바닥에는 냄새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목수들의 손에 의해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세 개의 십자가로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 나무는 사실 각자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한 나무는 그 구유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 뉘이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고기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심으로 세상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언덕 기슭에 있는 세 개의 평범한 나무였지만 그들은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렘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나를 인도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해 보십시오 너무나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10절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뜻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이 일러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일러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해하고 가장 행복하고 그리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길은 복음으로 피차 살리는 일입니다.
즉 안위 격려 용기 평안등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서로 나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가 되었던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수를 풀고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화목의 재물이 되신 것입니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함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와 나의 믿음이 피차(彼此)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잡아먹던 식인종 추장이 예수를 믿으니까 더 이상 사람을 안 잡아먹더랍니다. 어떤 백인상인이 상업차로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의 추장을 만났습니다. 그 때 추장은 열심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상인은 빈정거리며 그 책은 옛날 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나 보던 책이요. 지금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그런 책을 볼 필요가 없소. 라고 하니 그 추장은 한참동안 상인을 쳐다보더니 말하기를 만일 이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벌써 내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요. 세상은 변하여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진리는 변할 수 없소. 이 말씀이 사람을 잡아먹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만든 것이요. 과학이 결코 우리를 변하게 한 것이 아니요 라고 했답니다.
식인종이 복음으로 인명을 중히 여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피차가 살 수 있는 길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 되고 복음으로 가능해 집니다.
오늘 날 복음 때문에 모든 관계가 나빠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 때문에 모든 관계가 더 온전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막10:29-30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백배나 더 잘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가 살아 있는 이유 그리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내 인생이 복음을 위하는 길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복음적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와빙톤 이빙이 어느 도서관에서 고서를 탐독 하다가 잠깐 꿈을 꾸었는데 그 도서관 벽에 역대 유명한 석학들의 초상화에서 실물이 한 사람씩 내려와서 “내 것을 내놓아” 하면서 이빙이 입고 있는 옷을 한가지식 벗겨가 버리는데 나중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발가벗겨 졌습니다. 깜짝 놀란 이빙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학자로 존경을 받고 학문으로 살아왔지만 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 않나? 하면서 다시 한 번 삶을 점검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빚 진 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특히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빚 진자입니다.
인격을 갖춘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께로 받았으니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 이 정신력, 선천적 소질, 후천적 소유, 현재 생존하는 세월, 모두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 입니다.
거기에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 모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기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비가 영동 지방에 많이 와서 한계령 숙소에 갇힌 사람이 수백 명이 되고 영동 고속도로에 갇힌 차가 수백 대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막아 놓으시니 꼼짝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이 장마로 생명까지도 불러 간 자들도 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라고 큰 소리 칠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실 것입니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근본 다 하나님 소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만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 진자 입니다.
아직도 내 욕심과 내 정욕과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거니 하는 어리석음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역사 앞에 빚 진자 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무수한 역사적인 유산의 흐름 속에서 오늘 우리는 현대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사용하며 살고 있는 한글, 수학지식, 과학지식, 정치, 경제, 교육, 각양 기슬 어느 하나도 나 자신이 창작한 것은 없습니다.
선배들의 피와 땀과 생명이 응결된 역사적 유산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역사를 후대에 잘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빚진 자 입니다.
나는 나만이 내가 아닙니다.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는 수 없이 많은 너라는 연계 관계 속에 나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내 밥상 속에 사회가 있습니다.
어제 학생회 회식하는 식탁을 보니 우리 학생들은 그져 정신없이 먹기만 하던데 소고기 돼지고기 생선 과일 모두 수많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지 않습니까?
내 의복 속에 사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사회를 먹고 사회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내 주택, 자녀, 거리의 자유, 내일에의 희망, 이 모든 것 속에 사회가 있습니다.
