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지금의 위치는 생명을 구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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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4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에스더 4:14-16당신의 지금의 위치는 생명을 구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지난 4일 숙명여대와 극동방송 여성운영위원회의 초청으로 방한한 파라과이 대통령 영부인 마리아 글로리아 데 두아르테(45세) 여사는 6일 오전 조선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를 통해, 그의 방한 목적을 ‘한국과 파라과이간 교류증진’ 외에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신앙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1992년에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예수님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그와 그의 남편, 곧 니카노르 두아르테 프루토스 現 파라과이 대통령은 지난 2003년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남편은 하늘을 향해 주님, 저를 통해 일해주세요 라고 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삶의 깊은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성령체험 했을 당시에 불꽃이 가슴 속에 들어오는 것 같았고,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대통령이 되어서 첫 외침이 주여 저를 통해서 일을 하여 주세요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 인구의 85%가 가톨릭 신자인 파라과이에서 개신교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는데 기득권 계층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영부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을 담당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고, 그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35년간의 독재로 인해 사회ㆍ경제ㆍ도덕 등 모든 면에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의 파라과이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남편과 내가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파라과이의 모든 국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위치가 무엇을 위함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이런 대답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소욕을 채우기 위함이라고 소히 먹고 살기 위함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상시적인 대답을 얻기 위한다면 절대로 물어 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왜 공부를 하느냐? 고 물어 보는데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면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얻기 위하여 물어 본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더 나는 대답을 얻기 위함입니다.
먹기 위하여만 태어난 인생이 아니지 않습니까?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하여 있는 내 인생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나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위치가 먹기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니라 그것보다 사람의 위치가 먹는 것 보다 더 귀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간에도 우리는 먹고 살아야지 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교회에 나온 것도 이것 때문에 교회로 나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삼성 회장같은 그룹의 총수에게 배우고 잘 보이면 이 문제는 더 빨리 해결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본능적인 충족을 바라는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6:25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행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를 통하여 구원의 기회를 다른 이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존재의 귀중함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세상적인 본능 충족을 위한 자로 있다면 나 말고도 다른 이들이 얼마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할 사람들 많습니다.
안 시켜져서 못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위한 삶은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자신이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방인 출신이지만 왕후가 된 여인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왕후가 된 것은 무엇으로든지 보나 세상 적으로 가장 최고의 것을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먹을거리를 자랑 할 때에 쓰는 용어가 있는데 왕의 진상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왕비의 자리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최고의 진상품을 먹기 위한 자리가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장 14절중에 네가 왕후의 위(位)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고 하였습니다.
여기 왕후는 에스더라는 고아 출신이었는데 사촌 오라버니 모르드개가 자신의 딸같이 보살핌으로 그녀가 페르샤 제국 군주의 왕비가 된 것입니다.
그 왕후의 위(位)를 조국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 페르샤제국 군주의 왕비로 연락하고, 영예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기독신자들에게 주어진 직함과 달란트들은 하나님께서 모두가 사람을 살리려고 주신 중요한 자리입니다.
요셉이라는 청년은 종으로 형제들의 시기로 팔러 갔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마침 형제들이 흉년을 당하여 양식을 얻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 왔다가 자신들이 시기하여 팔아먹는 동생이 총리가 되어 있음을 알고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종으로 팔아 던 동생이 총리가 되어 있으니 우리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당연한 생각이 아닙니까?
그런데 총리된 동생의 말이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우리 인생을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형들이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살리려고 나를 먼저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앞으로도 3년을 더 흉년이 있으니 아예 이곳으로 와서 함께 사십시다 형님네 식구들과 그 자녀들을 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생각의 발상을 보십시오
요셉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 미리 보내어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은 세계적인 흉년을 만날 때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다음에 나오는 바사(페르샤)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을 때 바사왕 고레스는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 백성을 고국에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포로 되었던 땅에 그대로 남아 있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르드개와 에스더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준 바사 왕 다리오의 아들인 아하수에로 왕(주전 485-464년)은나라를 동쪽으로는 인도로부터 서쪽으로는 에티오피아까지 127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였습니다.
