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당신이 영혼 구원의 도구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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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태복음 4:18-22주님은 당신이 영혼 구원의 도구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동네에 건물이 큰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 동안 서로의 이견 마찰로 머리가 터질 정도로 시끄러워서 기독교인으로서 심히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얼마 동안에 수습이 되고 교회가 정상화되어 가는 것 같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월 27일 또 다시 양쪽이 마찰을 가져와서 안 그래도 다른 일로 바쁜 전경들이 200명이나 또 동원이 되고 양측은 한 쪽은 본당에서 강사 목사님을 모시고 중앙아시아 선교를 위한 세미나를 4시간 동안 진행을 하였고 또 한 쪽은 로비와 소 예배 실에서 3-4시간 동안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소 예배 실에서는 본당 쪽을 향하여 교회를 어둡게 하는 검은 세력은 물러가라고 하며 여태까지 외부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로비에서의 부흥성회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감사 하였습니다.
저쪽(담임목사측)이 차로 교회진입을 막고 예배당에서 자면서까지 우리를 막아설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의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로비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속히 우리가 성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며 예수님도 가시면류관을 쓰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이리와 같이 되어 대항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양 같은 모습으로 고난의 길을 감내하셨다며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여 서로가 선이고 상대는 이리 같은 악이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기독인으로서 그 교회를 바라 볼 때에 어떻게 서로의 화해의 길이 모색되지 못 할까?
양쪽의 목사가 이렇게도 해결의 모색 점을 찾지 못 할까?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의 요소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서로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지고 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모든 우상의 종교는 다 자신들을 위하여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기독인의 믿음은 주님을 위하고 다른 이를 위함에 있습니다.
믿어서 자기가 잘 되고 또 자기가 은혜를 누리고 자기가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을 자기 개인을 위하여 유익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지배적입니다.
이러다 보니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기복(祈福)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복인데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정욕적인 기도에 빠지고 자기의 소욕을 위한 한 방편으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나의 신앙생활은 나를 위한 수단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내 몸을 치장하기 위하여 걸고 있는 액세서리같이 말입니다.
주를 위하고 남을 위한다면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순전히 자신을 위한 믿음의 결과가 분쟁을 가져오고 남을 정죄하기에 용감합니다.
만약에 그 교회에 재산이 없다고 여겨 보십시오 결코 그런 다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주님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소욕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성도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따라야 할 자로 여겼습니다.
모두가 주를 위하여 있는 자로 보십니다.
모두가 복음을 위한 자로 여기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자신의 어떤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올라 온 자로 여길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나를 위하여 달라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산행을 하다가 사찰 옆을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찌 우리 성도들의 기도 제목하고 똑 같구나 하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 사찰을 새로 증축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데 그 헌금에는 꼭 그들의 원하는 기도 제목이 함께 합니다.
제가 그들의 기도 제목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기왓장에다가 헌금한 자들의 이름을 적어 놓고 그리고 기도 제목을 함께 적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건강, 그리고 장사가 잘 되고, 또 공부도 잘하고, 시집 장가도 잘 가고, 나라가 평안하고 만사형통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똑같이 않습니까?
구하는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그들은 부처의 이름으로 빌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짐승들이 자신의 소욕을 그들의 신에게 기도해서 얻어먹는 것 아닙니다.
짐승들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하시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 인생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도의 내용은 먹을 것 입을 것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데도 말입니다.
아직도 그것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할까 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내가 원하는 것을 주를 위하여 버려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렇게 자기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여태까지 살아왔던 자기와의 단절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제자들은 자기의 하던 직업을 버렸고 부모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의 고향 친척을 떠났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을 알고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은 것을 알면 때부터 새로운 삶의 출발이 있습니다.
그 삶은 여태까지 살아보지 못하였던 주님을 위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죽고 주님의 함께 사는 부활의 삶을 사는 새 사람 또는 중생한 사람이라고도 하는 자가 됩니다.
