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은 약속 되었으니 구원을 감당하는 일군을 주옵소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42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사사기 7 : 1 - 9하나님의 구원은 약속 되었으니 구원을 감당하는 일군을 주옵소서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신(神)은 다수(多數)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수가 많으면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수를 많이 가진 자가 다가오는 역사의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예언이 오늘의 시대에 맞아 들어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 중국은 많은 인구를 큰 파워로 하여 고속 성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인구는 약 13억으로 세계 1위입니다. 전 세계 인구를 52억으로 계산한다면 4분의 1에 육박하는 수입니다. 앞으로 얼마 있지 않아 중국이 세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1950년 육이오 전쟁 때에 우리 민족이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북진 선봉 부대가 진격하여 압록강 물을 마시고 즐거워했지만 중공군의 인해 전술 앞에는 꼼짝하지 못하고 후퇴 할 수밖에 없는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기관단총을 쏘아도 쏘아도 끝없이 올라오는데 나중에는 총구가 열을 받아 총 알이 나아가지 않고 총구가 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역시 세상은 수가 많으면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예언은 세상에서는 맞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마병이 적고 많음에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삼백 명의 군대보다 만 명의 군대가 훨씬 더 전투하기에 유리하고, 만 명의군대보다는 삼만 이천 명의 군대가 더 우세하다는 것은 갓난아이도 알수 있는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상대는 십삼만 오천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많은 숫자가 모일 수 있음에도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싸우는 병력을 고작 삼백 명으로 큰 승리를 가져 오게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습니까?
구원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때문에 괴롬을 당하기를 7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미디안은 아말렉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모든 육축을 빼앗아 가고 농사를 지으면 곡식도 모조리 빼앗아가고 생명을 위협하기도 해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살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을 가서 굴을 파고 숨어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기드온 역시 미디안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7년간이나 괴로워하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이제야 구원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구원을 약속하신 자이시기 때문에 그를 찾는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미디안에게서 고통스러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원에 대해서는 원하기만 하면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하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때문입니다.
전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얻기 위한 그 무엇이 그들에게 전혀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위한 그들이 그 조건이 없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께 내가 이 가운데서 구원을 원한다고 소리를 치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소경들이 소리를 쳤습니다.
우리가 보기를 원한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래 나도 너희가 보기를 원하노라 너 소원대로 될지어다고 하시니 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주님을 향하여 주여 내 삶에서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소리를 쳐 보십시오
그래 나도 네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 인하여 상당히 두려워하고 염려해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 모두도 그러합니다.
아무도 세상에서 자유 하는 자가 없습니다. 꽁꽁 묶여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도 세상의 삶에서 구원의 비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뜻은 당신은 구원이라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자신을 원하는 자에게 구원이 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에게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나 구원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구원이 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세상 숫자에 겁먹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믿음을 가진 일군들이 필요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이십니다 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대적하기 위하여 군사를 전국에서 모집하였지만 싸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32,0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 연합군의 5분의 일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들은 전쟁을 겁먹고 있는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 자들입니다.
싸우나 마나 이 숫자로는 승리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였으나 전쟁을 무서워하는 자 22,000명이 떠나니 10,000명이 남았는데 갈수록 태산입니다.
이제는 십분의 일도 안 됩니다.
전쟁을 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의지가 없으니 싸우나 마나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들도 다 돌려보내고 보니 300명이 남았습니다.
이제는 오십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숫자의 놀음에 개의치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알릴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구원의 축복을 받고 가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아멘이 되십니까?
교회와 성도가 큰 어려움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 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구원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나겠느냐?
그 어머니 그 형제자매 우리와 똑같은 자들 아닌가 하고 인간적으로 논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시고 오병이어의 역사를 가지신 분이 믿음이 없는 나사렛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크게 받아야 하는 나사렛 사람이 어찌 예수님의 구원하고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충만하시지만 인간적으로 살아 가면은 인간적인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큰 구원이 있는데 왜 나와는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 있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바로 나을 위한 구원이심을 믿고 나의 구원을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여 이 자리에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나를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나게 합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처럼 언제까지나 앉아서 남이 어떻게 해 줄때만 기다려 보았자 동정의 동전 몇 닢만 떨어졌지 아무런 구원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 자리에서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금과 은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랬더니 힘없이 달려있던 다리에 힘이 솟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믿음의 힘으로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내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니 언제 일어 날 수가 있습니까?
내 힘이 언제 솟아나겠습니까? 지금까지 살아 왔지만 힘이 안 나는데... ...
예수님을 의지하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일어난다는 것은 발전과 진보를 뜻합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곧 부흥운동입니다.(Revival movement)
부흥운동이란 침체된 것을 다시 북돋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자신이 믿음이 없는 삶의 행동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라 죄악에 잠자는 영혼아 달리다굼 일어나 걸어라 어둠은 물러가고 새 날이 다가오네
나로 인하여 이 화평교회가 부흥되도록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나와 가정에 우리 교회에 약속되었으니 믿고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또 어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합니까?