이 때에 왕후로 발탁된 사람이 유대인이었던 에스더 입니다. 그 때에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던 총리대신 하만 이란 자가 유대인에 쾌심 죄를 걸고 소주 민족인 유대인을 모조리 죽일 계획을 가지고 왕의 재가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유대인들을 살리려고 에스더를 왕비의 자리에 두셨던 것이지 왕비가 되기 위하여 에스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각자의 위치 바로 그 자리가 내 본능 충족을 위한 자리로만 보지 마시고 영혼을 살리는 사람을 살리는 자리임을 아시고 소중하게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기회는 언제든지 지금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긴박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마냥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는 그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선한 일일 수록 미루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회는 잡았을 때 더 많아지고 무시했을 때는 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안전 이란 없다. 오직 기회만 있을 뿐이다.D. 맥아더 장군의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때로는 정말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들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갈등이 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의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이런 기회들로 이루어져 가게 되는 데,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기회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입니까?
에스더는 연약한 여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부름의 단 한 번의 기회를 잘 살림으로 위대한 일을 이룬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모습에서 우리의 기회들을 잃지 않은 지혜로운 처신들을 배워야 합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5:13-14)고 하였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것은 크게 후회 할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은 시간이라고 하는 창조 질서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낮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날 때와 죽을 때, 약할 때와 강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라는 이 시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유형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결정적인 싸인(sign)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 사사들 중에는 하나님이 어떤 기회를 주실 때 우리가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 시간의 선용을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 하였습니다(시90:12). 그 이유는 시간(세월)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고, 우리의 일생이 순식간에 다하여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시90:12).
바울은 말하기를 지혜롭게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골4:5, 엡5:15-17).
이 말은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 있게 내용 있게 매수하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주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바로 붙잡는 자는 세계를 붙잡는 자가 됩니다. 찬스는 우리의 생애를 절정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수단입니다.
그냥 본능을 충족하기만 위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기회는 내 자신이 드려 짐으로서 이루어집니다.
이것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40년 여름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폴란드에 살고 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인접한 나라 리투아니아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곳 역시 안전한 곳은 못되었습니다. 유태인들은 또 다시 다른 나라로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입국을 허락하는 비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비자를 발급하는 각국 영사관들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고, 접촉이 가능한 곳은 일본 영사관뿐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서둘러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습니다. 그곳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본 영사관의 스기하라 부영사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본국 정부에 문의 전보를 쳤습니다. 본국에서는 곧바로 회신을 보냈습니다.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였습니다. 독일과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사관 담장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 부영사는 다시 두 차례나 본국 정부에 허락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습니다. 하지만 회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대로 비자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밤을 고민하던 스기하라는 마침내 본국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사람의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저 많은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사관 문을 열고 유태인들을 들어오게 한 스기하라는 그날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잠과 식사를 거른 채 비자를 발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목숨을 구한 유태인 숫자는 무려 6천명이 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도 한복판의 큰 거리를 `스기하라 거리\\라고 명명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자기 나라에 스기하라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인도적인 행동 덕분에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뉴욕에 모여 그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스기하라는 죽기 전에 국가를 배신하며 자신의 생명까지 담보로 이렇게 한 것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백성이면 으래히 일본인을 정죄하며 아주 몹쓸 자라고만 여겼지만 잘난 채 하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 이런 훌륭한 인물도 일본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의 행로에서 나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일에 우리들의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이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고, 나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벗어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서야 합니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때를 위해 있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때를 위해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위대한 절정, 영예로운 절정을 맛보았습니다.
이게 인생으로 왔다간 간 보람이요 축복이 아닙니까?
