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숨보다 더 귀한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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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1213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사도행전 20 : 22 - 27 내 목숨보다 더 귀한 삶을 위하여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고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개인에 따라서 있습니다.
옛날노래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하고 노래하고 사랑에 목숨을 걸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도 목숨을 걸지만 이성간에 사랑에도 목숨을 걸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회장의 딸도 그 많은 재산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 주지 못하고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귀한 목숨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학생들은 공부에다가 목숨을 걸어 내신 성적이 좋지 못하여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아파트 옥탑문은 항상 잠겨 두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명예나 가문, 자존심 때문에 생활고 등등의 이유로 한강에서 뛰어 들고 달리는 차로 뛰어 들기도 합니다.
어쩌던 목숨을 버릴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는 목숨이 아까워서 죽지 못하고 그냥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자신의 가진 칼로 배를 가르는 할복(割腹)을 하고 저 이슬람과 회교국에서는 자신의 몸에 폭약을 장치하고 자폭을 감행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여성들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그 한을 보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귀한 것 같이 여기지만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분당의 모 교회 청년회원들이 선교 봉사 활동을 갔다가 무장한 탈레반 군에게 피랍을 당하고 그리고 정치 협상의 대상이 되어 살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언뜻 이락크에서 살고 싶다고 외쳤지만 살해당한 김선일 군이 생각이 났습니다.
왜 이들이 이처럼 목숨이 위험한 곳을 택하느냐? 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만해도 납치 사건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민간인 출입을 극히 제한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돈을 벌기 위한 장사꾼이나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하여 오는 자는 군인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 기독인들이 봉사 활동을 벌이기 위하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미주 한인 교회에서도 년 300여명 가량이 위험한 지역으로 선교 차원의 봉사를 위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돈을 쓰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까지 내 놓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갓피플 이라는 기독교 포털 인터넷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이 무사하기를 기도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이런 기도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번 일로 인하여 선교가 위축되지 않고 더욱 활발하기 위하여 기도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음에도 더욱 선교는 활발하기를 바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어려움이 있지만 선교는 결코 이것 때문에 중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고 로마로 가는 그의 여정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길이 참으로 어려운 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22-24절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개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순전히 복음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기독인들이 달려가야 할 인생의 지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목숨이 귀하다고 생각하는데 또한 목숨을 자신의 소욕을 위하여 버리기도 하는데 내 목숨보다 더 큰 것인 복음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 기독인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놓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목숨보다 더 큰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목숨이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하나 보존하기 위하여 평생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닙니다.
오직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만을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세상적인 소욕을 위하여 아주 귀하게 사용되어야 목숨을 버리는 일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한번 태어났다가 한번 죽은 것입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한 생명을 무엇을 위하여 투자를 하느냐? 입니다.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내 목숨보다 더 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육의 소욕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소욕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살다가 보면 세상이 힘이 들어서 죽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능력의 종 엘리야도 죽고 싶다고 했으며 사도 바울도 로마 옥중에서 죽어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저도 힘이 들 때는 딱 죽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든다고 죽는 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겁한 죽음이고 이기적인 죽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죽음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선을 위하여 내 목숨을 사용하여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선을 향하여 일어났습니다.
죽으려고 음식을 전패하고 있다가 물도 마시고 떡을 먹고 힘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여 하고 지시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바울도 마음을 다짐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로마에 가서 복음 전 할 일이 있다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알고 그 일을 위하여 목숨을 드릴 새로운 각오를 하였습니다.
육으로 죽고 살고 하는 자가 아니라 영으로 주고 사는 자가 되시기를 추구언합니다.
그러면 육신적인 그 어떤 문제도 능히 감당하고 그 가운데서 죽을 이유가 절대로 나오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만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떠나면서 자신의 목숨을 드린다는 각오를 가지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목숨보다 더 큰 가치와 사명을 붙들며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복음을 위하여 이 목숨은 도구로 사용이 된다는 것입니다.그것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기꺼이 목숨을 드릴 수 있는 삶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의 교회를 위하여 행하는 일이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이 수고를 하고 십일조 등의 헌금을 드릴 때에 무지 무지하게 아깝고 속이 상하시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안 드릴 때도 있고 적게 드릴 때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나 같은 이기적이고 나만을 위하여 살았던 내가 헌금을 하는 것이 기적이고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영광이 되십니까?
