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명절의 진정한 고민은 내 형제 친지들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9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로마서 9 : 1 - 5 이번 명절의 진정한 고민은 내 형제 친지들의 구원이어야 합니다
북 유럽에 있는 북해와 발트 해 사이에 유틀란트반도에 약 300개의 섬을 포함하여 한 나라가 이루어져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덴마크라는 나라입니다. 국토는 남한의 반도 안 되는 땅이요 인구는 서울시 인구의 약 반쯤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 때는 비록 적은 영토요 적은 인구지만 바다에 위치하고 있어 1600년대까지 바이킹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일대를 휩쓸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에 의해서 패전하고 덴마크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딕’이라는 지역과 ‘홀스타인’이라는 지역을(소의 이름으로 유명함)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전쟁의 노획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비옥한 땅은 다 빼앗기고 남은 땅은 모래땅인지라 아무 쓸모가 없는 땅이니 사람들이 낙담하여 술 먹고 도박하고 그냥 허송세월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하자원도 없고 자연기후도 좋지 않고 토지도 사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궁동성으로 하는 말, “이제 우리는 끝났다.”고 합니다.
이 때 전쟁에서 돌아온 패잔병중 공병상사 “마이즈 달가스”라고 하는 청년이 한손에 성경책을 들고 한손에 괭이를 들고 군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친애하는 덴마크 국민 여러분, 칼로 잃어버린 우리의 조국을 괭이로 찾읍시다. 해적질로 잃어버린 도덕을 하나님 말씀으로 찾읍시다.” 라고 외쳤습니다.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를 않지만 실망하지 않고 홀로 그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나무 저 나무 심어 안 되면 또 다른 나무를 심어보고 열심히 조림하다 보니 그만 천박한 땅이 옥토로 변해 그 땅이 초원이 되어 지고, 초원 따라 낙농을 해서 소를 먹여 세계적으로 우유와 빠다와 치즈를 만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그 모래 언덕을, 도덕적으로 끝난 나라를, 이제는 다 끝났다고 하는 그 나라를 지상의 지상낙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달가스라는 청년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신앙이 애국애족(愛國愛族)심을 가져왔고, 복음을 증거하고 몸으로 솔선수범을 해 마침내 그 나라를 신앙위에 세운 건실한 민족을 만들어 오늘날 잘 살기뿐만 아니라 진실한 나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덴마크를 구한 달가스 청년과 같이 민족과 나라를 염려하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민족과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는 그것이 큰 근심이요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러분의 고통, 나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겨우 일상의 사사로운 생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고민을 하느냐 ? 고민을 하지 않느냐가 결코 아닙니다.
고민을 하되 무엇을 고민하느냐 ?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주 문제로만 염려하는 사람은 내가 진정 고민해야 할 고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의문제, 생명의 문제, 나라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의 고민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민입니다.
이러한 고민에는 비전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의식주등에만 고민을 하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전도자가 되라는 것 아닙니까?
내 사업도 복음을 위하여 하라 내 자녀도 내 가정도 내 인생도 복음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적이 아닌 것에는 주님도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성도들이 복음을 위하는 것이 아니면 목사도 복을 빌 근거가 없습니다.
무엇이 복음적이면 주님은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고민해야 할 때 고민할 줄도 모르고, 의식 없이 사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근심이 있다는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특히 영생과 구원에 관한 고민은 그리스도인만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이 근심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내 양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 줍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나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의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많은 믿음의 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에 그는 슬퍼하며, 번빈하고 있습니다.
저는 간혹 한 번씩 생각해 봅니다.
이 민족에게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믿음이 있는 자가 믿음의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민족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입니다.
믿음을 가진 내가 참으로 파수꾼의 위치에 서서 제 역할을 다하여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워집니다.
믿음이 이 나라를 붙들고 있고 중심을 바로 잡고 있습니다.
누가 이 나라를 세우고 번성케 하고 염려하고 있습니까?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자들 그리고 밤을 세워가며 부르짖는 자들이 있기에 이 민족이 그래도 이 만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서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을 볼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게 믿음이 없었다면 내 가정에 믿음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내 가정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믿음으로 복을 받고 승리하고 온전케 되는 은혜를 받은 자가 어디 한 두 사람이고 한 두 가정입니까?
우리 모두 그러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런 은혜를 받은 자라면 어찌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 골육 친척들을 복음을 모르도록 그냥 가만히 두겠습니까?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하고 살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저주를 받는 일이 있을찌라도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복음을 전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입니다.
