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당신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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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26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24:32-36 예수님은 당신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만났습니까?
저는 어제 온 종일 주님을 만나고 함께 생활 하였습니다.
식사 할 때도 그리고 잠 잘 때도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도 심지어 제가 품고 있는 마음 속 생각에까지도 주님은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온 땅에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의 주간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죄의 값인 죽음을 대신 당하신 주님을 한 주간 동안 생각 할 적에 얼마나 황송한지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실질적으로 제가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 할 때에는 세상 그 누구도 저에게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도와 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언제나 어디서나 위로 하시고 희망적으로 인도하시고 살 힘을 주시는지 모릅니다.
왜 성도들이 나를 위하여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주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도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도 전부다 행해도 되는 거야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나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떠 올리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가끔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전 성도들의 얼굴을 주일 학생까지 떠 올리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내린 결론은 모든 성도가 한결같이 이 세상을 아주 힘들게 모두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살기 힘들다 보니깐 마음은 원이로되 내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충분히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3번씩이나 세상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려면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보면 제자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래 육신이 약한 것을 이해한다 그러니 할 수 없지 라기 보다는 그 약한 육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핑계가 되어서는 되겠느냐? 는 것입니다.
모 시중 4대 일간지에 부활절을 앞두고 몇몇 교회의 고난 주간 특별 새벽기도회 실황을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모 교회는 4당5락이라는 말이 이번 새벽 기도회에 생겼다고 합니다.
그 말은 새벽 4시에 나오면 본당에 입성을 하는 것이고 5시에 나오면 부속 건물에서 화상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 2-3시에 나오는 성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꼭두새벽에 나오는데 세상일에 얼마나 지장이 가지 않을까?
그런데 진작 참석하는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박나림. 33.MBC 아나운서는 평소 아침잠이 많아요. 세수도 안 하고 새벽기도에 간 적도 있죠. 그래도 새벽기도는 바쁜 일상과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한 제 마음을 청소해줘요. 출근길도 가뿐해요.
김연상. 53.사업가 일에 쫓기다 보면 따로 기도를 하긴 어렵죠. 새벽만큼 집중도가 높고, 하나님 음성을 듣기에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들은 이 시간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날마다 묻고 시간마다 묻고 일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는데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신다고 하셨는데 만나셨습니까?
모 교회에서는 특별히 새벽기도를 통해 영적인 체험을 하는 성도들이 많아서 심지어는 미국과 유럽에서 새벽기도를 위해 1주일씩 한국으로 들어오는 교민들도 있다고 말 할 정도입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주고 정리해 주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채(福債)를 던져 놓고 마냥 기다리는 우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을 주께 던져 놓고 내 삶 모든 부분에서 주님을 만나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아버지 집에서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고 있었는데 한번은 아버지와 형님께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짓고 도망을 가다가 빈 들판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이곳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미처 몰랐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그렇게 고민하고 번민하는 삶의 현장에도 우리 주님은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 교회에서는 예전에는 출근 부담 때문에 남자보다 주로 여자들이 새벽기도에 참석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새벽기도 후에 출근하는 남자들이 부쩍 늘어서 새벽기도의 남녀 비율이 거의 반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을 도와주시는 주님을 경험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우리 성도들이 새벽 기도회에 참여하는 길을 어떻게 라도 열었으면 합니다.
오늘 새벽에 40-50명의 성도들이 예배를 들었는데 오늘 같으면 딱 좋겠습니다.
그래야 생활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교회에서 직장인이고 학생이고 아예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일주일 한두 번 정도라도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집에서도 무엇인가를 해서 먹여 보내야 하는데 돌아가면서 조금 수고를 해주면 내 자녀, 내 남편들이 교회에 올라와 기도하고 세상으로 나가면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주님이 모든 문제에 평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이 부활하셨습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시고 그 주님을 믿음으로 진정한 삶의 평안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 본들 천년만년 지고 살고 못하고 죽을 때에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다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입니다. 마는 그 생명이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다면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잘 살아 본들 무슨 삶이 가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 모든 문제를 위하여 오늘 살아 나셨음을 기념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도 새벽 시간에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라고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이 주님은 이 시간에도 이 예배 현장에 살아 계십니다.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직장에 내 가정에 내 문제에 내 고민되는 일에 주님이 눈을 감고 보시지 않는 것으로 여겨 제 마음대로 일들을 처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주님은 나의 삶 현장에서 내가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 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안의 눈이 띄지 않으면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지식의 눈이 있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내 삶의 현장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요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 나셔서 실망하고 좌절되어 고향으로 낙향하는 제자들의 여행에 동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보니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였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31절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부활을 감사하는 예배를 참석하셨지만 이 사람 저 사람들만 보이는 분들도 계시고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모두 영적인 눈을 떠서 주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우주비행사 에드윈 올드린(Edwin Aldlin) 대령이 헝가리의 한 대학을 방문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달나라에 첫 발을 디디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 할 때에 어느 대학생이 그에게 질문하기를 소련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에 가서도 하나님을 못 보았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십니까?