더 이상 본능적인 일에 내 자신을 묶어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위치에서 많은 사람을 영 유간에 살리는 지금 내 인생의 최고의 복된 기회를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4일 숙명여대와 극동방송 여성운영위원회의 초청으로 방한한 파라과이 대통령 영부인 마리아 글로리아 데 두아르테(45세) 여사는 6일 오전 조선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를 통해, 그의 방한 목적을 ‘한국과 파라과이간 교류증진’ 외에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신앙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1992년에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예수님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던 그와 그의 남편, 곧 니카노르 두아르테 프루토스 現 파라과이 대통령은 지난 2003년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남편은 하늘을 향해 주님, 저를 통해 일해주세요 라고 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삶의 깊은 체험 속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성령체험 했을 당시에 불꽃이 가슴 속에 들어오는 것 같았고,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대통령이 되어서 첫 외침이 주여 저를 통해서 일을 하여 주세요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 인구의 85%가 가톨릭 신자인 파라과이에서 개신교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는데 기득권 계층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영부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을 담당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고, 그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35년간의 독재로 인해 사회ㆍ경제ㆍ도덕 등 모든 면에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의 파라과이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남편과 내가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파라과이의 모든 국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위치가 무엇을 위함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이런 대답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소욕을 채우기 위함이라고 소히 먹고 살기 위함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상시적인 대답을 얻기 위한다면 절대로 물어 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왜 공부를 하느냐? 고 물어 보는데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면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을 얻기 위하여 물어 본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더 나는 대답을 얻기 위함입니다.
먹기 위하여만 태어난 인생이 아니지 않습니까?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하여 있는 내 인생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나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위치가 먹기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니라 그것보다 사람의 위치가 먹는 것 보다 더 귀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간에도 우리는 먹고 살아야지 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교회에 나온 것도 이것 때문에 교회로 나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삼성 회장같은 그룹의 총수에게 배우고 잘 보이면 이 문제는 더 빨리 해결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본능적인 충족을 바라는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6:25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행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를 통하여 구원의 기회를 다른 이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존재의 귀중함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세상적인 본능 충족을 위한 자로 있다면 나 말고도 다른 이들이 얼마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할 사람들 많습니다.
안 시켜져서 못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위한 삶은 대통령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자신이 그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방인 출신이지만 왕후가 된 여인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왕후가 된 것은 무엇으로든지 보나 세상 적으로 가장 최고의 것을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먹을거리를 자랑 할 때에 쓰는 용어가 있는데 왕의 진상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왕비의 자리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최고의 진상품을 먹기 위한 자리가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장 14절중에 네가 왕후의 위(位)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고 하였습니다.
여기 왕후는 에스더라는 고아 출신이었는데 사촌 오라버니 모르드개가 자신의 딸같이 보살핌으로 그녀가 페르샤 제국 군주의 왕비가 된 것입니다.
그 왕후의 위(位)를 조국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 페르샤제국 군주의 왕비로 연락하고, 영예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기독신자들에게 주어진 직함과 달란트들은 하나님께서 모두가 사람을 살리려고 주신 중요한 자리입니다.
요셉이라는 청년은 종으로 형제들의 시기로 팔러 갔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마침 형제들이 흉년을 당하여 양식을 얻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 왔다가 자신들이 시기하여 팔아먹는 동생이 총리가 되어 있음을 알고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종으로 팔아 던 동생이 총리가 되어 있으니 우리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당연한 생각이 아닙니까?
그런데 총리된 동생의 말이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우리 인생을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형들이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살리려고 나를 먼저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앞으로도 3년을 더 흉년이 있으니 아예 이곳으로 와서 함께 사십시다 형님네 식구들과 그 자녀들을 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생각의 발상을 보십시오
요셉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 미리 보내어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은 세계적인 흉년을 만날 때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다음에 나오는 바사(페르샤)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을 때 바사왕 고레스는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 백성을 고국에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포로 되었던 땅에 그대로 남아 있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르드개와 에스더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준 바사 왕 다리오의 아들인 아하수에로 왕(주전 485-464년)은나라를 동쪽으로는 인도로부터 서쪽으로는 에티오피아까지 127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였습니다.
