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있는 절망의 조건은 하나님 앞에는 얼마든지 구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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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4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열왕기상 19: 1- 8당신에게 있는 절망의 조건은 하나님 앞에는 얼마든지 구원이 됩니다.
어느 장군이 전장에서 패하여 도망하다가 칼을 들어 자살하려고 할 때, 개미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는데 자기보다 큰 먹이를 물고 가다가는 힘겨워 쓰러지는데 포기를 하지 않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는데 일어서서 또 가는데 호기심이 생겨 계속 따라가 보았는데 69번을 떨어뜨렸는데도 일어서서 그리고는 70번째 개미굴로 그 먹이를 가지고 들어가는 보고는 그는 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이제 겨우 한번 실패하지 않았느냐. 용기를 얻어 다시 나가 그는 승리의 장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좌절과 절망이 내게 당한 문제 때문만이 아닙니다.
돈 없고 힘없고 재능 없고 배운 것 없고 또 무엇이 없습니까?
그런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거 골 백번 해 봤자 필요 없습니다.
처한 환경 가운데서 내가 일어 설 수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옛날부터 나무에 오로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올라갈 때는 위만 보고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에서 내려올 때는 아래를 보고 내려오기 때문에 두려움이 온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도 마찬 가지입니다.
문제 많고 절망적인 세상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땅에 것만 바라보지 말라 각종 좋은 은사는 위로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느니라 할렐루야!
세상에서 죄악과 우울과 고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시라도 한눈팔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볼 때는 능히 물 위로 걸어갈 수 있었으나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에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세상이 말하는 절망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 속에서는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은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임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는 절망을 내가 세상을 향해 자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을 할 때에 일어나는 생의 부정적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있는 자아의 힘과 비 자아의 힘이 심한 갈등을 이룰 때 자아의 힘과 비자아의 힘 사이에 모호한 경계선이 일어나는데 이때 인간의 개인의 의지가 정지되거나 변질 되는 현상을 절망이라 생각했습니다.
소이 자신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낄 때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니 얼마나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말씀 하시지 않으십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막스는 인간의 절망의 현상을 물질에다가 기준을 두었습니다.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등도 모두 물질적인 것에 위하여 움직인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역시 경제적인 동물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빵을 채워주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이일을 절망의 근본을 해결해 줌으로 절망을 정복하는 유일한 첩경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인간을 절망에서 구원하였습니까?
점점 절망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북한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의 공산 정권은 어떤 형태로든지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먹을 것만 있으면 절망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틀렸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19세기 말 펴낸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에서 인간의 삶이 이성이 아닌 의지에 의해 움직이고, 사회를 지배하고 역사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몇 몇의 초인의 권력의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초인을 기다린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주장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초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절망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결국 그는 죽어 가면서 외치는 말이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허무와 절망이었겠습니까?
그는 미쳐 버렸습니다.
초인이 사실 누구입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인 솔로몬은 인간이 허무하지 않고 절망적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高尙)하기 때문에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된다면 배설물과 같이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절망을 죽음과 운명의 불안, 공허와 무의미성의 불안에서 인간이 정신적인 자기주장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책감과 정죄의 불안에서 인간의 도덕적 자기주장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벌벌 떨고 있는 인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지 않고는 세상의 두려움에서 자유하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세상의 종이 되어 벌벌 떨고 겁을 전득이나 먹고 있습니다.
이같이 세상적인 절망은 그 원인을 현실 그 자체에다 깊이 집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불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엘리야 역시 심한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엘리야의 절망감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렇게 있을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인생은 항상 절망하게 하는 요소들이 나의 잘 잘못과 의지와 상관이 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절망케 하는 원인이 아닙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했고, 바알의 우상의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냇가에서 목 베어 죽이고 3년 6개월간 내리지 않던 비를 내리게 한 엘리야가 오늘은 심히 공포를 느끼고 도망하다가 죽기를 구했습니다.
우울증도 보통 우울증이 아닙니다.
인간의 용기와 절망은 종이 한 장 차이 입니다.