왜요? 가만히 놔두면 영 육간에 다 망 할 것인데 말입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망합니다.
바로 여기에,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고 동족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서 고민해 보았습니까?
애국 중에 애국, 애족 중에 애족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 형제들 중에는 물질적으로 고생하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사촌들 특히 외사촌들은 만나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와주지 않는 내 자신이 한심합니다. 살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치레가 아프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위로가 되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 할 적에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받지 못한 사랑, 그리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어려움 등을 예수님께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지고 살겠구나 할 때에 위로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또한 장차 인간의 이해갈등이 다 해결되고 아니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 곳에서 해피하게 만날 것을 생각 할 적에 큰 위로가 됩니다.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 가운데 이런 만남의 기쁨의 소망이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에서 고생하고 어려움을 당하였다 할찌라도 믿음을 가진 자라면 장차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가 없는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람에게서도 세상에서도 위로를 받지도 못하면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어떠한 값을 치루더라도 골육 친척의 구원을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사나? 하고 떡이나 나눠먹고 인간적인 인사치레만으로 내가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내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저주를 받을 필요가 있다면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사실 바울이 이런 심정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피해를 끼치고 괴롭힌 사람은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 옥에 가둔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 태장을 친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음모를 꾸민 사람들도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미워 할 수밖에 없는 원수였지만, 바울은 그들의 죄를 미워하기는 했지만,그들의 영혼을 미워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심정을 가진 자가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가 없지만 예수 이름으로는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가고 가진 자입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아나테마 라는 헬라 말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여리고성에 있는 사람, 짐승, 물건을 하나도 손대지 말고, 고스란히 불태워서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럼으로써 그 성을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도 손대지 말고 깨끗이 소멸시켜라가 바로 아나테마, 즉 저주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기를 여리고에서 불에 태워지고, 칼에 죽어가는 사람이나동물처럼 완전히 저주를 받아도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아 나를 구원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완전히 제물이 되지 않으면 참으로 구원이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대충 대충 하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완전히 제물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이번 축복 심방에서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제물이 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한나와 같이 기도의 제물이 되라고 하시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는 둘째 아들같이 새롭게 다짐을 하라, 교회와 집만 알고 정신없이 달려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힘쓰라, 전도자가 되라, 이제는 주을 위한 일군이 되라,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라 등등이 아닙니까?
이러한 복음적인 일이 진정한 고민거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이 받는 구원만을 좋아라고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신이 받는 구원을 안심하고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용되지 않는 구원은 소멸되고 빼앗겨 버립니다.
절대로 믿음은 나 혼자만이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널리 널리 전파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기뻐하며 좋아라고 하는 것은 악한 종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기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큰 사람일수록, 구원 받지 못한 형제 때문에 오는 큰 고통과 괴로움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입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내 입만 즐거워합니까?
내 사랑하는 자가 생각이 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좋은 곳에 가 있으면 내 가족들도 함께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저는 가끔 집사님들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됩니다. 누구랑 같이 갔는데 어디에 잘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오늘 한번 같이 가십시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까?
나는 구원 받고, 기쁘고 감사한데, 다른 형제에 대해서는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심정이 아니라는 것을알아야 합니다.
네 가정에, 네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놓고 네 마음에 어찌 고통이 없느냐? 고 하나님 물으십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고통을 함께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구원의 확신,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구원의 기쁨, 이것도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믿지 않는 형제 때문에 당하는 이 고통도 누가주시는것입니까?
이것 역시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구원의 기쁨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요, 어떤 면에서는 나의 기쁨과 확신도 성령이 주신것이 아닌 엉터린지도 모릅니다.
16세기 스코트랜드의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는(John Knox)은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저에게주시옵소서그렇지않으면죽음을주옵소서OhGod, Giveme Scottland or Dead.존 낙스는 자기동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내놓고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마틴 루터는 죽기까지 복음주의, 죽기까지독일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일본의 내촌감삼도내게는 두 개의 J자가 있다.하나는 일본Japan이요다른 하나는 예수 Jesus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게도 두개의 C가 있어야 하는 데 한국 Corea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Christ입니다.