초대 교회 당시에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들어가 매를 맞고 위협과 협박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아이고 무서워라 죽을 뻔 헸네 다시는 이런 일은 안 할 거야? 하지 않았습니다.
야호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대열에 속하게 되었구나 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생명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가 ‘SIMPLE LIFE’라는 책을 썼습니다. 두꺼운 책이지만 자세히 보면 요지는 하나입니다. 진정한 SIMPLE LIFE, 단순한 삶이 무엇이냐 하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무엇이냐 하면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사는 것’ 요약하면 그것입니다.단순한 삶은 오직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그 뜻을 세우며 사는 것, 그것이 SIMPLE LIFE라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삶이 될 것입니다.
제발 인생을 복잡하게 살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풀 수 없는 복잡한 인생을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진정한 파워맨이 되고 싶고 파워 있는 생기 있고 활기찬 삶이 되고 싶습니까?구차하게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붙잡히어 목숨보다 큰 가치 때문에 기쁨과 감격 속에서 매진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드릴 수 있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떨어져 죽으면 많은 결실을 가져 옵니다.
100배, 60배, 30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한 알 그대로 남아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결코 자신을 드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1890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며 고종의 시의(侍醫)였던 존 헤론이 묻히면서 조성되기 시작한 양화진 묘지공원엔 총 555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중 167기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 선교사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교사들 외에, 이름이 잘 알려지진 않은 옥중 전도를 처음으로 시작한 벙커, 세브란스 초대 병원장 에비슨, 성서 번역의 공로자 게일, 교육과 선교에 공헌한 베어드, 농촌운동과 직업교육의 개척자 브로크만 등이 묻혀 있으며, 제3묘역엔 베이커, 홀트, 오코너, 클로제 등, 복음 전파를 위해 이 땅에 부모를 좇아왔으나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은 선교사들의 자녀들이 묻혀있습니다. 우리 한국인 빛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 민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힘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아니 여러분들이 소망과 살아 갈 힘이 무엇입니까?
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누가 이 암흑의 땅에 빛을 던져 주었습니까?
고향으로 고국을 떠나 그들의 모든 것을 투자하여 목숨을 던져 복음을 전한 이들의 헌신을 통하여 전하여진 복음이지 않습니까?
그 때의 우리 민족과 나라의 모습은 아프가니스탄과 진배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믿음이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내 믿음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것을 알고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님 얼굴 보기 원합니다.
한재승 선교사 카자흐스탄에서 선교를 하다가 아내가 불량자들에게 살해를 당하고 그 충격에서 아내의 묻어 놓고 그가 부르는 노래가 있었으니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내 아내는 행복한 여자입니다.
주를 위해 보던 것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미개하고 무식하고 조그마한 나라 그리고 자신들을 살해하는 이 민족을 이 나라를 이들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오지 못하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한 선교사들의 소원은 그들을 살해하고 핍박하고 죽인 이 땅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테일러, George Alexander Taylor)\\\\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 (마리 위더슨, Mary Ann Widdowson)\\\\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캔드릭, Ruby Rachel Kendrik)\\ -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이 남긴 한마디입니다.
왜 내 목숨을 드릴 수 있습니까?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주를 부어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한 것처럼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제물에 비유하는 것은 성도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셈입니다.
과연 나의 죽음 앞에서 많은 이들이 아니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부어드릴 포도주와 같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포도주를 아무것이나 쓸 수는 없거든요. 지저분하고 찌꺼기가 섞인 하등품 포도주로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쓸 수 없잖아요?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이 세대와 하등 다를 것 없이 사는 모습으로, 그런 삶으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바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생존만을 위한 삶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목숨보다 더 귀한 아니 내 목숨을 다 들려도 아깝지 않고 영광스러운 삶을 시작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고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개인에 따라서 있습니다.