그때 올드린대령은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영의 시각으로야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였다고 그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고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런던 대학의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신 전자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 은하수 안에서 2,000억 개 정도이고 전체 우주 속에 별은 2,000억 곱하기 1,000억 개 정도 되는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별은 더욱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지식의 눈을 뜨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입니까?
공부해라 공부해라 죽어라고 공부하고 수십 년을 공부하지 않습니까?
유치원부터시작해서 초중고 학교 대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하지만 그것도 바닷가의 모래알 정도로 조금 밖에 모릅니다.
저도 공부를 더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공부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집에 있는 돈을 다 털어 넣습니다.
아이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이게 보통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상의 지식을 하나 알고도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데 우리가 영의 눈을 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을 때에는 우리의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뜨거워지고 바로 육적인 삶 밖에 살지 못했던 자가 영적인 삶을 사는 자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 삶이 변하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쉽게 말하면 소달구지만 만들어 타다가 과학이라는 지식이 들어가니 고급 세단을 만들어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들어가기만 하면 과거와 전혀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놀라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의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락에 숨어서 문을 꼭 닫아두고 있었습니다.문만 닫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도 닫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는 평안이란 있을 수가 없고 얼마나 삶 자체가 피곤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치고 피곤한 모습, 세상의 일에 놀라고, 불확실한 내일이 두렵기만 하고, 세상의 이일 저 일로 염려와 근심이 차있는 모습 모두가 평안이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얼굴에는 죽겠다 하고 쓰여져 있고요 그리고 마음은 굳게 폐쇄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문제에서 해결을 볼 수 있도록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제발 그냥 왔다가 그냥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 계신 주님을 알았습니까? 말씀에 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32절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그러면 인생의 문제가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일기장에 씌어 있는 내용입니다. 1738년5월24일 아침
그는 로마서주석을 죽 읽어나가다가 9시 15분경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내 죄를 다 사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경험한 뜨거움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 마음 속의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웨슬레는 이 뜨거움으로 밖으로 나가 간증하고 예수님을 전함으로서 부패하고 타락하여 멸망하던 영국을 건져내었고 지금의 감리교를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두 제자의 모습을 봅니다.
글로바라는 사람과 또 한사람이 엠마오라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가득차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났고, 후회와 답답함과 앞으로의 삶의 막막함 속에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복음의 역사를 풀어서 설명하시고는 떠나십니다. 그러할 때 그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절망과 낙심, 그리고 슬픔과 미래의 두려움으로 냉랭하고 얼음같이 차갑던 그들의 마음이 삶의 새로운 열정으로 뜨거워 졌습니다.
이제는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나의 삶에 진정한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서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미래의 불확실한 고통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은 바로 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제일 먼저 무슨 말씀 하실 것 같습니까?
우리 모두가 세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으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라고 하십니다.
너의 문제에 네 인생에 네 모든 일에 평강을 축원하십니다. 할렐루야!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현실의 잘못된 인생의 삶으로 인하여 염려와 근심, 두려움과 아픔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평강’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샬롬이라는 말이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적인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번영, 행복, 자유, 정의, 화목, 승리등 모든 것을 다 통합된 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 이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믿음을 주시려고 노력하십니다.
39절에는 손과 발을 만져 못 자국을 확인하고 나인줄 알라고 하십니다.
41절 이하에 보면 계속 의심하는 제자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앞에서 직접 잡수시면서 믿음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요20:27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하십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나의 삶의 현장에 계시면서 평강의 축복을 내리워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으로 임하여 두려워만 하는 자 되지 마시고 나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만났습니까?
