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구하십니까? 믿음으로 구하면 구원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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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85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10 : 46 - 52무엇을 구하십니까? 믿음으로 구하면 구원함이 있습니다.
인천 계양구 평화교회 윤인중 목사님은 지난 달 20일부터 계양산 소나무에 매달린 높이 12미터의 천막에 올라가서 한 달 동안 나무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도 제목을 내어 놓고 지금까지 애를 쓰고 계십니다. 성탄절 그리고 연말연시를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나무 위에서 보내시고 계셨습니다. 골프장 건설 철회와 도시속 시민공원으로의 개발을 촉구하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광역시가운데 가장 녹지비율이 낮은 인천시에 있어서 계양산은 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쉼터라고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목사님이 오죽이나 답답하셨으면 계양산 소나무 위에 다 올라가서 기도를 하시겠나 하는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라도 기도를 해야지 응답이 빨리 오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저렇게도 힘들게 기도하는데 응답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답답함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응답은 받고 있습니까?
비단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라도 원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누가 무슨 기도를 드리든지 간에 반드시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누가 성경에서는 대체로 11개의 유형으로 응답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 무조건 예스형(yes)의 응답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합당한 기도에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각 응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도 많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주의 뜻에 맞게 구하면 다 시행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노(No)형
나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나타내시는 경우입니다.
그 예로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는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로 인함이거나, 두 마음, 의심, 불순종 등에는 거절로 응답을 하십니다.
이런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하나님이 노(NO)하시면 빨리 바꾸시기 바랍니다.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으로 홍해 앞에서의 기적,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암몬을 물리쳐 주시는 인간 한계를 넘은 기적적인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바라고 기다림으로 기적 같은 일이 있습니다.
4. 업그레이드형
나의 기도와 믿음보다 그 이상의 것으로 응답하시는데 어떠한 것을 구했는데 최상의 시간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의 평소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할 때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더 넘치도록 주시는 기도응답으로 솔로몬이 지혜만 구했는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함께 주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고 없던 자녀도 주시고 전쟁에서 승리까지 하도록 하셨습니다.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대로의 길을 걸어갈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에 비전을 품은 자는 굳건한 의지로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가듯이 믿음으로 인생의 앞길을 헤치고 가도록 지속적인 기도를 드림으로서 얻어지는 응답입니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 만 못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6. 진주조개형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 계시 혹은 기도 응답을 통해 그 일에 대해서 약속을 받게 되지만 성취하기 위해서는 아픔과 시련, 연단, 회개, 시험 등을 통과하고 받게 되는 응답으로서 그러한 가운데 자아가 깨어지고 교만이 제거되고 만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변할 때 받게 되는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에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는데 다윗과 요셉 같은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같은 시험과 연단이 있어도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처받은 조개에서 진주가 생산됩니다.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變換)형 기도응답입니다.
A를 구했는데 A가 아닌 B나 C, 혹은 D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하심으로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 같이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다른 길로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로 가는 것도 지혜입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육 간에 모두 전인적인 축복을 주시는 경우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으로서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는데 이것은 피와 땀과 눈물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곧 씨를 뿌리는 노력이 함께 하는 기도에는 복에 복을 더 하는 야베스 같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게 됩니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계획을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과 진행되는 과정 그리고 사후까지 하는 기도를 통하여 얻는 응답입니다.
성취 할 때까지 지속적인 기도로 이루어지는 기도 응답으로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하기까지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도로 열고 기도로 닫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가 아모리 족을 해가 질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아니하였을 때에 승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를 쉬는 것도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사무엘이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손을 내려 기도를 쉴 때에 아모리 사람들에게 패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가 기도를 잘 할 수 있도록 돌을 고이고 양손을 받쳐 주지 않았습니까?10. 지오디(GOD)형
하나님의 방법으로서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의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 주권적인 섭리를 수용하는 영적성숙과 지혜로운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주의 말씀이면 무엇이든지 듣겠습니다. 하고 받아 드리는 이방인 백부장의 태도는 곧 그의 기도의 응답이 되어 그의 하인이 깨끗하게 남은을 입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도 기도하는데 응답이 없습니까?