영적 침체 상태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침체상태란 열심이 식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나태와 게으름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내려 주실 때에 왜 새벽에 주셨습니까?
그 만큼 신앙생활은 부지런해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게으른 자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많이 있습니다.
특히 잠언에는 게으른 자는 주릴 것이요, 게으른 자는 남에게 부림을 당할 것이요.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갈지 않으므로 거둘 때에 구걸하게 될 것이요.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다 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게으름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적당한 수면을 취하여야 건강에도 좋지만 영혼은 절대로 잠들면 안 됩니다.
영혼이 잠들면영혼이 죽어요.
그래서 사탄은 우리들의 영혼이 잠들도록 자꾸만 자장가를 부르고 수면제를 뿌리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뿌립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믿음의 일군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 오게 합니다.
문제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뢰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똑똑하다고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미련하기 때문에 쓰시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자는 싫어하시고 가난한 사람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식한 자를 싫어하시고 무식하고 못 난자들만 들어서 쓰시는 괴팍한 하나님으로 보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남기신 삼백 명은 인간적인 조건을 보고 남긴 자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믿음을 져 버리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쓰시게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를 원하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께 쓰임을 받는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할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진정한 제자된 사람, 십자가 군사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무의미한 다수보다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헌신된 소수를 키우기 위해서 다수가 중요하지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교회에 수가 많은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숫자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습니다.
감리교 창설자 존 웨슬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300명을 달라 내가 세상을 변화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작은 행동까지 달라집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은밀한 가운데서 당신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순간에도 우리를 관찰하십니다.
우리가 성실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하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답게살고 있는지 세밀히 보고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의 삶의 지표는 라틴어로 CoramDeo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칼빈은 이 말을 일생 좌우명으로삼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할 때 칼빈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멋지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미 없는 삼만 이천 명보다 준비된 삼백 명을 원하시는 뜻을 헤아려 보십시오.
이제 우리 교회는 숫자만을 논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훈련된 믿음의 일꾼이 얼마나 되느냐? 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원하는 믿음의 일군으로 하루하루를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스카우트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될 것이지 나는 아니냐 하지 마시고 바로 내가 교회를 일으키고 가정을 복되게 하는 그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신(神)은 다수(多數)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수가 많으면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수를 많이 가진 자가 다가오는 역사의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예언이 오늘의 시대에 맞아 들어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 중국은 많은 인구를 큰 파워로 하여 고속 성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인구는 약 13억으로 세계 1위입니다. 전 세계 인구를 52억으로 계산한다면 4분의 1에 육박하는 수입니다. 앞으로 얼마 있지 않아 중국이 세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1950년 육이오 전쟁 때에 우리 민족이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북진 선봉 부대가 진격하여 압록강 물을 마시고 즐거워했지만 중공군의 인해 전술 앞에는 꼼짝하지 못하고 후퇴 할 수밖에 없는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기관단총을 쏘아도 쏘아도 끝없이 올라오는데 나중에는 총구가 열을 받아 총 알이 나아가지 않고 총구가 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역시 세상은 수가 많으면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타고라스의 예언은 세상에서는 맞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마병이 적고 많음에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삼백 명의 군대보다 만 명의 군대가 훨씬 더 전투하기에 유리하고, 만 명의군대보다는 삼만 이천 명의 군대가 더 우세하다는 것은 갓난아이도 알수 있는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상대는 십삼만 오천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많은 숫자가 모일 수 있음에도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싸우는 병력을 고작 삼백 명으로 큰 승리를 가져 오게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습니까?
구원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때문에 괴롬을 당하기를 7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미디안은 아말렉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모든 육축을 빼앗아 가고 농사를 지으면 곡식도 모조리 빼앗아가고 생명을 위협하기도 해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살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을 가서 굴을 파고 숨어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기드온 역시 미디안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7년간이나 괴로워하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이제야 구원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구원을 약속하신 자이시기 때문에 그를 찾는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미디안에게서 고통스러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원에 대해서는 원하기만 하면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하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때문입니다.
전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얻기 위한 그 무엇이 그들에게 전혀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위한 그들이 그 조건이 없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께 내가 이 가운데서 구원을 원한다고 소리를 치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소경들이 소리를 쳤습니다.
우리가 보기를 원한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래 나도 너희가 보기를 원하노라 너 소원대로 될지어다고 하시니 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주님을 향하여 주여 내 삶에서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소리를 쳐 보십시오
그래 나도 네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 인하여 상당히 두려워하고 염려해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 모두도 그러합니다.