옛날노래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하고 노래하고 사랑에 목숨을 걸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에도 목숨을 걸지만 이성간에 사랑에도 목숨을 걸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회장의 딸도 그 많은 재산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 주지 못하고 살아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귀한 목숨을 버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학생들은 공부에다가 목숨을 걸어 내신 성적이 좋지 못하여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리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아파트 옥탑문은 항상 잠겨 두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명예나 가문, 자존심 때문에 생활고 등등의 이유로 한강에서 뛰어 들고 달리는 차로 뛰어 들기도 합니다.
어쩌던 목숨을 버릴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는 목숨이 아까워서 죽지 못하고 그냥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자신의 가진 칼로 배를 가르는 할복(割腹)을 하고 저 이슬람과 회교국에서는 자신의 몸에 폭약을 장치하고 자폭을 감행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여성들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그 한을 보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귀한 것 같이 여기지만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분당의 모 교회 청년회원들이 선교 봉사 활동을 갔다가 무장한 탈레반 군에게 피랍을 당하고 그리고 정치 협상의 대상이 되어 살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언뜻 이락크에서 살고 싶다고 외쳤지만 살해당한 김선일 군이 생각이 났습니다.
왜 이들이 이처럼 목숨이 위험한 곳을 택하느냐? 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만해도 납치 사건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민간인 출입을 극히 제한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돈을 벌기 위한 장사꾼이나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하여 오는 자는 군인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 기독인들이 봉사 활동을 벌이기 위하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미주 한인 교회에서도 년 300여명 가량이 위험한 지역으로 선교 차원의 봉사를 위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돈을 쓰고 돈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까지 내 놓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갓피플 이라는 기독교 포털 인터넷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이 무사하기를 기도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이런 기도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번 일로 인하여 선교가 위축되지 않고 더욱 활발하기 위하여 기도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음에도 더욱 선교는 활발하기를 바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같은 어려움이 있지만 선교는 결코 이것 때문에 중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고 로마로 가는 그의 여정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길이 참으로 어려운 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22-24절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개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순전히 복음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기독인들이 달려가야 할 인생의 지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목숨이 귀하다고 생각하는데 또한 목숨을 자신의 소욕을 위하여 버리기도 하는데 내 목숨보다 더 큰 것인 복음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 기독인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놓고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목숨보다 더 큰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목숨이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하나 보존하기 위하여 평생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다닙니다.
오직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만을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세상적인 소욕을 위하여 아주 귀하게 사용되어야 목숨을 버리는 일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한번 태어났다가 한번 죽은 것입니다.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한 생명을 무엇을 위하여 투자를 하느냐? 입니다.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내 목숨보다 더 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육의 소욕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성령의 소욕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살다가 보면 세상이 힘이 들어서 죽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능력의 종 엘리야도 죽고 싶다고 했으며 사도 바울도 로마 옥중에서 죽어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저도 힘이 들 때는 딱 죽었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든다고 죽는 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겁한 죽음이고 이기적인 죽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죽음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선을 위하여 내 목숨을 사용하여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선을 향하여 일어났습니다.
죽으려고 음식을 전패하고 있다가 물도 마시고 떡을 먹고 힘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여 하고 지시하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바울도 마음을 다짐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로마에 가서 복음 전 할 일이 있다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알고 그 일을 위하여 목숨을 드릴 새로운 각오를 하였습니다.
육으로 죽고 살고 하는 자가 아니라 영으로 주고 사는 자가 되시기를 추구언합니다.
그러면 육신적인 그 어떤 문제도 능히 감당하고 그 가운데서 죽을 이유가 절대로 나오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만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떠나면서 자신의 목숨을 드린다는 각오를 가지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목숨보다 더 큰 가치와 사명을 붙들며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복음을 위하여 이 목숨은 도구로 사용이 된다는 것입니다.그것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기꺼이 목숨을 드릴 수 있는 삶으로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의 교회를 위하여 행하는 일이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이 수고를 하고 십일조 등의 헌금을 드릴 때에 무지 무지하게 아깝고 속이 상하시조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안 드릴 때도 있고 적게 드릴 때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나 같은 이기적이고 나만을 위하여 살았던 내가 헌금을 하는 것이 기적이고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영광이 되십니까?