옛날의 나는 죽은 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죽는 자를 위하는 자가 아니라 다시 산자가 되어 그 관심이 나를 살리신 주님을 위한 관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과 주 안에서 형제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아닌 주께로 향한 관심 즉 새로운 형제들을 위한 관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실시하고자 하는 알파의 전도 프로그램도 주를 위하고 남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나를 보시기를 겨우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생존을 위하여 허우적거리는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보시지 않으시고 영혼을 위하여 있는 인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을 걷게 되시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두 형제를 보시게 됩니다.
열심히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 입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고기 많이 잡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fellow me 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노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문제의 해결에 중심을 두시지 않으시고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또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를 봅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역시 돈 잘 벌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의 생활고를 안타깝게 여기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안타깝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 왜 예수님을 따라 오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실력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것저것 모든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문제로 만드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게 진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그 문제가운데 따라 갈 수 있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까?
모든 생업은 복음을 위한 직업이 되어야 합니다.
낮은 울타리(2001. 1)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인혜라는 소녀가장이 남매 동생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왔습니다. 자기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자장면을 두 그릇만 시킵니다. 우리도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동생이 말합니다. 이때 주인아줌마가 반갑게 다가갑니다. 예, 너 인혜구나! 나 모르겠니? 엄마 동네 친구야. 영선 아줌마.. 정말 많이 컸구나! 그나저나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 사니? 그리고는 자장면 세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를 내옵니다. 앞으로 자장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라! 아이들이 돌아가자 주인아저씨가 묻습니다. 누구네 집 애들이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아주머니가 대답합니다. 사실은, 나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없다기에 그냥 엄마 친구라고 한 거예요. 불쌍하다고 그냥 음식을 주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엄마 친구라고 하면 다음에 또 찾아올 수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익을 남기기 위하여서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팔고 소망을 팔고 복음을 함께 파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복음송가와 설교 테이프를 틀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전하면서 동시에, 복음도 함께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사업장이 돈을 벌기 위하여만 있는 것으로 여기니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그 사업장은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장이 선교의 장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복음의 현장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의 제일 되는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먹고 살기 위함도 아니요 여러분이 원하는 다른 그 무엇을 위함도 아닙니다.
복음을 위한 내 삶이 되셔야 합니다.
복음적인 삶이 될 때에 내 인생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복음이 우선순위입니다.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제자들은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부친도 버리고 복음을 가장 우선적으로 두었습니다.
독일의 교회가 쇠퇴되어 가는 것을 염려하지만 그래도 본받을 것이 있습니다.
스투트갈트에서 2년마다 열리는 독일교회의 날이 열리는데 한국 교회에서 지난 2000년 기독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참관한 자들이 그들이 어떻게 교회축제를 갖는지를 배우기 위하여 갔는데 독일교회의 날에 대해서 안내를 받았는데, 5일간 진행되는 행사는 모두가 평신도들이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회를 진행하기 위한 자원봉사자만 3만여 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 행사에 독일 전국에서 10만여 명이 모여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독일교회보다 훨씬 주일예배에 많이 참석하고있지만,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원봉사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제자가 아닌 구경꾼이며, 자기 신앙 하나 겨우 지켜 가는 어린아이 같은 크리스천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믿음이지 주를 위하여 다른 영혼을 위하는 섬김은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자원봉사자가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 합니다. 그나마 참여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일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어서 참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교회가 대 사회를 향하여 여러 가지 일을하게 될 텐데, 이 모든일을 전문 인력으로 할 수는 없고, 대부분자원봉사자들이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알파 전도 프로그램 역시 자원 봉사자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상 섬김이 20명 그리고 섬김을 받을 게스트로 30명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섬김을 받든지 섬기든지 하셔야 합니다.
지난 제직 세미나에서 섬김이 14명 예비 섬김이 2명게스트 38명이 기존 성도 게스트 14명 불신자 24명 초청하기로 하였습니다.
