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주님만이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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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9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시 편 16 : 1 - 5당신에게 주님만이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전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교수가 지난 25일 CBS TV의 영화감독 이장호의 누군가를 만나다에 나와서 기독교인이 된 후 삶의 변화에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내 삶이 얼마나 외로운 삶인가.
혼자 바들바들 떨면서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세례받기 전까지 나는 토끼 인생이었다. 나는 잘났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
이제 보니 나는 거북이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고 얼마나 많은 것이 부족했었는지…. 인간의 오만을 버리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주를 알지 못하였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엉터리였다는 것을 그리고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영성과 천국이 있는 문지방에서 지금까지 전력투구한 삶과 마지막 나를 주님 앞에 던지는 처절한 도전 앞에 서 있다고 덧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의 생애 가운데서 자신 있게 한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저는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다 살펴보아도 세상에서 그 어떤 복을 논 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짐만 지고 힘겨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들임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당시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Milvian)다리를 사이에 두고 적군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치열한 전쟁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군대는 상대편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할 위기에 처해진 콘스탄틴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에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믿는 하나님께 의지하자고 해서 기도를 하던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리글자를 보게 되며 이 상징을 새기고 전쟁에 임하면 이기리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콘스탄틴은 이를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하고 병사들의 방패와 투구에 환상으로 본 그리스도의 상징 기호를 그려 넣고 전쟁에 임하여 불리하던 상황을 역전시켜 승리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서방을 손에 넣게 된 콘스탄틴은 이 전쟁의 승리가 자기에게 환상을 보여준 하나님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믿게 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에 이르며 313년에 전쟁에서 이기고, 바로 이 로마 지금 이태리 수도를 터키 이스탄불로 옮겨서 콘스탄틴 노플이라고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당시 세계의 수도가 어디입니까? 터키입니다.
전 세계의 최고 정치, 최대 강대국, 최고의 경제대국이 어디입니까? 터키입니다.
세계의 모든 문화가 모이는 곳, 음악회가 열리는 곳,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 터키입니다.
당시의 그들의 찬란한 문명은 어느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터키의 그 영광은 하나님을 잘 믿어 동네마다 교회, 가는 곳마다 교회, 전 나라가 예수 믿어 천년동안 이 엄청난 영광을 누리던 이 나라가 예수님을 져버리면서 축복의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제가 터기를 가보니 교회란 교회는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흔적을 다 지우고 이슬람화로 우상화로 다 바꾸어 놓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교회 그 화려한 교회가 잡초가 우겨져 폐허가 되고 교회라는 흔적이 기둥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어떤 교회는 그 흔적도 찾지 못 할 정도로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약적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하면 아도나이입니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의 주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아도나이입니다.
히브리어 아도나이(Adonay)는 주로 영어번역에서는 Lord로 번역되고 여호와는 LORD(모두 대문자)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 약 340여회 등장하는데 본래 아도나이는 인간적 주인과 구별하여 쓰인 단어로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절대적인 주재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주인을 무시하고 대적을 하는데 어찌 잘 되고 복되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을 잘 알고 경험한 다윗은 주님 밖에 나의 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스스로의 힘으로 복을 받을 자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이 있는 자로 다 보입니다.
주님께 받을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은 지지리도 복이 없지만 주님의 주시는 복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복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福이라는 한자어의 구조를 살펴보면 보여준다 혹은 내린다는 의미의 보일 시(示)자가 그 앞에 붙어 있어서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늘이 내리시는 것이 복이라고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경험적으로 볼 때에 복은 하늘에서 내린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말에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에 살아 갈 복을 하늘에서 제 가각 받고 태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원하고 함께 하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내 생활이 복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복이 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197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호주 작가 패드릭 화이트는 그의 소설 행복한 계곡에서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나무 에서는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하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달을 때에, 가장 하나님과 가깝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평온하고 맑은 날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태양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분이시다.
어떤 환난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주님을 우리의 전부로 삼을 수 있다면 이미 소망이 있고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2절의 고백이 아닙니까?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고백 속에는 모든 가능성이 열립니다.
아마 화라도 복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쥐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 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고 할렐루야!
자신의 한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약한 자로 강하게 부족한 자로 풍성하게 가난하자로 부유하게 어리석은 자로 지혜롭게 죽는 자 같으나 사는 자로 세우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세상의 기대가 없음을 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소망이 되실 것입니다.
비록 오늘 실패가 있고 고난이 있어도 이 미래에 주어질 분깃이 있는 사람은 그것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죽지 않고 살려 두신 이유는 남들이 보기에는 무용한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이 땅에 두셔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발 하나님으로 복을 받고 살라고 하심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복되게 살아갑시다
당신이 주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
나로 인하여 주님은 기뻐하시고 만족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희생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대하는지
지금도 집 나간 아들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학자 칼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두 개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오죽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면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를 대속해야만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숙연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는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나의 값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살리려 하셨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죄송한 마음과 기쁨의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기면 하면 주님은 무엇인들 못 도와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가까이 하기를 원하셔야 합니다.
십자가는 덧셈입니다.