이번 명절 인간의 인지상정(人之常情)만을 나누기 위하여 무엇을 사 들고 갈까만 어떻게 인사 할 것인가만 고민하지 마시고 피 묻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고민하는 절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북 유럽에 있는 북해와 발트 해 사이에 유틀란트반도에 약 300개의 섬을 포함하여 한 나라가 이루어져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덴마크라는 나라입니다. 국토는 남한의 반도 안 되는 땅이요 인구는 서울시 인구의 약 반쯤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 때는 비록 적은 영토요 적은 인구지만 바다에 위치하고 있어 1600년대까지 바이킹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일대를 휩쓸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에 의해서 패전하고 덴마크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딕’이라는 지역과 ‘홀스타인’이라는 지역을(소의 이름으로 유명함)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전쟁의 노획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비옥한 땅은 다 빼앗기고 남은 땅은 모래땅인지라 아무 쓸모가 없는 땅이니 사람들이 낙담하여 술 먹고 도박하고 그냥 허송세월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하자원도 없고 자연기후도 좋지 않고 토지도 사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궁동성으로 하는 말, “이제 우리는 끝났다.”고 합니다.
이 때 전쟁에서 돌아온 패잔병중 공병상사 “마이즈 달가스”라고 하는 청년이 한손에 성경책을 들고 한손에 괭이를 들고 군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친애하는 덴마크 국민 여러분, 칼로 잃어버린 우리의 조국을 괭이로 찾읍시다. 해적질로 잃어버린 도덕을 하나님 말씀으로 찾읍시다.” 라고 외쳤습니다.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를 않지만 실망하지 않고 홀로 그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나무 저 나무 심어 안 되면 또 다른 나무를 심어보고 열심히 조림하다 보니 그만 천박한 땅이 옥토로 변해 그 땅이 초원이 되어 지고, 초원 따라 낙농을 해서 소를 먹여 세계적으로 우유와 빠다와 치즈를 만들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그 모래 언덕을, 도덕적으로 끝난 나라를, 이제는 다 끝났다고 하는 그 나라를 지상의 지상낙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달가스라는 청년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신앙이 애국애족(愛國愛族)심을 가져왔고, 복음을 증거하고 몸으로 솔선수범을 해 마침내 그 나라를 신앙위에 세운 건실한 민족을 만들어 오늘날 잘 살기뿐만 아니라 진실한 나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덴마크를 구한 달가스 청년과 같이 민족과 나라를 염려하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민족과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는 그것이 큰 근심이요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러분의 고통, 나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겨우 일상의 사사로운 생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고민을 하느냐 ? 고민을 하지 않느냐가 결코 아닙니다.
고민을 하되 무엇을 고민하느냐 ?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주 문제로만 염려하는 사람은 내가 진정 고민해야 할 고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의문제, 생명의 문제, 나라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의 고민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민입니다.
이러한 고민에는 비전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의식주등에만 고민을 하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전도자가 되라는 것 아닙니까?
내 사업도 복음을 위하여 하라 내 자녀도 내 가정도 내 인생도 복음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적이 아닌 것에는 주님도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실 성도들이 복음을 위하는 것이 아니면 목사도 복을 빌 근거가 없습니다.
무엇이 복음적이면 주님은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고민해야 할 때 고민할 줄도 모르고, 의식 없이 사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근심이 있다는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입니다.
특히 영생과 구원에 관한 고민은 그리스도인만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이 근심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움직이는 내 양심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해 줍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나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의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많은 믿음의 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에 그는 슬퍼하며, 번빈하고 있습니다.
저는 간혹 한 번씩 생각해 봅니다.
이 민족에게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믿음을 가진 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믿음이 있는 자가 믿음의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민족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입니다.
믿음을 가진 내가 참으로 파수꾼의 위치에 서서 제 역할을 다하여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워집니다.
믿음이 이 나라를 붙들고 있고 중심을 바로 잡고 있습니다.
누가 이 나라를 세우고 번성케 하고 염려하고 있습니까?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자들 그리고 밤을 세워가며 부르짖는 자들이 있기에 이 민족이 그래도 이 만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서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을 볼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게 믿음이 없었다면 내 가정에 믿음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내 가정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믿음으로 복을 받고 승리하고 온전케 되는 은혜를 받은 자가 어디 한 두 사람이고 한 두 가정입니까?
우리 모두 그러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런 은혜를 받은 자라면 어찌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 골육 친척들을 복음을 모르도록 그냥 가만히 두겠습니까?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하고 살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저주를 받는 일이 있을찌라도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복음을 전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입니다.
왜요? 가만히 놔두면 영 육간에 다 망 할 것인데 말입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망합니다.