주님께 붙들려 있어야만 용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절망의 조건을 보면 절망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의 조건을 먼저 보게 되니 더 이상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공에 매달려 구름다리를 건너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다리 밑에 펼쳐지는 낭떠러지를 보게 됩니다.
그 밑만 바라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찔어찔 하고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나아 갈 수 있음은 튼튼하게 만들어진 다리와 그리고 저 건너편까지 연결된 길을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대결의 승리 이후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곧 우울해져서 유대의 최남단의 브엘세바로사환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사환을 머물게 하고 자신은 다시 하룻길을 더 걸어 로뎀 나무 아래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왜 다리 아래만 보고 있느냐?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갈멜산 승리는 어디로 가고 이세벨의 협박으로 이렇게 나약해지고 우울해질 수 있습니까?
엘리야는 이세벨을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으로부터 가져오는 승리를 잊었습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나만 홀로 남았구나라고 별 볼일 없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인간은 별 볼일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도 붙잡혀 사용이 되니 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나만 홀로”의 신학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학입니다.
최소한 우리의 신앙은 나만 홀로의 신앙이 아님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고독이란 병입니다.
어느 분은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한 술 더 뜨서 어떤 분은 식구들과 함께 동반 자실을 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나만 홀로입니까? 그래도 주위를 돌아보면 의지할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도울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가령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나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왜 이 사실을망각하고 삽니까?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승리 중에 계신 주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믿읍시다.
나만 홀로의 사상은 무신론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의 신관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 28:20).
이 시간에도 세상 일로 지친 나에게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낙망된 엘리야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혀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사업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그들에게 오셔서 성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찢어지도록 가난하여 먹을 양식이 떨어진 사르밧 과부 집에 찾아 오셨습니다 흉년이 몇 해를 갔지만 신기하게도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니다.
이제는 아셔야 합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셔서 부정적이요 절망적이었구나?
이제라도 내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자 할렐루야!
하나님의 의지에 내 의지를 드릴 때에 모든 삶이 활짝 활짝 열리는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 보시고 언어를 바꿔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가십시오
좀 더 헌신하기를 즐겨하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경배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된장 녀로 고추장남으로 이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재벌가에 시집가는 노현정 아나운서는 그녀는 범사에 임마누엘의 신앙생활인 이었습니다.
기도와 신앙이 일치 하는 생활입니다.
노현정씨가 모태신앙인으로 어릴 때부터 기도생활을 습관화해온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는데 노 씨는 어릴 적부터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경기중앙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지난주 결혼을 발표한 뒤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당 강단에 꽃꽂이를 해놓기도 했는데 딸 셋 중 맏딸인 현정 씨가 권사이신 어머니의 신앙을 빼닮아 기도도 열심히 하고 독실한 신앙을 지녔다”고 밝히고 집이 교회에서 먼 데도 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왔다”고 했습니다.노 씨는 지난 1월 펴낸 에세이집 황금 유리창에 실린 기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기도가 한 치도 어김없이 이뤄졌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 하나님, 정말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아나운서가 되기에 준비가 더 필요하다고 보시면 떨어뜨리셔도 좋습니다. 더 준비한 후 내년에 다시 시험을 보겠습니다고 기도했더니 정말 똑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이어 다음해 시험에서 KBS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 이번엔 절대 안 됩니다. 꼭 붙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그때는 이뤄주셨다고 말했으며 그는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하나님! 20대 청춘의 의무를 다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제 그릇에 꼭 맞는 인연 하나만 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범사에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겸허하게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 올라온 자들에게 얼마나 축복을 하시는 놀랬습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주님을 잊어버린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죽음을 구상하는 극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인물이었지만 주님을 생각하는 삭개오 옆에 있는 뽕나무는 구주 예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금만 믿음적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만사가 다 나를 위하여 있고 내게 축복이 되도록 다가옵니다.