예수를 가까이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와 멀어지면 모든 좋은 것이 떠나갑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 사업이 가까워집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 돈이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주님과 멀어지면 모든 돈이 나를 피합니다. 물질이 모두 다 나를 떠납니다.
나를 대적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줍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가까이 하고, 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주님과 멀어지면 사랑하는 아내도, 부모도, 자녀도 나와 멀어집니다.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줍니다. 주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행복도 주 안에 있습니다. 성공도, 영광도, 주님 안
에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하면 모든 것이 더 해집니다.
곱셈도 덧셈에서 나왔습니다. 덧셈도 방향만 틀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면 모두가 폭발적으로 더 해지고, 곱해집니다.
이제는 결단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고 시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잘 될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내게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대의 우상은 더욱 간교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더 이상 가시적인 우상을 예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대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돈 일수도 있고 권력일수도 있고 자기의 고집이나 주장일수도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나님 외에 그 무엇으로도 내 인생의 주인을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다른 신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주후 1-3세기 기독교 역사 속에 가장 순교자를 많이 낳았던 시대에 로마제국은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길에서 한 로마의 시민이 다른 로마인을 만나면 그 인사가 가이사는 나의 주님 이십니다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인사에 대한 대답이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가이사 입니다. 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용기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대답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혹은 형장에서 야수의 밥으로 칼날의 이슬로 사라져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아도나이는 한분 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분만이 우리의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시오, 예배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나의 삶을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복되게 결실케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실패를 많이 해 본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 불행했던 분이 있습니까? 과거가 파란 만장했던 분이 있습니까? 그 많은 경험 이것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분깃입니다.
여러분, 이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 밖에 내 복이 없음을 통감하시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주님의 복을 받을 자로 바뀌게 됩니다. Fuller 신학교에서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 교수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My Heart-Christ\\s Home)이라는 작은 책에서 내가 복되지 못함은 그 이유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는 믿지만 그를 온전히 주님으로 모시지 못한 까닭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내가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님삼은 삶이 없으면 아직도 나는 온전한 삶의 기쁨, 삶의 승리를 경험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온전히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으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멍어 교수는 우리가 마음 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만드는 첫 단계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면 그는 손님되시길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는 우리의 마음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주인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이제 내 방의 모든 열쇠를 그에게 드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로버트 멍어 교수는 이제라도 서둘러 당신의 집의 명의 이전을 하라고 도전합니다.
이제 나의 집, 내 마음, 아니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산업 이익 재산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전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대 교수가 지난 25일 CBS TV의 영화감독 이장호의 누군가를 만나다에 나와서 기독교인이 된 후 삶의 변화에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 내 삶이 얼마나 외로운 삶인가.
혼자 바들바들 떨면서 여기까지 온 내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세례받기 전까지 나는 토끼 인생이었다. 나는 잘났고,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게 아니다.
이제 보니 나는 거북이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고 얼마나 많은 것이 부족했었는지…. 인간의 오만을 버리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주를 알지 못하였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엉터리였다는 것을 그리고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영성과 천국이 있는 문지방에서 지금까지 전력투구한 삶과 마지막 나를 주님 앞에 던지는 처절한 도전 앞에 서 있다고 덧 붙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의 생애 가운데서 자신 있게 한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저는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다 살펴보아도 세상에서 그 어떤 복을 논 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짐만 지고 힘겨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주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들임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당시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Milvian)다리를 사이에 두고 적군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치열한 전쟁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군대는 상대편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할 위기에 처해진 콘스탄틴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에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믿는 하나님께 의지하자고 해서 기도를 하던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리글자를 보게 되며 이 상징을 새기고 전쟁에 임하면 이기리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콘스탄틴은 이를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하고 병사들의 방패와 투구에 환상으로 본 그리스도의 상징 기호를 그려 넣고 전쟁에 임하여 불리하던 상황을 역전시켜 승리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서방을 손에 넣게 된 콘스탄틴은 이 전쟁의 승리가 자기에게 환상을 보여준 하나님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믿게 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에 이르며 313년에 전쟁에서 이기고, 바로 이 로마 지금 이태리 수도를 터키 이스탄불로 옮겨서 콘스탄틴 노플이라고 이름을 짓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당시 세계의 수도가 어디입니까? 터키입니다.
전 세계의 최고 정치, 최대 강대국, 최고의 경제대국이 어디입니까? 터키입니다.
세계의 모든 문화가 모이는 곳, 음악회가 열리는 곳,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 터키입니다.
당시의 그들의 찬란한 문명은 어느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터키의 그 영광은 하나님을 잘 믿어 동네마다 교회, 가는 곳마다 교회, 전 나라가 예수 믿어 천년동안 이 엄청난 영광을 누리던 이 나라가 예수님을 져버리면서 축복의 불이 꺼져 버렸습니다.
제가 터기를 가보니 교회란 교회는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흔적을 다 지우고 이슬람화로 우상화로 다 바꾸어 놓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교회 그 화려한 교회가 잡초가 우겨져 폐허가 되고 교회라는 흔적이 기둥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어떤 교회는 그 흔적도 찾지 못 할 정도로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약적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현하면 아도나이입니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의 주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아도나이입니다.