수많은 나 아닌 너의 희생과 수고, 사랑과 봉사, 직접 간접 집결된 그 속에서 나는 오늘도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사회적 산물인 의, 식, 주속에 살면서 나는 이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사회는 우리의 채권자요, 우리는 그 사회 앞에 빚 갚고 가야하는 채무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에게 선후배 친구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주장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감사하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바울의 고백이 이해되어지십니까?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먹여 줍니까? 중국인에게도 베트남 동남아시아 등등 전 세계 민족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떡하든지 이 은혜를 다 갚기 위하여 저 무시무시한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내가 가진 것 모든 것이 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이에게 그리고 사회에 온 세상을 향하여 사용 되어져야 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내 것이라고 하는 교만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사용 된다는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잘 살고 그리고 모두가 다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지난 13일 저녁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는 미국 새들백 처치 릭 웨런목사님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경기장은 월드컵 기간 동안 붉은 악마들이 그득했던 그 자리에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 10만 명이나 모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앞서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는 신학생 목회자등 약 2만 명이나 모였다고 하니 제가 가지도 않았고 제 주위에 안간 목회자들이 거의 대부분인데 이렇게 모였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미국에 경제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의존하지 말고 자립하자 하고 외치지 만은 아직 시기상조라 하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가 믿음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아직도 미국인들의 신앙적인 부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 할 수없는 사실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위대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배출되는 것은 부인 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근래 한국 교회에서 부활절등 연합 집회를 가졌지만 아무리 광고를 하고 하여도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이지 않았고 목회자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의 전하는 주된 내용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요 또한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힘을 쓰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목적이 이끄는 교회를 세우라, 지역 사회를 전도하라, 군중을 예배로 끌어 들려라등록 교인을 만들어라, 성숙한 교인을 키우라, 핵심 멤버에게 사역을 위임하라 등이었습니다.
이러면 교회는 부흥을 가져 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몰라서 부흥을 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잘 살고 잘 되는 방법을 몰라서 잘 못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잘 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더 잘 안 되고 있더라고요
돈 버는 방법을 몰라서 돈을 못 버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돈 버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돈을 못 벌고 있는 사람 많습니다.
가정의 화목의 방법을 몰라서 화목하지 않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잘 이끌어 나가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늘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니 짐승에다가 비유를 하지 않았습니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개미같이 부지런 하고 이런 것은 좋은 모습이지만
수태된 암콤같은 무식함이라든지 노략질 하는 이리 같다든지 교활한 여우같다는 좋은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의 모습을 짐승들의 본성에다가 그렇게 견주어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 개인의 모습을 가지고서는 결코 더 발전적일 수도 없고 더 나아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진리를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복음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이 포행자요 불량자요 혈기가 등등한 자요 형편이 없었던 자인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어디를 가든지 무슨 문제가 있든지 복음만이 살 길 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역량만을 가지고 상당히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역량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게 생겼고 죽지 못하여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내 역량으로 되지 않아 상당히 고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삶과 말에는 항상 부정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얼굴에다가 나는 부정적이다 라고 써서 다니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할 수 없으면 할 수 없고 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바울이 로마로 가야 할 이유, 즉 로마를 살리는 복음을 들고 갈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확신해야 합니다.
나와 당신이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리는 가장 좋은 길이 복음을 전하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복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적인 가장 좋은 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보다 저질이 아닐까?
참으로 내 생각보다 나은 것일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보다 고질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습니다. 세 나무가 모여서 각기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나는 여기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쓰였으면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둘째 나무가 내가 해변으로 인도되어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를 항해하였으면 좋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세 번째 나무도 여기에서 내 가지를 하늘을 향하여 지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런데 드디어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작은 마을 베들레헴 어느 집 말구유를 만드는데 쓰여졌습니다. 꿈은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두 번째 나무 큰 범선이 되기는커녕 갈릴리라는 호수에서 작은 어선이 되어 매일 바닥에는 냄새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목수들의 손에 의해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세 개의 십자가로 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세 나무는 사실 각자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한 나무는 그 구유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 뉘이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고기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심으로 세상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언덕 기슭에 있는 세 개의 평범한 나무였지만 그들은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렘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나를 인도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해 보십시오 너무나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10절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뜻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이 일러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일러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해하고 가장 행복하고 그리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길은 복음으로 피차 살리는 일입니다.
즉 안위 격려 용기 평안등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서로 나눠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가 되었던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수를 풀고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화목의 재물이 되신 것입니다.
