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 하셨습니다. 아니오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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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4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로 마 서 12 : 1- 3수고 하셨습니다. 아니오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이타닉 동영상 관람
지금보신 동영상은 3-4분에 지나지 않는 짧은 내용이지만 생사를 앞둔 자들이 그들에게 남은 인생의 최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최고를 자랑하는 유람선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디 쳐 맥없이 두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차디찬 바닷물이 배 속으로 몰려오고 배는 점점 가라 않기 시작하며 죽음은 아주 가까이 찾아 왔습니다.
이때에 어떤 이는 제 혼자 잘 살아 보겠다고 남의 구명조끼를 빼앗고 다른 사람이야 죽던지 말든지 제 혼자 살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현대인들의 삶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삶의 형태를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손을 꼭 잡고 죽음을 맞이하는 노부부나 죽음을 앞두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 해 주는 어린 자녀에게 마지막 이별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부인에게서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수동적으로 받아 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그냥 되는 대로 살아 보자 하는 무능력 한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도 흔히 있습니다.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더 이상 무엇을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모습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으며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나는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박함중에서도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자가 있습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너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나를 들어 너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이 구명정을 탈 수 있도록 진두지휘를 하는 승무원들과 그리고 구명선 밧줄을 끊기 위해 목숨을 걸고간판위로 올라가 밧줄을 끊는 사람 죽음을 앞둔 자들이 살려고 이리 저리 몰려 뛰어 다니는 혼란 가운데 그들의 평안을 주기 위하여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이라는 찬송을 연주하는 바이올린 리스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타이타닉이라는 유람선을 타고 가는 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를 생각 하게 됩니다.
아니 나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도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2006년 한해는 우리 교회는 큰 시련과 고비가 있었던 한 해 이었습니다.
부흥 일변도로 달려 갈 것만 같은 교회가 부셔져 내리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대하는 자들의 모습은 여러 모양으로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이와 교회를 위하는 많은 일군들을 통하여 이 교회가 새롭게 수습되어 가는 볼 때에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일군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를 위한 일군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인생(人生)은 일생(一生)입니다.한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은 삶을 최대한으로 선용하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뿐인 인생을 한번 멋있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은 대단히 착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비관하고 불평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비관의 대상이 아니고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로 감당 할 축복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끝내는 사람들을 동정을 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들이 생활에 어려움이 있어서 뛰어 내린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결코 다 그렇지만 않습니다.
현대 정모 회장은 자신의 사옥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하였는데 그의 유서에서 이런 글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삼성 이모 회장의 딸은 한국의 최고의 대학 학부를 나오고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장래가 촉망하고 자신 앞으로 있는 재산만 2,000억이나 되지만 아파트에서 목메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위한다고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항상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단히 위대하고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많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자신에게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사는 것인가? 와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갤럽 조사 기관에서 사회 유명한 인사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 달라고 하였더니 거의 대다수가 잘 모르겠다고 응답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추신을 달기를 답을 알게 되면 꼭 알려 제게 주십시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살아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 노후 대책에 관심은 있지만 노후 그 후위 죽음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일군을 임명하는데 이 가운데는 참으로 충성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기도로 너무 너무 감사하지요
하지만 그 중에 일군은 믿음의 년 수가 많아서 임명이 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말은 이 자리에 모두가 다 일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지체가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라도 없거나 잘 못되면 그 몸은 불편하게 되고 불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일군의 명단에 상관이 없이 교회를 이루는 훌륭한 일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꼭 필요하고 저 사람은 없어도 된다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해 있는 이상은 휼륭한 일군들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는 있습니다.
먼저 우리 인생은 누군가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껏 생각하는 것이 나를 위하여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셔야 합니다.
내게 문제가 생기고 기분이 나쁘고 우울해 지고 불만하고 불평해 지는 것은 이 모든 원인이 나를 위하여 라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봅시다.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위하여 있는 자로 여겨 질 때에 아내가 자기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주 못된 아내로 여기고 이혼도 불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위한 자로만 여겨 질 때에 무능한 남편은 꼴도 보기 싫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잘 못된 것입니까?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있다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알고 아내는 남편을 위한 자기 존재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은 남편이 혹은 아내가 가장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하여 해 줄 때에 황송하기 그지없고 고맙기가 그지없습니다.
내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일 놈 살릴 놈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에는 참다운 일군의 자세를 일러 주고 있는데 나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알레르기성 반응을 가져 오더라고요
나를 위하여 살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을 생각할 겨흘이 없고 더욱이 주를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난색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사나 죽어나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이해를 한다면 자기를 위하여 살아 간 삶은 어떻게 살았든지 다 부질 없고 헛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왜 열심히 돈을 벌고 출세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나를 위한다고 여기고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억만금을 모아도 무슨 일을 이루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나중에 내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은 자기를 위하여 가장 잘 살아 가는 사람임을 아셔야 합니다.
참된 일군은 자기를 부르신 자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입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용되어 질 것인가?
가장 잘 사는 방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내가 가장 잘 사는 길입니다.