내가 부정적이니 모든 사람이 부정적이고 모든 주위가 부정적으로 다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내가 일어나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복된 일들을 많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남유다 북 이스라엘의 왕 에돔의 왕을 세우는 일과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믿음에 있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존 낙스(John Knox)는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라고 영혼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주의 일에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 세계를 다 달라고 구하십시오
이제 더 이상 나 생긴 꼴을 보고 실망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인하며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장군이 전장에서 패하여 도망하다가 칼을 들어 자살하려고 할 때, 개미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는데 자기보다 큰 먹이를 물고 가다가는 힘겨워 쓰러지는데 포기를 하지 않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는데 일어서서 또 가는데 호기심이 생겨 계속 따라가 보았는데 69번을 떨어뜨렸는데도 일어서서 그리고는 70번째 개미굴로 그 먹이를 가지고 들어가는 보고는 그는 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이제 겨우 한번 실패하지 않았느냐. 용기를 얻어 다시 나가 그는 승리의 장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좌절과 절망이 내게 당한 문제 때문만이 아닙니다.
돈 없고 힘없고 재능 없고 배운 것 없고 또 무엇이 없습니까?
그런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거 골 백번 해 봤자 필요 없습니다.
처한 환경 가운데서 내가 일어 설 수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옛날부터 나무에 오로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올라갈 때는 위만 보고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에서 내려올 때는 아래를 보고 내려오기 때문에 두려움이 온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도 마찬 가지입니다.
문제 많고 절망적인 세상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땅에 것만 바라보지 말라 각종 좋은 은사는 위로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느니라 할렐루야!
세상에서 죄악과 우울과 고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시라도 한눈팔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볼 때는 능히 물 위로 걸어갈 수 있었으나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에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세상이 말하는 절망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 속에서는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은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임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는 절망을 내가 세상을 향해 자신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을 할 때에 일어나는 생의 부정적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있는 자아의 힘과 비 자아의 힘이 심한 갈등을 이룰 때 자아의 힘과 비자아의 힘 사이에 모호한 경계선이 일어나는데 이때 인간의 개인의 의지가 정지되거나 변질 되는 현상을 절망이라 생각했습니다.
소이 자신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낄 때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니 얼마나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말씀 하시지 않으십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막스는 인간의 절망의 현상을 물질에다가 기준을 두었습니다.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등도 모두 물질적인 것에 위하여 움직인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역시 경제적인 동물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빵을 채워주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이일을 절망의 근본을 해결해 줌으로 절망을 정복하는 유일한 첩경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인간을 절망에서 구원하였습니까?
점점 절망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북한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의 공산 정권은 어떤 형태로든지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먹을 것만 있으면 절망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틀렸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19세기 말 펴낸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에서 인간의 삶이 이성이 아닌 의지에 의해 움직이고, 사회를 지배하고 역사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몇 몇의 초인의 권력의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초인을 기다린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주장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초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절망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결국 그는 죽어 가면서 외치는 말이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허무와 절망이었겠습니까?
그는 미쳐 버렸습니다.
초인이 사실 누구입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인 솔로몬은 인간이 허무하지 않고 절망적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高尙)하기 때문에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된다면 배설물과 같이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절망을 죽음과 운명의 불안, 공허와 무의미성의 불안에서 인간이 정신적인 자기주장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책감과 정죄의 불안에서 인간의 도덕적 자기주장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벌벌 떨고 있는 인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지 않고는 세상의 두려움에서 자유하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세상의 종이 되어 벌벌 떨고 겁을 전득이나 먹고 있습니다.
이같이 세상적인 절망은 그 원인을 현실 그 자체에다 깊이 집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불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엘리야 역시 심한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엘리야의 절망감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렇게 있을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인생은 항상 절망하게 하는 요소들이 나의 잘 잘못과 의지와 상관이 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절망케 하는 원인이 아닙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했고, 바알의 우상의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냇가에서 목 베어 죽이고 3년 6개월간 내리지 않던 비를 내리게 한 엘리야가 오늘은 심히 공포를 느끼고 도망하다가 죽기를 구했습니다.
우울증도 보통 우울증이 아닙니다.
인간의 용기와 절망은 종이 한 장 차이 입니다.
주님께 붙들려 있어야만 용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절망의 조건을 보면 절망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의 조건을 먼저 보게 되니 더 이상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공에 매달려 구름다리를 건너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다리 밑에 펼쳐지는 낭떠러지를 보게 됩니다.