11-12절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함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와 나의 믿음이 피차(彼此)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잡아먹던 식인종 추장이 예수를 믿으니까 더 이상 사람을 안 잡아먹더랍니다. 어떤 백인상인이 상업차로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의 추장을 만났습니다. 그 때 추장은 열심으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상인은 빈정거리며 그 책은 옛날 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나 보던 책이요. 지금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그런 책을 볼 필요가 없소. 라고 하니 그 추장은 한참동안 상인을 쳐다보더니 말하기를 만일 이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벌써 내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요. 세상은 변하여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진리는 변할 수 없소. 이 말씀이 사람을 잡아먹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만든 것이요. 과학이 결코 우리를 변하게 한 것이 아니요 라고 했답니다.
식인종이 복음으로 인명을 중히 여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피차가 살 수 있는 길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 되고 복음으로 가능해 집니다.
오늘 날 복음 때문에 모든 관계가 나빠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 때문에 모든 관계가 더 온전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막10:29-30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백배나 더 잘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가 살아 있는 이유 그리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내 인생이 복음을 위하는 길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복음적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와빙톤 이빙이 어느 도서관에서 고서를 탐독 하다가 잠깐 꿈을 꾸었는데 그 도서관 벽에 역대 유명한 석학들의 초상화에서 실물이 한 사람씩 내려와서 “내 것을 내놓아” 하면서 이빙이 입고 있는 옷을 한가지식 벗겨가 버리는데 나중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발가벗겨 졌습니다. 깜짝 놀란 이빙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학자로 존경을 받고 학문으로 살아왔지만 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지 않나? 하면서 다시 한 번 삶을 점검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빚 진 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특히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빚 진자입니다.
인격을 갖춘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께로 받았으니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 이 정신력, 선천적 소질, 후천적 소유, 현재 생존하는 세월, 모두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 입니다.
거기에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 모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기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비가 영동 지방에 많이 와서 한계령 숙소에 갇힌 사람이 수백 명이 되고 영동 고속도로에 갇힌 차가 수백 대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막아 놓으시니 꼼짝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이 장마로 생명까지도 불러 간 자들도 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라고 큰 소리 칠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실 것입니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근본 다 하나님 소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만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 진자 입니다.
아직도 내 욕심과 내 정욕과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거니 하는 어리석음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역사 앞에 빚 진자 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무수한 역사적인 유산의 흐름 속에서 오늘 우리는 현대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사용하며 살고 있는 한글, 수학지식, 과학지식, 정치, 경제, 교육, 각양 기슬 어느 하나도 나 자신이 창작한 것은 없습니다.
선배들의 피와 땀과 생명이 응결된 역사적 유산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역사를 후대에 잘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빚진 자 입니다.
나는 나만이 내가 아닙니다.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내 속에는 수 없이 많은 너라는 연계 관계 속에 나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내 밥상 속에 사회가 있습니다.
어제 학생회 회식하는 식탁을 보니 우리 학생들은 그져 정신없이 먹기만 하던데 소고기 돼지고기 생선 과일 모두 수많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지 않습니까?
내 의복 속에 사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사회를 먹고 사회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내 주택, 자녀, 거리의 자유, 내일에의 희망, 이 모든 것 속에 사회가 있습니다.
수많은 나 아닌 너의 희생과 수고, 사랑과 봉사, 직접 간접 집결된 그 속에서 나는 오늘도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사회적 산물인 의, 식, 주속에 살면서 나는 이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사회는 우리의 채권자요, 우리는 그 사회 앞에 빚 갚고 가야하는 채무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에게 선후배 친구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주장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감사하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바울의 고백이 이해되어지십니까?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먹여 줍니까? 중국인에게도 베트남 동남아시아 등등 전 세계 민족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떡하든지 이 은혜를 다 갚기 위하여 저 무시무시한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내가 가진 것 모든 것이 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이에게 그리고 사회에 온 세상을 향하여 사용 되어져야 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내 것이라고 하는 교만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사용 된다는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잘 살고 그리고 모두가 다 잘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