참석하지 않으신 분 중에서도 게스트와 섬김 이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나를 그냥 살아가는 자로 보시지 않으시고 많은 영혼을 위한 자로 보시고 부르심에 응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은 복음을 위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삶을 우선순위를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를 살리고 내 이웃이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주인공은 나로 나 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동네에 건물이 큰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 동안 서로의 이견 마찰로 머리가 터질 정도로 시끄러워서 기독교인으로서 심히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얼마 동안에 수습이 되고 교회가 정상화되어 가는 것 같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월 27일 또 다시 양쪽이 마찰을 가져와서 안 그래도 다른 일로 바쁜 전경들이 200명이나 또 동원이 되고 양측은 한 쪽은 본당에서 강사 목사님을 모시고 중앙아시아 선교를 위한 세미나를 4시간 동안 진행을 하였고 또 한 쪽은 로비와 소 예배 실에서 3-4시간 동안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소 예배 실에서는 본당 쪽을 향하여 교회를 어둡게 하는 검은 세력은 물러가라고 하며 여태까지 외부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로비에서의 부흥성회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감사 하였습니다.
저쪽(담임목사측)이 차로 교회진입을 막고 예배당에서 자면서까지 우리를 막아설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의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로비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속히 우리가 성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며 예수님도 가시면류관을 쓰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이리와 같이 되어 대항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양 같은 모습으로 고난의 길을 감내하셨다며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여 서로가 선이고 상대는 이리 같은 악이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기독인으로서 그 교회를 바라 볼 때에 어떻게 서로의 화해의 길이 모색되지 못 할까?
양쪽의 목사가 이렇게도 해결의 모색 점을 찾지 못 할까?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의 요소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서로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지고 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모든 우상의 종교는 다 자신들을 위하여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기독인의 믿음은 주님을 위하고 다른 이를 위함에 있습니다.
믿어서 자기가 잘 되고 또 자기가 은혜를 누리고 자기가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을 자기 개인을 위하여 유익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지배적입니다.
이러다 보니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기복(祈福)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복인데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정욕적인 기도에 빠지고 자기의 소욕을 위한 한 방편으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나의 신앙생활은 나를 위한 수단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내 몸을 치장하기 위하여 걸고 있는 액세서리같이 말입니다.
주를 위하고 남을 위한다면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순전히 자신을 위한 믿음의 결과가 분쟁을 가져오고 남을 정죄하기에 용감합니다.
만약에 그 교회에 재산이 없다고 여겨 보십시오 결코 그런 다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주님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소욕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성도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따라야 할 자로 여겼습니다.
모두가 주를 위하여 있는 자로 보십니다.
모두가 복음을 위한 자로 여기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은 자신의 어떤 소욕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올라 온 자로 여길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나를 위하여 달라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산행을 하다가 사찰 옆을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찌 우리 성도들의 기도 제목하고 똑 같구나 하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 사찰을 새로 증축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데 그 헌금에는 꼭 그들의 원하는 기도 제목이 함께 합니다.
제가 그들의 기도 제목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기왓장에다가 헌금한 자들의 이름을 적어 놓고 그리고 기도 제목을 함께 적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건강, 그리고 장사가 잘 되고, 또 공부도 잘하고, 시집 장가도 잘 가고, 나라가 평안하고 만사형통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똑같이 않습니까?
구하는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그들은 부처의 이름으로 빌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짐승들이 자신의 소욕을 그들의 신에게 기도해서 얻어먹는 것 아닙니다.
짐승들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하시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 인생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도의 내용은 먹을 것 입을 것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데도 말입니다.
아직도 그것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할까 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내가 원하는 것을 주를 위하여 버려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렇게 자기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여태까지 살아왔던 자기와의 단절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제자들은 자기의 하던 직업을 버렸고 부모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의 고향 친척을 떠났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을 알고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은 것을 알면 때부터 새로운 삶의 출발이 있습니다.
그 삶은 여태까지 살아보지 못하였던 주님을 위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죽고 주님의 함께 사는 부활의 삶을 사는 새 사람 또는 중생한 사람이라고도 하는 자가 됩니다.