히브리어 아도나이(Adonay)는 주로 영어번역에서는 Lord로 번역되고 여호와는 LORD(모두 대문자)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 약 340여회 등장하는데 본래 아도나이는 인간적 주인과 구별하여 쓰인 단어로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절대적인 주재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주인을 무시하고 대적을 하는데 어찌 잘 되고 복되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을 잘 알고 경험한 다윗은 주님 밖에 나의 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스스로의 힘으로 복을 받을 자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이 있는 자로 다 보입니다.
주님께 받을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여러분은 지지리도 복이 없지만 주님의 주시는 복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복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福이라는 한자어의 구조를 살펴보면 보여준다 혹은 내린다는 의미의 보일 시(示)자가 그 앞에 붙어 있어서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늘이 내리시는 것이 복이라고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경험적으로 볼 때에 복은 하늘에서 내린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말에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에 살아 갈 복을 하늘에서 제 가각 받고 태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원하고 함께 하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내 생활이 복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복이 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197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호주 작가 패드릭 화이트는 그의 소설 행복한 계곡에서 인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분량만큼 진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나무 에서는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하게 될 때에,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달을 때에, 가장 하나님과 가깝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평온하고 맑은 날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태양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분이시다.
어떤 환난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주님을 우리의 전부로 삼을 수 있다면 이미 소망이 있고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2절의 고백이 아닙니까?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고백 속에는 모든 가능성이 열립니다.
아마 화라도 복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쥐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 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고 할렐루야!
자신의 한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약한 자로 강하게 부족한 자로 풍성하게 가난하자로 부유하게 어리석은 자로 지혜롭게 죽는 자 같으나 사는 자로 세우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세상의 기대가 없음을 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소망이 되실 것입니다.
비록 오늘 실패가 있고 고난이 있어도 이 미래에 주어질 분깃이 있는 사람은 그것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죽지 않고 살려 두신 이유는 남들이 보기에는 무용한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이 땅에 두셔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발 하나님으로 복을 받고 살라고 하심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복되게 살아갑시다
당신이 주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
나로 인하여 주님은 기뻐하시고 만족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희생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대하는지
지금도 집 나간 아들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학자 칼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두 개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오죽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면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를 대속해야만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만 쳐다보면 숙연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는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나의 값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살리려 하셨겠는가?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죄송한 마음과 기쁨의 마음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기면 하면 주님은 무엇인들 못 도와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가까이 하기를 원하셔야 합니다.
십자가는 덧셈입니다.
예수를 가까이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와 멀어지면 모든 좋은 것이 떠나갑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 사업이 가까워집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면 돈이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주님과 멀어지면 모든 돈이 나를 피합니다. 물질이 모두 다 나를 떠납니다.
나를 대적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줍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면 모든 사람이 나를 가까이 하고, 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주님과 멀어지면 사랑하는 아내도, 부모도, 자녀도 나와 멀어집니다.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줍니다. 주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행복도 주 안에 있습니다. 성공도, 영광도, 주님 안
에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하면 모든 것이 더 해집니다.
곱셈도 덧셈에서 나왔습니다. 덧셈도 방향만 틀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하면 모두가 폭발적으로 더 해지고, 곱해집니다.
이제는 결단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고 시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잘 될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내게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대의 우상은 더욱 간교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더 이상 가시적인 우상을 예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대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돈 일수도 있고 권력일수도 있고 자기의 고집이나 주장일수도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나님 외에 그 무엇으로도 내 인생의 주인을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다른 신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주후 1-3세기 기독교 역사 속에 가장 순교자를 많이 낳았던 시대에 로마제국은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길에서 한 로마의 시민이 다른 로마인을 만나면 그 인사가 가이사는 나의 주님 이십니다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인사에 대한 대답이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가이사 입니다. 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용기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대답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혹은 형장에서 야수의 밥으로 칼날의 이슬로 사라져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아도나이는 한분 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바로 그분만이 우리의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시오, 예배의 주인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나의 삶을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복되게 결실케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실패를 많이 해 본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 불행했던 분이 있습니까? 과거가 파란 만장했던 분이 있습니까? 그 많은 경험 이것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분깃입니다.
여러분, 이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 밖에 내 복이 없음을 통감하시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주님의 복을 받을 자로 바뀌게 됩니다. Fuller 신학교에서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 교수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My Heart-Christ\\s Home)이라는 작은 책에서 내가 복되지 못함은 그 이유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는 믿지만 그를 온전히 주님으로 모시지 못한 까닭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내가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님삼은 삶이 없으면 아직도 나는 온전한 삶의 기쁨, 삶의 승리를 경험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온전히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으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멍어 교수는 우리가 마음 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만드는 첫 단계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면 그는 손님되시길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는 우리의 마음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주인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이제 내 방의 모든 열쇠를 그에게 드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로버트 멍어 교수는 이제라도 서둘러 당신의 집의 명의 이전을 하라고 도전합니다.
이제 나의 집, 내 마음, 아니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산업 이익 재산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