저는 어제 온 종일 주님을 만나고 함께 생활 하였습니다.
식사 할 때도 그리고 잠 잘 때도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도 심지어 제가 품고 있는 마음 속 생각에까지도 주님은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온 땅에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의 주간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죄의 값인 죽음을 대신 당하신 주님을 한 주간 동안 생각 할 적에 얼마나 황송한지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실질적으로 제가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 할 때에는 세상 그 누구도 저에게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도와 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언제나 어디서나 위로 하시고 희망적으로 인도하시고 살 힘을 주시는지 모릅니다.
왜 성도들이 나를 위하여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주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도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도 전부다 행해도 되는 거야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나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떠 올리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가끔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전 성도들의 얼굴을 주일 학생까지 떠 올리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내린 결론은 모든 성도가 한결같이 이 세상을 아주 힘들게 모두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살기 힘들다 보니깐 마음은 원이로되 내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충분히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3번씩이나 세상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려면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보면 제자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래 육신이 약한 것을 이해한다 그러니 할 수 없지 라기 보다는 그 약한 육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핑계가 되어서는 되겠느냐? 는 것입니다.
모 시중 4대 일간지에 부활절을 앞두고 몇몇 교회의 고난 주간 특별 새벽기도회 실황을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모 교회는 4당5락이라는 말이 이번 새벽 기도회에 생겼다고 합니다.
그 말은 새벽 4시에 나오면 본당에 입성을 하는 것이고 5시에 나오면 부속 건물에서 화상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 2-3시에 나오는 성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꼭두새벽에 나오는데 세상일에 얼마나 지장이 가지 않을까?
그런데 진작 참석하는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박나림. 33.MBC 아나운서는 평소 아침잠이 많아요. 세수도 안 하고 새벽기도에 간 적도 있죠. 그래도 새벽기도는 바쁜 일상과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한 제 마음을 청소해줘요. 출근길도 가뿐해요.
김연상. 53.사업가 일에 쫓기다 보면 따로 기도를 하긴 어렵죠. 새벽만큼 집중도가 높고, 하나님 음성을 듣기에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이들은 이 시간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날마다 묻고 시간마다 묻고 일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는데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신다고 하셨는데 만나셨습니까?
모 교회에서는 특별히 새벽기도를 통해 영적인 체험을 하는 성도들이 많아서 심지어는 미국과 유럽에서 새벽기도를 위해 1주일씩 한국으로 들어오는 교민들도 있다고 말 할 정도입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주고 정리해 주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채(福債)를 던져 놓고 마냥 기다리는 우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을 주께 던져 놓고 내 삶 모든 부분에서 주님을 만나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아버지 집에서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고 있었는데 한번은 아버지와 형님께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짓고 도망을 가다가 빈 들판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깜짝 놀라면서 이곳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미처 몰랐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그렇게 고민하고 번민하는 삶의 현장에도 우리 주님은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 교회에서는 예전에는 출근 부담 때문에 남자보다 주로 여자들이 새벽기도에 참석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새벽기도 후에 출근하는 남자들이 부쩍 늘어서 새벽기도의 남녀 비율이 거의 반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을 도와주시는 주님을 경험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우리 성도들이 새벽 기도회에 참여하는 길을 어떻게 라도 열었으면 합니다.
오늘 새벽에 40-50명의 성도들이 예배를 들었는데 오늘 같으면 딱 좋겠습니다.
그래야 생활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교회에서 직장인이고 학생이고 아예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일주일 한두 번 정도라도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집에서도 무엇인가를 해서 먹여 보내야 하는데 돌아가면서 조금 수고를 해주면 내 자녀, 내 남편들이 교회에 올라와 기도하고 세상으로 나가면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주님이 모든 문제에 평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이 부활하셨습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시고 그 주님을 믿음으로 진정한 삶의 평안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 본들 천년만년 지고 살고 못하고 죽을 때에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다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입니다. 마는 그 생명이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다면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잘 살아 본들 무슨 삶이 가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 모든 문제를 위하여 오늘 살아 나셨음을 기념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도 새벽 시간에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라고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이 주님은 이 시간에도 이 예배 현장에 살아 계십니다.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직장에 내 가정에 내 문제에 내 고민되는 일에 주님이 눈을 감고 보시지 않는 것으로 여겨 제 마음대로 일들을 처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주님은 나의 삶 현장에서 내가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 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안의 눈이 띄지 않으면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지식의 눈이 있듯이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내 삶의 현장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요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 나셔서 실망하고 좌절되어 고향으로 낙향하는 제자들의 여행에 동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보니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였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31절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부활을 감사하는 예배를 참석하셨지만 이 사람 저 사람들만 보이는 분들도 계시고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모두 영적인 눈을 떠서 주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우주비행사 에드윈 올드린(Edwin Aldlin) 대령이 헝가리의 한 대학을 방문하여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달나라에 첫 발을 디디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 할 때에 어느 대학생이 그에게 질문하기를 소련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에 가서도 하나님을 못 보았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십니까?
