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쉼을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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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66회 작성일 2015-08-1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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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28-30 마음의 쉼을 얻자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기독교 집에서 자랐지만 청소년 시절에 그 신앙을 버리고 인생의 긴 방황 끝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에 신앙의 고백들을 쓴 나의 신앙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발견합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기쁨이나 행복이나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가 18세가 되던 해 한 친구는 나에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신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신앙이 나를 속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이제 단순히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참 안식과 쉼을 얻고 있습니까?
왜 나에게는 쉼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쉼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쉼을 얻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속에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57:20-21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로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나에게 쉼이 없음은 예수님 안에서 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에게 쉼이 없음은 예수를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죄짐을 지느라고 지쳐있는 삶이 무거운 짐이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내 짐이 무겁지 않습니까?
예수를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해도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인가 역전을 시키고 바꾸어보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하루아침에 무엇인가 바꾸려고 하니깐 이 신앙 자체도 짐이 되고 피곤합니다.
항상 바뀌지 않는 현실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전1:9-10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날마다 그 문제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괴롭히고 있습니다.
문제가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바뀌지 않는다 말입니다.
누가 바뀌어야 하는가?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세상을 보는 내 눈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내가 바꿔져 버리니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내가 보는 시각이 달라졌으니 이미 세상은 아주 긍정적으로 내게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근본이 바뀌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눅18:25-27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오늘도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변화 할 수 없는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기에서 수고라는 말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 결과 피곤하고 지친 상태를 의미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지쳐있습니다.
또 무거운 짐 진이라는 말은 타의에 의해 마지못해 짐을 지고 부담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짐을 진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형편은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아 자유하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다.
자기의 모든 하는 일에 정죄와 비판을 받은 자이다
결국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근심 걱정 무거운 짐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모두 괴로움 만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수고 할 때에 그 무거운 짐보다 더 기쁨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짐들이 나를 그냥 짓누르는 것은 바로 죄의 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내 마음대로 행하여 지쳐있고 그 죄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기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짐이 점점 무거워지면 곤란합니다.
짐이 점점 가벼워져야 합니다. 가벼워져야 하늘로 올라갑니다.
다윗 역시 죄의 중압감을 느꼈습니다.
시38:3-4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신약의 사도 바울 역시 죄책감이 그를 힘들게 하여 죽고 싶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롬7:23-24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사도 바울은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말했습니까?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내가 죄에게 사로잡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롬7:14-20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바 악을 범하는 것이 나의 모습이 아닌가요?
그러니 얼마나 곤곤한 사람입니까?
죄의 짐이란 이렇게 무겁고 무거운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짐 때문에 지쳐만 있지 쉼과 안식이 없습니다.
진정한 쉼은 육체의 휴식이나 또는 육체의 쾌락을 통해서 얻는 만족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것만 바라보고 사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주님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 평안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평안을 참 평안이라고 부릅니다.
롬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의 모든 평안은 다만 상대적인 평안에 불과합니다.
그 평안은 항상 불안한 것이니 진정한 평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 평안은 과연 절대적인 평안이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우리를 참 평화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 평안과 안식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자꾸 다른 곳에서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얻으려고 기웃 기웃 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경에서 쉼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쉼의 의미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방해받지 않는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아가는 것이 안식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복잡한 삶이 조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안식입니다.
그렇다고 안식이 단순히 멈추어 있는 정지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일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가게 물건도 사지 않고 아무데도 안 가는 것은 율법적인 안식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안식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안식이 아닙니다.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멍에를 메고 얻는 안식입니다.
멍에는 소나 말의 목에 얹어서 수레나 쟁기를 끌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도구입니다.
짐승들이 평생 짐을 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목에 씌우는 나무 막대기가 멍에입니다.
그 멍에에 무거운 짐을 얹으면 짐승들은 숨통이 막혀서 호흡이 곤란해지고 심할 경우에는 질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짐승들은 말 그대로 뼈가 빠지도록 일하기 위해서 멍에를 메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멍에를 멘 짐승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멍에를 메고 고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해도 해도 일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짐을 벗겨 주겠다고 하시거나 벗어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멍에를 매어라고 하십니다.
그 멍에는 예수님이 지신 멍에입니다.
이 멍에는 하나님의 다스림 밑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씌워주시는 새로운 멍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멜 때에 세상의 죄짐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기 위하여 멍에 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방법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나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폭군이 아니기 때문에 힘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자원하여 기쁨으로 하게 하실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정죄함의 율법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은혜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시므로 예수 안에서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율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요8:34-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로이 캄타넬라의 이런 詩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일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허함을 배우도록.
나는 건강을 부탁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허약함을 선물 받았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부유함을 원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가난함을 받았다.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나는 힘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열등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하찮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로이 캄타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줄 알았는데, 결국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겸손함을 받았습니다.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았습니다.
열등함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행항공술의 선구자인 핸드리 페이지가 많은 관중이 모인 가운데 에어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계속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살펴보았더니, 놀랍게도 생쥐 한 마리가 전선을 갉아대고 있었습니다. 전선이 끊기거나 합선이 되면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 뻔했습니다.
순간 페이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 그리고 더 높이 날아오르자! 비행기가 고공으로 치솟아 오르자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산소부족으로 쥐가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비행도 전선을 갉아대는 생쥐들로 위협받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더 높이 날아오르면 더 이상 생쥐들이 갉아대지 못합니다. 거기에 승리와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쉼을 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에 예수님께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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