이 때에 왕후로 발탁된 사람이 유대인이었던 에스더 입니다. 그 때에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던 총리대신 하만 이란 자가 유대인에 쾌심 죄를 걸고 소주 민족인 유대인을 모조리 죽일 계획을 가지고 왕의 재가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유대인들을 살리려고 에스더를 왕비의 자리에 두셨던 것이지 왕비가 되기 위하여 에스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각자의 위치 바로 그 자리가 내 본능 충족을 위한 자리로만 보지 마시고 영혼을 살리는 사람을 살리는 자리임을 아시고 소중하게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기회는 언제든지 지금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긴박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마냥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는 그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선한 일일 수록 미루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회는 잡았을 때 더 많아지고 무시했을 때는 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안전 이란 없다. 오직 기회만 있을 뿐이다.D. 맥아더 장군의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때로는 정말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들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갈등이 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의 기회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이런 기회들로 이루어져 가게 되는 데,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기회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입니까?
에스더는 연약한 여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부름의 단 한 번의 기회를 잘 살림으로 위대한 일을 이룬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모습에서 우리의 기회들을 잃지 않은 지혜로운 처신들을 배워야 합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5:13-14)고 하였습니다.
기회를 놓치는 것은 크게 후회 할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은 시간이라고 하는 창조 질서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낮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날 때와 죽을 때, 약할 때와 강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라는 이 시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유형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결정적인 싸인(sign)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 사사들 중에는 하나님이 어떤 기회를 주실 때 우리가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 시간의 선용을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 하였습니다(시90:12). 그 이유는 시간(세월)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고, 우리의 일생이 순식간에 다하여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시90:12).
바울은 말하기를 지혜롭게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골4:5, 엡5:15-17).
이 말은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 있게 내용 있게 매수하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주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바로 붙잡는 자는 세계를 붙잡는 자가 됩니다. 찬스는 우리의 생애를 절정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수단입니다.
그냥 본능을 충족하기만 위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기회는 내 자신이 드려 짐으로서 이루어집니다.
이것만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40년 여름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폴란드에 살고 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인접한 나라 리투아니아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곳 역시 안전한 곳은 못되었습니다. 유태인들은 또 다시 다른 나라로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입국을 허락하는 비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비자를 발급하는 각국 영사관들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고, 접촉이 가능한 곳은 일본 영사관뿐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서둘러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습니다. 그곳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본 영사관의 스기하라 부영사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본국 정부에 문의 전보를 쳤습니다. 본국에서는 곧바로 회신을 보냈습니다.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였습니다. 독일과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사관 담장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 부영사는 다시 두 차례나 본국 정부에 허락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습니다. 하지만 회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대로 비자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밤을 고민하던 스기하라는 마침내 본국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사람의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저 많은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사관 문을 열고 유태인들을 들어오게 한 스기하라는 그날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잠과 식사를 거른 채 비자를 발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목숨을 구한 유태인 숫자는 무려 6천명이 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도 한복판의 큰 거리를 `스기하라 거리\\라고 명명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자기 나라에 스기하라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인도적인 행동 덕분에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뉴욕에 모여 그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스기하라는 죽기 전에 국가를 배신하며 자신의 생명까지 담보로 이렇게 한 것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백성이면 으래히 일본인을 정죄하며 아주 몹쓸 자라고만 여겼지만 잘난 채 하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 이런 훌륭한 인물도 일본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의 행로에서 나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일에 우리들의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이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고, 나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벗어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서야 합니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때를 위해 있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때를 위해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스더는 자신의 생애 중 가장 위대한 절정, 영예로운 절정을 맛보았습니다.
이게 인생으로 왔다간 간 보람이요 축복이 아닙니까?
더 이상 본능적인 일에 내 자신을 묶어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위치에서 많은 사람을 영 유간에 살리는 지금 내 인생의 최고의 복된 기회를 만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