초대 교회 당시에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들어가 매를 맞고 위협과 협박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아이고 무서워라 죽을 뻔 헸네 다시는 이런 일은 안 할 거야? 하지 않았습니다.
야호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대열에 속하게 되었구나 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생명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가 ‘SIMPLE LIFE’라는 책을 썼습니다. 두꺼운 책이지만 자세히 보면 요지는 하나입니다. 진정한 SIMPLE LIFE, 단순한 삶이 무엇이냐 하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무엇이냐 하면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사는 것’ 요약하면 그것입니다.단순한 삶은 오직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그 뜻을 세우며 사는 것, 그것이 SIMPLE LIFE라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삶이 될 것입니다.
제발 인생을 복잡하게 살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풀 수 없는 복잡한 인생을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진정한 파워맨이 되고 싶고 파워 있는 생기 있고 활기찬 삶이 되고 싶습니까?구차하게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붙잡히어 목숨보다 큰 가치 때문에 기쁨과 감격 속에서 매진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드릴 수 있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떨어져 죽으면 많은 결실을 가져 옵니다.
100배, 60배, 30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한 알 그대로 남아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결코 자신을 드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1890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며 고종의 시의(侍醫)였던 존 헤론이 묻히면서 조성되기 시작한 양화진 묘지공원엔 총 555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중 167기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 선교사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교사들 외에, 이름이 잘 알려지진 않은 옥중 전도를 처음으로 시작한 벙커, 세브란스 초대 병원장 에비슨, 성서 번역의 공로자 게일, 교육과 선교에 공헌한 베어드, 농촌운동과 직업교육의 개척자 브로크만 등이 묻혀 있으며, 제3묘역엔 베이커, 홀트, 오코너, 클로제 등, 복음 전파를 위해 이 땅에 부모를 좇아왔으나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은 선교사들의 자녀들이 묻혀있습니다. 우리 한국인 빛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 민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힘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아니 여러분들이 소망과 살아 갈 힘이 무엇입니까?
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누가 이 암흑의 땅에 빛을 던져 주었습니까?
고향으로 고국을 떠나 그들의 모든 것을 투자하여 목숨을 던져 복음을 전한 이들의 헌신을 통하여 전하여진 복음이지 않습니까?
그 때의 우리 민족과 나라의 모습은 아프가니스탄과 진배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믿음이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내 믿음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것을 알고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님 얼굴 보기 원합니다.
한재승 선교사 카자흐스탄에서 선교를 하다가 아내가 불량자들에게 살해를 당하고 그 충격에서 아내의 묻어 놓고 그가 부르는 노래가 있었으니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내 아내는 행복한 여자입니다.
주를 위해 보던 것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미개하고 무식하고 조그마한 나라 그리고 자신들을 살해하는 이 민족을 이 나라를 이들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오지 못하는 곳입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한 선교사들의 소원은 그들을 살해하고 핍박하고 죽인 이 땅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아펜젤러, H. G. Appenzeller)\\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테일러, George Alexander Taylor)\\\\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 (마리 위더슨, Mary Ann Widdowson)\\\\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캔드릭, Ruby Rachel Kendrik)\\ -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이 남긴 한마디입니다.
왜 내 목숨을 드릴 수 있습니까?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주를 부어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한 것처럼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제물에 비유하는 것은 성도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셈입니다.
과연 나의 죽음 앞에서 많은 이들이 아니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부어드릴 포도주와 같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포도주를 아무것이나 쓸 수는 없거든요. 지저분하고 찌꺼기가 섞인 하등품 포도주로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쓸 수 없잖아요?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이 세대와 하등 다를 것 없이 사는 모습으로, 그런 삶으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바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생존만을 위한 삶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목숨보다 더 귀한 아니 내 목숨을 다 들려도 아깝지 않고 영광스러운 삶을 시작하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