그때 올드린대령은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영의 시각으로야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였다고 그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고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런던 대학의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신 전자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 은하수 안에서 2,000억 개 정도이고 전체 우주 속에 별은 2,000억 곱하기 1,000억 개 정도 되는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별은 더욱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지식의 눈을 뜨기 위하여 얼마나 열심입니까?
공부해라 공부해라 죽어라고 공부하고 수십 년을 공부하지 않습니까?
유치원부터시작해서 초중고 학교 대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하지만 그것도 바닷가의 모래알 정도로 조금 밖에 모릅니다.
저도 공부를 더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공부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집에 있는 돈을 다 털어 넣습니다.
아이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이게 보통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상의 지식을 하나 알고도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데 우리가 영의 눈을 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을 때에는 우리의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뜨거워지고 바로 육적인 삶 밖에 살지 못했던 자가 영적인 삶을 사는 자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 삶이 변하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쉽게 말하면 소달구지만 만들어 타다가 과학이라는 지식이 들어가니 고급 세단을 만들어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들어가기만 하면 과거와 전혀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놀라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의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락에 숨어서 문을 꼭 닫아두고 있었습니다.문만 닫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도 닫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는 평안이란 있을 수가 없고 얼마나 삶 자체가 피곤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치고 피곤한 모습, 세상의 일에 놀라고, 불확실한 내일이 두렵기만 하고, 세상의 이일 저 일로 염려와 근심이 차있는 모습 모두가 평안이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얼굴에는 죽겠다 하고 쓰여져 있고요 그리고 마음은 굳게 폐쇄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문제에서 해결을 볼 수 있도록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제발 그냥 왔다가 그냥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아 계신 주님을 알았습니까? 말씀에 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32절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그러면 인생의 문제가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일기장에 씌어 있는 내용입니다. 1738년5월24일 아침
그는 로마서주석을 죽 읽어나가다가 9시 15분경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내 죄를 다 사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경험한 뜨거움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 마음 속의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웨슬레는 이 뜨거움으로 밖으로 나가 간증하고 예수님을 전함으로서 부패하고 타락하여 멸망하던 영국을 건져내었고 지금의 감리교를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두 제자의 모습을 봅니다.
글로바라는 사람과 또 한사람이 엠마오라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가득차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났고, 후회와 답답함과 앞으로의 삶의 막막함 속에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복음의 역사를 풀어서 설명하시고는 떠나십니다. 그러할 때 그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절망과 낙심, 그리고 슬픔과 미래의 두려움으로 냉랭하고 얼음같이 차갑던 그들의 마음이 삶의 새로운 열정으로 뜨거워 졌습니다.
이제는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나의 삶에 진정한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서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미래의 불확실한 고통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은 바로 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제일 먼저 무슨 말씀 하실 것 같습니까?
우리 모두가 세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으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라고 하십니다.
너의 문제에 네 인생에 네 모든 일에 평강을 축원하십니다. 할렐루야!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현실의 잘못된 인생의 삶으로 인하여 염려와 근심, 두려움과 아픔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평강’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샬롬이라는 말이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적인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번영, 행복, 자유, 정의, 화목, 승리등 모든 것을 다 통합된 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 이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믿음을 주시려고 노력하십니다.
39절에는 손과 발을 만져 못 자국을 확인하고 나인줄 알라고 하십니다.
41절 이하에 보면 계속 의심하는 제자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앞에서 직접 잡수시면서 믿음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요20:27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하십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나의 삶의 현장에 계시면서 평강의 축복을 내리워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으로 임하여 두려워만 하는 자 되지 마시고 나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