옛날의 나는 죽은 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죽는 자를 위하는 자가 아니라 다시 산자가 되어 그 관심이 나를 살리신 주님을 위한 관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과 주 안에서 형제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아닌 주께로 향한 관심 즉 새로운 형제들을 위한 관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실시하고자 하는 알파의 전도 프로그램도 주를 위하고 남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나를 보시기를 겨우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생존을 위하여 허우적거리는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보시지 않으시고 영혼을 위하여 있는 인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해변을 걷게 되시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두 형제를 보시게 됩니다.
열심히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자들 입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고기 많이 잡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fellow me 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노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문제의 해결에 중심을 두시지 않으시고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또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를 봅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역시 돈 잘 벌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의 생활고를 안타깝게 여기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안타깝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 왜 예수님을 따라 오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실력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것저것 모든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문제로 만드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게 진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그 문제가운데 따라 갈 수 있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까?
모든 생업은 복음을 위한 직업이 되어야 합니다.
낮은 울타리(2001. 1)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인혜라는 소녀가장이 남매 동생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왔습니다. 자기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자장면을 두 그릇만 시킵니다. 우리도 엄마 아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동생이 말합니다. 이때 주인아줌마가 반갑게 다가갑니다. 예, 너 인혜구나! 나 모르겠니? 엄마 동네 친구야. 영선 아줌마.. 정말 많이 컸구나! 그나저나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 사니? 그리고는 자장면 세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를 내옵니다. 앞으로 자장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라! 아이들이 돌아가자 주인아저씨가 묻습니다. 누구네 집 애들이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아주머니가 대답합니다. 사실은, 나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없다기에 그냥 엄마 친구라고 한 거예요. 불쌍하다고 그냥 음식을 주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엄마 친구라고 하면 다음에 또 찾아올 수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은 이익을 남기기 위하여서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팔고 소망을 팔고 복음을 함께 파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복음송가와 설교 테이프를 틀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전하면서 동시에, 복음도 함께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사업장이 돈을 벌기 위하여만 있는 것으로 여기니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그 사업장은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장이 선교의 장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복음의 현장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의 제일 되는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먹고 살기 위함도 아니요 여러분이 원하는 다른 그 무엇을 위함도 아닙니다.
복음을 위한 내 삶이 되셔야 합니다.
복음적인 삶이 될 때에 내 인생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복음이 우선순위입니다.
fellow me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제자들은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부친도 버리고 복음을 가장 우선적으로 두었습니다.
독일의 교회가 쇠퇴되어 가는 것을 염려하지만 그래도 본받을 것이 있습니다.
스투트갈트에서 2년마다 열리는 독일교회의 날이 열리는데 한국 교회에서 지난 2000년 기독인 대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참관한 자들이 그들이 어떻게 교회축제를 갖는지를 배우기 위하여 갔는데 독일교회의 날에 대해서 안내를 받았는데, 5일간 진행되는 행사는 모두가 평신도들이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회를 진행하기 위한 자원봉사자만 3만여 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 행사에 독일 전국에서 10만여 명이 모여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독일교회보다 훨씬 주일예배에 많이 참석하고있지만,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원봉사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제자가 아닌 구경꾼이며, 자기 신앙 하나 겨우 지켜 가는 어린아이 같은 크리스천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믿음이지 주를 위하여 다른 영혼을 위하는 섬김은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자원봉사자가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 합니다. 그나마 참여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일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어서 참 힘들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교회가 대 사회를 향하여 여러 가지 일을하게 될 텐데, 이 모든일을 전문 인력으로 할 수는 없고, 대부분자원봉사자들이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알파 전도 프로그램 역시 자원 봉사자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상 섬김이 20명 그리고 섬김을 받을 게스트로 30명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섬김을 받든지 섬기든지 하셔야 합니다.
지난 제직 세미나에서 섬김이 14명 예비 섬김이 2명게스트 38명이 기존 성도 게스트 14명 불신자 24명 초청하기로 하였습니다.
참석하지 않으신 분 중에서도 게스트와 섬김 이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나를 그냥 살아가는 자로 보시지 않으시고 많은 영혼을 위한 자로 보시고 부르심에 응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은 복음을 위함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삶을 우선순위를 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를 살리고 내 이웃이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주인공은 나로 나 임을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