내 고집대로 밀고가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을 받아 드리면 그 기도는 벌써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11. 미사일형
교회와 전도, 구원, 성도를 위한 합심 기도에 혹은 목회자의 중보형 기도에 미사일과 같은 큰 위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미스바에게 온 이스라엘이 금식하면 기도 할 때에 블레셋이 물러 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응답 등을 볼 때에 반드시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답답한 사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는 말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면 말씀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 주시기 때문에 아직도 무엇인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응답 하시는데 내가 못 듣고 있을 뿐이요 내가 깨닫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눈멀고 거지인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한다는 기도 제목을 내어 놓았을 때에 만 천하는 당신이 무슨 응답을 기대하느냐? 하고 무시하는 말들을 하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흔쾌히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소경인 바디매오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 저가 곧 보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내 기도만이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까?
무디는 생애에 십 수만 번의 응답을 받았다고 했으며 그가 죽기 전에 2가지 응답을 받지 못했는데 하나는 그가 죽어 장사하는 때에 이루어졌고 그가 죽은 후에 나머지 하나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응답받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엇을 기도해도 이미 다 받은 줄로 알고 사도 바울은 감사함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응답을 받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를 본문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만큼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극히 기도의 제목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 주세요 했다가 건강 주세요 했다가 직장 주세요 했다가 시집 장가보내 주세요 저 남자 저 여자하고 헤어지게 해주세요 했다가 물론 이 같은 기도의 제목이 잘 못 된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기도를 제대로 드리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상 기도를 하더라도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식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군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중언부언하다가 혼나지요 야 똑바로 대답해 중언부언 하지마하지 않습니까?
하버드 의과대학의 소아정신과 교수였던 로버트 콜리스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열악한 환경 속에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생활상을 조사했습니다.
피부색깔, 경제적 능력, 교육수준, 문화적 소외, 결손 가정 등, 좋지 않은 환경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조사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 지향적(非指向的)인 사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소원이 없고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소외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비 지향성이 변해서 지향성을 획득하는 아이들의 부류가 있었습니다.
머리를 들고 방향을 가누고 목적을 갖고 열등한 환경과 역경을 극복하며 발전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만난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을 만난 아이들은 그 영성이 변하고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서 축복의 삶을 살 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실 자신이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방향이 전혀 하나님이 의도하는 방향과는 달랐습니다.
그가 기도의 제목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아직 우리 가운데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의 기도가 아니라 이것을 해 주십시오 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감(過感)하게 기도의 패턴을 바꿀 용의가 없습니까?
제4기 남자 제자 반을 3주차 하는데 이들의 패러다임이 바꿔진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당히 긍정적인 일이라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좋을 대로했지 절대로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라고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 되었고 자신에게는 짐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가시 채를 뒤 발길 하는 것과 같은 고통의 삶이었다고 했습니다.
관점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 오는지 모릅니다.
미국사람과 한국 사람의 관점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죽음에 처하는 문제라고 합니다. 자다가 죽기를 원하느냐, 암병(癌病)에 걸려 죽기를 원하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한국 사람은 100이면 90명은 자다가 죽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미국사람은 100이면 90명은 암병걸려 죽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정말일까 의심되지만 미국 사람의 의식 구조는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죽음을 택하게 했을까요? 그들의 답변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준비하고 자신도 준비하고, 그래서 준비된 죽음을 맞는 것이 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죽음은 좋은 것이 아니니 쥐도 새도 모르게 끝내는 것이 축복이라는 우리의 의식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만을 자기 스타일만을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통하여 내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의 기도 제목에 분명히 대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을 가리켜 주님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할렐루야!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 하여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소경이니 눈을 뜨고 보자는 것이 압니다. 돈이 없으니 돈을 벌고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내가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을 제대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눈을 뜨고 무엇을 하였는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길에서 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왜 이것을 구하여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전혀 내가 구해야 할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 감정과 욕심과 내 이익에 매여 기도의 줄도 서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하지 마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천 계양구 평화교회 윤인중 목사님은 지난 달 20일부터 계양산 소나무에 매달린 높이 12미터의 천막에 올라가서 한 달 동안 나무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도 제목을 내어 놓고 지금까지 애를 쓰고 계십니다. 성탄절 그리고 연말연시를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나무 위에서 보내시고 계셨습니다. 골프장 건설 철회와 도시속 시민공원으로의 개발을 촉구하기 위한 이유였습니다. 광역시가운데 가장 녹지비율이 낮은 인천시에 있어서 계양산은 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쉼터라고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목사님이 오죽이나 답답하셨으면 계양산 소나무 위에 다 올라가서 기도를 하시겠나 하는 이해를 하지만 이렇게라도 기도를 해야지 응답이 빨리 오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저렇게도 힘들게 기도하는데 응답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답답함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응답은 받고 있습니까?