바로 여기에,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고 동족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는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해서 고민해 보았습니까?
애국 중에 애국, 애족 중에 애족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 형제들 중에는 물질적으로 고생하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사촌들 특히 외사촌들은 만나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와주지 않는 내 자신이 한심합니다. 살펴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치레가 아프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위로가 되는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 할 적에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받지 못한 사랑, 그리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어려움 등을 예수님께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지고 살겠구나 할 때에 위로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또한 장차 인간의 이해갈등이 다 해결되고 아니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 곳에서 해피하게 만날 것을 생각 할 적에 큰 위로가 됩니다.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 가운데 이런 만남의 기쁨의 소망이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에서 고생하고 어려움을 당하였다 할찌라도 믿음을 가진 자라면 장차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염려가 없는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람에게서도 세상에서도 위로를 받지도 못하면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어떠한 값을 치루더라도 골육 친척의 구원을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사나? 하고 떡이나 나눠먹고 인간적인 인사치레만으로 내가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내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저주를 받을 필요가 있다면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사실 바울이 이런 심정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피해를 끼치고 괴롭힌 사람은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 옥에 가둔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 태장을 친 사람도 자기 동족이요,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음모를 꾸민 사람들도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미워 할 수밖에 없는 원수였지만, 바울은 그들의 죄를 미워하기는 했지만,그들의 영혼을 미워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심정을 가진 자가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가 없지만 예수 이름으로는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가고 가진 자입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아나테마 라는 헬라 말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여리고성에 있는 사람, 짐승, 물건을 하나도 손대지 말고, 고스란히 불태워서 완전히 없애 버려라!
그럼으로써 그 성을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도 손대지 말고 깨끗이 소멸시켜라가 바로 아나테마, 즉 저주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기를 여리고에서 불에 태워지고, 칼에 죽어가는 사람이나동물처럼 완전히 저주를 받아도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아 나를 구원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완전히 제물이 되지 않으면 참으로 구원이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대충 대충 하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완전히 제물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이번 축복 심방에서 느끼는 것이 없습니까? 제물이 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한나와 같이 기도의 제물이 되라고 하시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는 둘째 아들같이 새롭게 다짐을 하라, 교회와 집만 알고 정신없이 달려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힘쓰라, 전도자가 되라, 이제는 주을 위한 일군이 되라,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라 등등이 아닙니까?
이러한 복음적인 일이 진정한 고민거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이 받는 구원만을 좋아라고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신이 받는 구원을 안심하고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용되지 않는 구원은 소멸되고 빼앗겨 버립니다.
절대로 믿음은 나 혼자만이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널리 널리 전파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기뻐하며 좋아라고 하는 것은 악한 종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기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큰 사람일수록, 구원 받지 못한 형제 때문에 오는 큰 고통과 괴로움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입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내 입만 즐거워합니까?
내 사랑하는 자가 생각이 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좋은 곳에 가 있으면 내 가족들도 함께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저는 가끔 집사님들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됩니다. 누구랑 같이 갔는데 어디에 잘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오늘 한번 같이 가십시다.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까?
나는 구원 받고, 기쁘고 감사한데, 다른 형제에 대해서는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심정이 아니라는 것을알아야 합니다.
네 가정에, 네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놓고 네 마음에 어찌 고통이 없느냐? 고 하나님 물으십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이 고통을 함께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구원의 확신,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구원의 기쁨, 이것도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믿지 않는 형제 때문에 당하는 이 고통도 누가주시는것입니까?
이것 역시 성령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구원의 기쁨은 있는데 고통이 없습니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요, 어떤 면에서는 나의 기쁨과 확신도 성령이 주신것이 아닌 엉터린지도 모릅니다.
16세기 스코트랜드의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는(John Knox)은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저에게주시옵소서그렇지않으면죽음을주옵소서OhGod, Giveme Scottland or Dead.존 낙스는 자기동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내놓고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마틴 루터는 죽기까지 복음주의, 죽기까지독일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일본의 내촌감삼도내게는 두 개의 J자가 있다.하나는 일본Japan이요다른 하나는 예수 Jesus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게도 두개의 C가 있어야 하는 데 한국 Corea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Christ입니다.
이번 명절 인간의 인지상정(人之常情)만을 나누기 위하여 무엇을 사 들고 갈까만 어떻게 인사 할 것인가만 고민하지 마시고 피 묻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고민하는 절기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