또한 잘 되는 길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독교만큼 사회에 자기 헌신을 하는 단체가 없습니다.
지난 15년간 장기기증 운동 본부에서 장기 기증 등록자가 약 20만 명인데 그중에 65%가 기독인입니다.
자비를 외치는 불교인 10%, 윤리 도덕을 사회봉사를 외치는 케토릭은 8.7%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나는 아무 것도 안 믿는다는 자는 인구의 반이나 되지만 13%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에 신장을 기증한 자의 70% 기독인입니다.
북한을 위한 구호 등에도 기독교가 70-80% 이상입니다.
고아원 양로원 사회 복지 70% 이상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음지에서 보이지 않게 봉사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는 자가 아니라 주를 위하는 자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앞두고 주의 교회에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습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대접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함이요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용되어 져야 합니까?
믿음의 분량대로 사용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께 은혜 많이 받는 자로 여긴 자는 자신을 다 주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자는 하나님께 인색 할 것입니다.
인색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다 받으실 것입니다.
인색하고 그렇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억지로 받지 않습니다.
믿음의 분량 되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있는 자는 더 있게 하실 것이요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다 빼앗아 있는 자에게 줄 것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에서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 자에게 참 수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였을 때에 뭐라고 대답 하시는 줄 아십니까?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많은 암소 중에 법궤를 맨 암소가 귀하고 많은 유대의 나귀 중에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복되고요 많은 예루살렘의 여인 중에 예수님을 잉태한 여자가 복된 자이고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이 복된 것입니다.
많은 자들 중에 나를 불러 사용하시니 내가 복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 못하는 돌들을 들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용하시니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주의 교회는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자들로 통하여 주의 교회는 흥왕하고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가장 가치가 있는 삶이 되십시오
인간적인 감정에서 자유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정에 속하시니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할렐루야!
새롭게 한다는 것은 변화가 전제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옛것과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기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두에 나가 배를 저어 나아가려고 하는데 노를 아무리 저어도 배가 전혀 나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묶어져있는 배의 끈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변화를 받아 새로워 져야 합니다.
가장 쉬운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마음의 상태가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남의 말을 하는 험담을 끊고 긍정적인 자가 되어 남을 세우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험담은 자기에게로 다 돌아옵니다.
축복하면 역시 축복은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원망 불평이 감사로 바꿔져야 합니다.
원망 불평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고 다시 세상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주의 일에 소극적이고 관망하는 자세에서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소극적인 자에게는 사단이 틈을 타고 적극적인 자에게는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감당 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오늘 나를 불러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타이타닉 동영상 관람
지금보신 동영상은 3-4분에 지나지 않는 짧은 내용이지만 생사를 앞둔 자들이 그들에게 남은 인생의 최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최고를 자랑하는 유람선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디 쳐 맥없이 두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차디찬 바닷물이 배 속으로 몰려오고 배는 점점 가라 않기 시작하며 죽음은 아주 가까이 찾아 왔습니다.
이때에 어떤 이는 제 혼자 잘 살아 보겠다고 남의 구명조끼를 빼앗고 다른 사람이야 죽던지 말든지 제 혼자 살아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현대인들의 삶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삶의 형태를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손을 꼭 잡고 죽음을 맞이하는 노부부나 죽음을 앞두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 해 주는 어린 자녀에게 마지막 이별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부인에게서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수동적으로 받아 드릴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그냥 되는 대로 살아 보자 하는 무능력 한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도 흔히 있습니다.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더 이상 무엇을 해 줄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모습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으며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나는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박함중에서도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자가 있습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너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나를 들어 너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이 구명정을 탈 수 있도록 진두지휘를 하는 승무원들과 그리고 구명선 밧줄을 끊기 위해 목숨을 걸고간판위로 올라가 밧줄을 끊는 사람 죽음을 앞둔 자들이 살려고 이리 저리 몰려 뛰어 다니는 혼란 가운데 그들의 평안을 주기 위하여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이라는 찬송을 연주하는 바이올린 리스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타이타닉이라는 유람선을 타고 가는 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를 생각 하게 됩니다.
아니 나는 어떻게 살아 왔는가? 도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 2006년 한해는 우리 교회는 큰 시련과 고비가 있었던 한 해 이었습니다.
부흥 일변도로 달려 갈 것만 같은 교회가 부셔져 내리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대하는 자들의 모습은 여러 모양으로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이와 교회를 위하는 많은 일군들을 통하여 이 교회가 새롭게 수습되어 가는 볼 때에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일군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를 위한 일군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인생(人生)은 일생(一生)입니다.한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은 삶을 최대한으로 선용하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뿐인 인생을 한번 멋있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은 대단히 착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비관하고 불평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비관의 대상이 아니고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은혜로 감당 할 축복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끝내는 사람들을 동정을 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들이 생활에 어려움이 있어서 뛰어 내린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결코 다 그렇지만 않습니다.