비단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라도 원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누가 무슨 기도를 드리든지 간에 반드시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누가 성경에서는 대체로 11개의 유형으로 응답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1. 무조건 예스형(yes)의 응답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합당한 기도에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즉각 응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도 많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주의 뜻에 맞게 구하면 다 시행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노(No)형
나의 기도에 대해서 거부하심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나타내시는 경우입니다.
그 예로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반사회적, 비인격적, 비성경적인 기도에는 침묵이나 거절로 응답. 이 외에도 형제를 용서치 못함, 교만, 혈기, 외식적인 기도, 죄로 인함이거나, 두 마음, 의심, 불순종 등에는 거절로 응답을 하십니다.
이런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하나님이 노(NO)하시면 빨리 바꾸시기 바랍니다.
3. 주바라기형
힘들고 지칠 때,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때 기적적으로 주시는 응답으로 홍해 앞에서의 기적,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암몬을 물리쳐 주시는 인간 한계를 넘은 기적적인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바라고 기다림으로 기적 같은 일이 있습니다.
4. 업그레이드형
나의 기도와 믿음보다 그 이상의 것으로 응답하시는데 어떠한 것을 구했는데 최상의 시간에 최고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의 평소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할 때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서 주시는 더 넘치도록 주시는 기도응답으로 솔로몬이 지혜만 구했는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함께 주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고 없던 자녀도 주시고 전쟁에서 승리까지 하도록 하셨습니다.
5. 웨이트(Wait)형
인생은 먼 길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때로는 형통한 환경의 대로의 길을 걸어갈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려움의 진흙탕길, 가시밭길을 걸어갈 때도폭풍우나 비바람을 맞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에 비전을 품은 자는 굳건한 의지로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가듯이 믿음으로 인생의 앞길을 헤치고 가도록 지속적인 기도를 드림으로서 얻어지는 응답입니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 만 못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6. 진주조개형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 계시 혹은 기도 응답을 통해 그 일에 대해서 약속을 받게 되지만 성취하기 위해서는 아픔과 시련, 연단, 회개, 시험 등을 통과하고 받게 되는 응답으로서 그러한 가운데 자아가 깨어지고 교만이 제거되고 만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변할 때 받게 되는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에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는데 다윗과 요셉 같은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같은 시험과 연단이 있어도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처받은 조개에서 진주가 생산됩니다.
7. 물레방아형
직선형 기도응답이 아니라 변환(變換)형 기도응답입니다.
A를 구했는데 A가 아닌 B나 C, 혹은 D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고 마게도냐(유럽)로 인도하심으로 유럽에 기독교 문명이 획기적으로 열리는 전기가 된 것 같이 자신의 기도와 고집만 주장하고 한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다른 길로 시대를 움직이는 사역을 펼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로 가는 것도 지혜입니다.
8. 야베스형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영육 간에 모두 전인적인 축복을 주시는 경우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기도응답으로서 이 기도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지침이 있는데 이것은 피와 땀과 눈물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곧 씨를 뿌리는 노력이 함께 하는 기도에는 복에 복을 더 하는 야베스 같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게 됩니다.
9. 징검다리형
하나의 목표나 계획을 추진해 가기 위해서는 일의 시작 전과 진행되는 과정 그리고 사후까지 하는 기도를 통하여 얻는 응답입니다.
성취 할 때까지 지속적인 기도로 이루어지는 기도 응답으로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하기까지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도로 열고 기도로 닫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가 아모리 족을 해가 질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아니하였을 때에 승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를 쉬는 것도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사무엘이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손을 내려 기도를 쉴 때에 아모리 사람들에게 패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가 기도를 잘 할 수 있도록 돌을 고이고 양손을 받쳐 주지 않았습니까?10. 지오디(GOD)형
하나님의 방법으로서 인간의 기도나 믿음, 의지와는 무관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창조와 보존, 통치, 성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징계 등의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 주권적인 섭리를 수용하는 영적성숙과 지혜로운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주의 말씀이면 무엇이든지 듣겠습니다. 하고 받아 드리는 이방인 백부장의 태도는 곧 그의 기도의 응답이 되어 그의 하인이 깨끗하게 남은을 입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도 기도하는데 응답이 없습니까?