아무도 세상에서 자유 하는 자가 없습니다. 꽁꽁 묶여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도 세상의 삶에서 구원의 비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뜻은 당신은 구원이라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자신을 원하는 자에게 구원이 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에게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나 구원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구원이 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세상 숫자에 겁먹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믿음을 가진 일군들이 필요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구원이십니다 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대적하기 위하여 군사를 전국에서 모집하였지만 싸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32,0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 연합군의 5분의 일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들은 전쟁을 겁먹고 있는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 자들입니다.
싸우나 마나 이 숫자로는 승리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였으나 전쟁을 무서워하는 자 22,000명이 떠나니 10,000명이 남았는데 갈수록 태산입니다.
이제는 십분의 일도 안 됩니다.
전쟁을 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의지가 없으니 싸우나 마나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들도 다 돌려보내고 보니 300명이 남았습니다.
이제는 오십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숫자의 놀음에 개의치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알릴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구원의 축복을 받고 가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아멘이 되십니까?
교회와 성도가 큰 어려움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 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구원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나겠느냐?
그 어머니 그 형제자매 우리와 똑같은 자들 아닌가 하고 인간적으로 논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도 일으키시고 오병이어의 역사를 가지신 분이 믿음이 없는 나사렛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크게 받아야 하는 나사렛 사람이 어찌 예수님의 구원하고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충만하시지만 인간적으로 살아 가면은 인간적인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큰 구원이 있는데 왜 나와는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 있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바로 나을 위한 구원이심을 믿고 나의 구원을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여 이 자리에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은 나를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나게 합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처럼 언제까지나 앉아서 남이 어떻게 해 줄때만 기다려 보았자 동정의 동전 몇 닢만 떨어졌지 아무런 구원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 자리에서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금과 은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랬더니 힘없이 달려있던 다리에 힘이 솟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믿음의 힘으로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내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니 언제 일어 날 수가 있습니까?
내 힘이 언제 솟아나겠습니까? 지금까지 살아 왔지만 힘이 안 나는데... ...
예수님을 의지하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일어난다는 것은 발전과 진보를 뜻합니다.
일어난다는 것은 곧 부흥운동입니다.(Revival movement)
부흥운동이란 침체된 것을 다시 북돋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자신이 믿음이 없는 삶의 행동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라 죄악에 잠자는 영혼아 달리다굼 일어나 걸어라 어둠은 물러가고 새 날이 다가오네
나로 인하여 이 화평교회가 부흥되도록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나와 가정에 우리 교회에 약속되었으니 믿고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또 어떤 가운데서 일어나야 합니까?
영적 침체 상태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침체상태란 열심이 식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나태와 게으름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내려 주실 때에 왜 새벽에 주셨습니까?
그 만큼 신앙생활은 부지런해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게으른 자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이많이 있습니다.
특히 잠언에는 게으른 자는 주릴 것이요, 게으른 자는 남에게 부림을 당할 것이요.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갈지 않으므로 거둘 때에 구걸하게 될 것이요.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다 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게으름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적당한 수면을 취하여야 건강에도 좋지만 영혼은 절대로 잠들면 안 됩니다.
영혼이 잠들면영혼이 죽어요.
그래서 사탄은 우리들의 영혼이 잠들도록 자꾸만 자장가를 부르고 수면제를 뿌리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뿌립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믿음의 일군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 오게 합니다.
문제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뢰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똑똑하다고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미련하기 때문에 쓰시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자는 싫어하시고 가난한 사람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식한 자를 싫어하시고 무식하고 못 난자들만 들어서 쓰시는 괴팍한 하나님으로 보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남기신 삼백 명은 인간적인 조건을 보고 남긴 자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믿음을 져 버리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쓰시게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를 원하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께 쓰임을 받는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할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진정한 제자된 사람, 십자가 군사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무의미한 다수보다는 헌신된 소수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헌신된 소수를 키우기 위해서 다수가 중요하지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교회에 수가 많은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숫자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습니다.
감리교 창설자 존 웨슬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300명을 달라 내가 세상을 변화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작은 행동까지 달라집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은밀한 가운데서 당신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순간에도 우리를 관찰하십니다.
우리가 성실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하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답게살고 있는지 세밀히 보고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의 삶의 지표는 라틴어로 CoramDeo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칼빈은 이 말을 일생 좌우명으로삼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할 때 칼빈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멋지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미 없는 삼만 이천 명보다 준비된 삼백 명을 원하시는 뜻을 헤아려 보십시오.
이제 우리 교회는 숫자만을 논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훈련된 믿음의 일꾼이 얼마나 되느냐? 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원하는 믿음의 일군으로 하루하루를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스카우트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될 것이지 나는 아니냐 하지 마시고 바로 내가 교회를 일으키고 가정을 복되게 하는 그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