그 밑만 바라보고 있으면 머리가 어찔어찔 하고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나아 갈 수 있음은 튼튼하게 만들어진 다리와 그리고 저 건너편까지 연결된 길을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대결의 승리 이후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곧 우울해져서 유대의 최남단의 브엘세바로사환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사환을 머물게 하고 자신은 다시 하룻길을 더 걸어 로뎀 나무 아래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왜 다리 아래만 보고 있느냐?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갈멜산 승리는 어디로 가고 이세벨의 협박으로 이렇게 나약해지고 우울해질 수 있습니까?
엘리야는 이세벨을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으로부터 가져오는 승리를 잊었습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나만 홀로 남았구나라고 별 볼일 없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인간은 별 볼일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도 붙잡혀 사용이 되니 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나만 홀로”의 신학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학입니다.
최소한 우리의 신앙은 나만 홀로의 신앙이 아님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고독이란 병입니다.
어느 분은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한 술 더 뜨서 어떤 분은 식구들과 함께 동반 자실을 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나만 홀로입니까? 그래도 주위를 돌아보면 의지할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도울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가령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나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왜 이 사실을망각하고 삽니까?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승리 중에 계신 주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믿읍시다.
나만 홀로의 사상은 무신론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의 신관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 28:20).
이 시간에도 세상 일로 지친 나에게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낙망된 엘리야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혀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사업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그들에게 오셔서 성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찢어지도록 가난하여 먹을 양식이 떨어진 사르밧 과부 집에 찾아 오셨습니다 흉년이 몇 해를 갔지만 신기하게도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니다.
이제는 아셔야 합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셔서 부정적이요 절망적이었구나?
이제라도 내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자 할렐루야!
하나님의 의지에 내 의지를 드릴 때에 모든 삶이 활짝 활짝 열리는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꿔 보시고 언어를 바꿔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가십시오
좀 더 헌신하기를 즐겨하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경배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된장 녀로 고추장남으로 이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재벌가에 시집가는 노현정 아나운서는 그녀는 범사에 임마누엘의 신앙생활인 이었습니다.
기도와 신앙이 일치 하는 생활입니다.
노현정씨가 모태신앙인으로 어릴 때부터 기도생활을 습관화해온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는데 노 씨는 어릴 적부터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경기중앙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지난주 결혼을 발표한 뒤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당 강단에 꽃꽂이를 해놓기도 했는데 딸 셋 중 맏딸인 현정 씨가 권사이신 어머니의 신앙을 빼닮아 기도도 열심히 하고 독실한 신앙을 지녔다”고 밝히고 집이 교회에서 먼 데도 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왔다”고 했습니다.노 씨는 지난 1월 펴낸 에세이집 황금 유리창에 실린 기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의 기도가 한 치도 어김없이 이뤄졌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 하나님, 정말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아나운서가 되기에 준비가 더 필요하다고 보시면 떨어뜨리셔도 좋습니다. 더 준비한 후 내년에 다시 시험을 보겠습니다고 기도했더니 정말 똑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이어 다음해 시험에서 KBS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 이번엔 절대 안 됩니다. 꼭 붙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더니 그때는 이뤄주셨다고 말했으며 그는 또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하나님! 20대 청춘의 의무를 다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제 그릇에 꼭 맞는 인연 하나만 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범사에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겸허하게 하나님을 바라는 자에게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저는 오늘 새벽에 올라온 자들에게 얼마나 축복을 하시는 놀랬습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주님을 잊어버린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죽음을 구상하는 극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인물이었지만 주님을 생각하는 삭개오 옆에 있는 뽕나무는 구주 예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금만 믿음적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만사가 다 나를 위하여 있고 내게 축복이 되도록 다가옵니다.
내가 부정적이니 모든 사람이 부정적이고 모든 주위가 부정적으로 다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내가 일어나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복된 일들을 많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남유다 북 이스라엘의 왕 에돔의 왕을 세우는 일과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믿음에 있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존 낙스(John Knox)는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라고 영혼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주의 일에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 세계를 다 달라고 구하십시오
이제 더 이상 나 생긴 꼴을 보고 실망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시인하며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