내 고집대로 밀고가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을 받아 드리면 그 기도는 벌써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11. 미사일형
교회와 전도, 구원, 성도를 위한 합심 기도에 혹은 목회자의 중보형 기도에 미사일과 같은 큰 위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미스바에게 온 이스라엘이 금식하면 기도 할 때에 블레셋이 물러 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응답 등을 볼 때에 반드시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답답한 사실은 한결같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는 말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면 말씀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 주시기 때문에 아직도 무엇인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응답 하시는데 내가 못 듣고 있을 뿐이요 내가 깨닫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눈멀고 거지인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한다는 기도 제목을 내어 놓았을 때에 만 천하는 당신이 무슨 응답을 기대하느냐? 하고 무시하는 말들을 하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흔쾌히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소경인 바디매오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 저가 곧 보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내 기도만이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까?
무디는 생애에 십 수만 번의 응답을 받았다고 했으며 그가 죽기 전에 2가지 응답을 받지 못했는데 하나는 그가 죽어 장사하는 때에 이루어졌고 그가 죽은 후에 나머지 하나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응답받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무엇을 기도해도 이미 다 받은 줄로 알고 사도 바울은 감사함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응답을 받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를 본문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만큼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극히 기도의 제목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 주세요 했다가 건강 주세요 했다가 직장 주세요 했다가 시집 장가보내 주세요 저 남자 저 여자하고 헤어지게 해주세요 했다가 물론 이 같은 기도의 제목이 잘 못 된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기도를 제대로 드리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상 기도를 하더라도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식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군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중언부언하다가 혼나지요 야 똑바로 대답해 중언부언 하지마하지 않습니까?
하버드 의과대학의 소아정신과 교수였던 로버트 콜리스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열악한 환경 속에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생활상을 조사했습니다.
피부색깔, 경제적 능력, 교육수준, 문화적 소외, 결손 가정 등, 좋지 않은 환경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조사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 지향적(非指向的)인 사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소원이 없고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소외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비 지향성이 변해서 지향성을 획득하는 아이들의 부류가 있었습니다.
머리를 들고 방향을 가누고 목적을 갖고 열등한 환경과 역경을 극복하며 발전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만난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을 만난 아이들은 그 영성이 변하고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서 축복의 삶을 살 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실 자신이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방향이 전혀 하나님이 의도하는 방향과는 달랐습니다.
그가 기도의 제목을 바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아직 우리 가운데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의 기도가 아니라 이것을 해 주십시오 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감(過感)하게 기도의 패턴을 바꿀 용의가 없습니까?
제4기 남자 제자 반을 3주차 하는데 이들의 패러다임이 바꿔진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당히 긍정적인 일이라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좋을 대로했지 절대로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라고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스른 것이 되었고 자신에게는 짐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가시 채를 뒤 발길 하는 것과 같은 고통의 삶이었다고 했습니다.
관점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 오는지 모릅니다.
미국사람과 한국 사람의 관점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죽음에 처하는 문제라고 합니다. 자다가 죽기를 원하느냐, 암병(癌病)에 걸려 죽기를 원하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한국 사람은 100이면 90명은 자다가 죽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하게도 미국사람은 100이면 90명은 암병걸려 죽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정말일까 의심되지만 미국 사람의 의식 구조는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죽음을 택하게 했을까요? 그들의 답변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준비하고 자신도 준비하고, 그래서 준비된 죽음을 맞는 것이 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죽음은 좋은 것이 아니니 쥐도 새도 모르게 끝내는 것이 축복이라는 우리의 의식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만을 자기 스타일만을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통하여 내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의 기도 제목에 분명히 대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을 가리켜 주님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할렐루야!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 하여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소경이니 눈을 뜨고 보자는 것이 압니다. 돈이 없으니 돈을 벌고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내가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을 제대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가 눈을 뜨고 무엇을 하였는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길에서 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왜 이것을 구하여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전혀 내가 구해야 할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 감정과 욕심과 내 이익에 매여 기도의 줄도 서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하지 마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