현대 정모 회장은 자신의 사옥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하였는데 그의 유서에서 이런 글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삼성 이모 회장의 딸은 한국의 최고의 대학 학부를 나오고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장래가 촉망하고 자신 앞으로 있는 재산만 2,000억이나 되지만 아파트에서 목메어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위한다고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의 대 문호 톨스토이는 항상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단히 위대하고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많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자신에게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사는 것인가? 와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갤럽 조사 기관에서 사회 유명한 인사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해 달라고 하였더니 거의 대다수가 잘 모르겠다고 응답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추신을 달기를 답을 알게 되면 꼭 알려 제게 주십시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살아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 노후 대책에 관심은 있지만 노후 그 후위 죽음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일군을 임명하는데 이 가운데는 참으로 충성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기도로 너무 너무 감사하지요
하지만 그 중에 일군은 믿음의 년 수가 많아서 임명이 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말은 이 자리에 모두가 다 일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지체가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라도 없거나 잘 못되면 그 몸은 불편하게 되고 불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일군의 명단에 상관이 없이 교회를 이루는 훌륭한 일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꼭 필요하고 저 사람은 없어도 된다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해 있는 이상은 휼륭한 일군들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는 있습니다.
먼저 우리 인생은 누군가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껏 생각하는 것이 나를 위하여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셔야 합니다.
내게 문제가 생기고 기분이 나쁘고 우울해 지고 불만하고 불평해 지는 것은 이 모든 원인이 나를 위하여 라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봅시다.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위하여 있는 자로 여겨 질 때에 아내가 자기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주 못된 아내로 여기고 이혼도 불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위한 자로만 여겨 질 때에 무능한 남편은 꼴도 보기 싫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잘 못된 것입니까?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있다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알고 아내는 남편을 위한 자기 존재를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은 남편이 혹은 아내가 가장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하여 해 줄 때에 황송하기 그지없고 고맙기가 그지없습니다.
내게 해 주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일 놈 살릴 놈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에는 참다운 일군의 자세를 일러 주고 있는데 나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알레르기성 반응을 가져 오더라고요
나를 위하여 살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을 생각할 겨흘이 없고 더욱이 주를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난색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사나 죽어나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이해를 한다면 자기를 위하여 살아 간 삶은 어떻게 살았든지 다 부질 없고 헛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왜 열심히 돈을 벌고 출세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나를 위한다고 여기고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억만금을 모아도 무슨 일을 이루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나중에 내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주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은 자기를 위하여 가장 잘 살아 가는 사람임을 아셔야 합니다.
참된 일군은 자기를 부르신 자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입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용되어 질 것인가?
가장 잘 사는 방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내가 가장 잘 사는 길입니다.
또한 잘 되는 길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독교만큼 사회에 자기 헌신을 하는 단체가 없습니다.
지난 15년간 장기기증 운동 본부에서 장기 기증 등록자가 약 20만 명인데 그중에 65%가 기독인입니다.
자비를 외치는 불교인 10%, 윤리 도덕을 사회봉사를 외치는 케토릭은 8.7%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나는 아무 것도 안 믿는다는 자는 인구의 반이나 되지만 13%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에 신장을 기증한 자의 70% 기독인입니다.
북한을 위한 구호 등에도 기독교가 70-80% 이상입니다.
고아원 양로원 사회 복지 70% 이상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음지에서 보이지 않게 봉사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는 자가 아니라 주를 위하는 자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앞두고 주의 교회에 일군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습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대접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함이요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용되어 져야 합니까?
믿음의 분량대로 사용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께 은혜 많이 받는 자로 여긴 자는 자신을 다 주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자는 하나님께 인색 할 것입니다.
인색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다 받으실 것입니다.
인색하고 그렇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억지로 받지 않습니다.
믿음의 분량 되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있는 자는 더 있게 하실 것이요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다 빼앗아 있는 자에게 줄 것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에서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 자에게 참 수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였을 때에 뭐라고 대답 하시는 줄 아십니까?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많은 암소 중에 법궤를 맨 암소가 귀하고 많은 유대의 나귀 중에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복되고요 많은 예루살렘의 여인 중에 예수님을 잉태한 여자가 복된 자이고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이 복된 것입니다.
많은 자들 중에 나를 불러 사용하시니 내가 복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 못하는 돌들을 들어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용하시니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주의 교회는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자들로 통하여 주의 교회는 흥왕하고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가장 가치가 있는 삶이 되십시오
인간적인 감정에서 자유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정에 속하시니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할렐루야!
새롭게 한다는 것은 변화가 전제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옛것과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기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두에 나가 배를 저어 나아가려고 하는데 노를 아무리 저어도 배가 전혀 나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묶어져있는 배의 끈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변화를 받아 새로워 져야 합니다.
가장 쉬운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마음의 상태가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남의 말을 하는 험담을 끊고 긍정적인 자가 되어 남을 세우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험담은 자기에게로 다 돌아옵니다.
축복하면 역시 축복은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원망 불평이 감사로 바꿔져야 합니다.
원망 불평은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고 다시 세상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주의 일에 소극적이고 관망하는 자세에서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소극적인 자에게는 사단이 틈을 타고 적극적인 자에게는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감당 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오늘 나를 불러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