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당신의 삶은 최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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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07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히브리서 12:1-3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당신의 삶은 최고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만나 함께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짧은 기간인데 제가 없는 동안에 남대문도 지키지 못하여 불타 버리고 우리 교회 일용한 양식의 공급처인 극동 슈퍼마켓도 문을 닫아 버리고 참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돌아오기가 싫어 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 보니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금요일 교회에 올라와보니 어저께가 보름이라고 하였는데 온 교회가 훤하였습니다.
우리 여선교회 회원들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는지 그 증거가 금요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종들의 기도를 다 들었다고 하시며 성령으로 뜨겁게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새벽 재단을 인도하시는 분들이 은혜롭게 잘 하셨는지 오늘 새벽 기도회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이런 분들의 헌신을 통하여 제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몇 달을 더 있다가 아예 지금까지 한 번도 못해본 안식년 한 일 년을 보내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는 달려가야 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지키는 절기 중 가장 중요한 절기는 우리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일입니다.
그중 부활절을 앞두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며 지내는 사순절이 지난 6일 설날 연휴와 함께 시작된 줄 몰랐죠
많은 교회들이 40일 작정기도, 특별새벽기도, 금식, 헌신 등을 통해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이 가운데서 은혜가 충만 할 줄로 믿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의 전 주일인 종려주일까지의 주일을 뺀 40일 동안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기간에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영적인 부분을 돌아보고 영적으로 회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내 자신을 내어 놓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본문에서도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하자 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보고 생각하는데 너무나도 은혜가 많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 자신에 매여 있던 한계를 벗어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나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고 그리고 죄인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고 있었던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을 살펴볼까요?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어떤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시꾼은 오른손에 낚싯대를 들고 왼손에는 자를 들고 있었습니다. 낚시꾼은 고기를 잡을 때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자로 물고기 길이를 재보았습니다. 고기가 자의 길이보다 크면 버리고 작으면 그릇에 담았습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낚시꾼은 우리 집 프라이팬은 이 자만합니다. 프라이팬보다 더 큰 것은 볶아먹을 수 없어서요. 라고 대답했습니다.제한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 베드로는 자신의 잣대로 고기를 잡으려고 그렇게도 애 썼지만 결국은 주님의 잣대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 하실 때에 제발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간청을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승이 그 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할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엄히 책망을 하시되 저는 사단이야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바로보고 생각을 하십니까?
한번은 우리 신실이가 어떤 여학생이 자꾸만 자기를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해답이 왔습니다.
그 여학생이 찾아오더니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혹시 차이나 아니냐고 묻는 다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동족의 학생이 그리웠으면 자수아를 신실이를 쳐다보았겠습니까?우리가 먼저 바라보는 바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하는 데에는 그 만큼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세상을 승리한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이러므로 라는 접속사는 11장의 말씀과 12장의 말씀을 연결시켜 준다. 11장에 나타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선구자들이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에게도 자신들의 상황에서 신앙의 자리를 흔들었던 수많은 사건과 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이겨내었다고 하는가?
‘믿음으로’ 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렐루야!
믿음으로 믿음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해를 보고 자라면 해바라기가 되고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 가면 주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은, 믿음으로 모세는, 믿음으로 다윗은, 믿음으로 사무엘은 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 믿음으로 살았다고 우리에게 끝까지 신앙의 자리를 지킨 믿음의 선배들은 계속된다. 믿음으로 바울은, 믿음으로 디모데는 믿음으로 야고보는, 믿음으로 베드로는, 믿음으로 속사도 폴리갑은, 믿음으로 손양원 목사는 믿음으로 주기철 목사는 믿음으로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그리고 믿음으로 나 아무개는 이라고 기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생활이란 그냥 쉽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는 쉽게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강한데 세상이 그냥 여러분들이 쉽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깨달은 자는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면 되겠지 아닙니다.
우리에게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의 자리를 흔드는 고난과 핍박과 유혹에 내가 적극적으로 맞섬으로 믿음의 선배들처럼 오늘 누구누구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평가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의 선배들은 나의 신앙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나갔던 선배,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달려갔던 선배,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켜갔던 선배,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감사함과 기쁨으로 이겨내었던 선배, 그런 선배를 보고, 듣고, 그 선배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가?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어떤 전통을 자랑하는가?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것인가? 단순히 년수가 되어 얻는 직분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통은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던 믿음의 선배들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우리 가운데 신앙에 반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반하는 자들로만 기억된다면 참으로 안타깝다고 할 것이다.
우리 가정에서도 역시 믿음의 조상하면 떠오르는 분이 계신가?
무릎 꿇고 울며 기도하셨던 어머니, 그토록 헌신 하시던 아버지로 형님 누나로 자리 매김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위해 충성 봉사했던, 힘에 지나도록 헌신했던,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헌신 했던 직계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 집안은 참 축복받은 가문이라 할 것입니다.
믿음은 경주자와 같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거추장스러운 것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로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거운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 세속적인 관심사나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또 얽매이기 쉬운 죄는 단단히 밀착하여 얽매는 것으로 성격적 결함, 쉽게 저지르는 죄나 끊을 수 없는 습관과 같은 고범 죄를 말합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주렁주렁 달고 신앙생활을 하니 무슨 골인 점에 언제나 도착하겠습니까?
담이나 뻘뻘 흘리고 힘들어서 못하겠다니 투덜투덜 거리기만 하지 않습니까?
본인도 말 할 것 없지만 옆에서 보는 자도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좀 벗어 버리세요
주님께 맡겨 버리세요 그러면 가벼워 질 것입니다.
제가 귀국했지만 아직 미국의 생활들이 이렇게 저렇게 저에게 짐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차 때문에 새벽에 1-2시에 깨어나서 육신은 피곤한데 머리에는 잠이 안 오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까지 기다리는데 얼마나 그 시간이 긴지 새벽 제단에 와서 말씀을 전하고 한 시간 기도하고 나니 얼마나 짐이 가벼워 졌는지 …….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안하겠느냐? 말입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좋은 일이 생기에 마련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좋은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그 앞에 잇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주의 즐거움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자는 낙심되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의 바라본다 는 동사는 화가가 그 모델을 세워놓고, 그 모델을 그릴 때, 그 모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주시하듯 오직 목표만을 뚜렷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의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하고 그 목숨조차 내어 놓으면서까지 그 신앙의 자리를 지키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발가 벗겨짐을 당하고, 온갖 모욕을 개의치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고통도, 부끄러움도 예수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혀 마음의 짐으로 다가 오지 않았다. 왜인가? 나중에 있을 즐거움 때문입니다.
어떤 즐거움인가? 순전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무리 살펴봐도 자랑할 것 전혀 없는 죄인인 한 성도 한 성도가 구원받게 될 것을 바라보니 즐거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목회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한 성도가 바로 서는 것을 볼 때에 그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시면 서도 오늘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기뻤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자 그 가시관이 그 머릿속으로 쑥 들어가 큰 고통과 함께 피를 흘려도 오늘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즐거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홍포를 입으시며 놀림을 당해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며 한 걸음 한 걸음 떼시기 힘이 드셨지만 그래도 다시금 일어나 골고다 언덕길을 가셨던 것은 바로 오늘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고된 것이 고된 것이 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손과 발목에 대못을 박히시면 서도,옆구리에 창으로 찔렸어도,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고, 숨이 가파 올라 죽을 지경이 되었어도, 죄인인 내가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니 십자가의 고통과 모진 부끄러움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고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보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만큼, 예수님께서 당했던 수치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내 자존심이 심하게 뭉개졌다고 해도, 나의 권위가 땅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우리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만 바라보면 능히 참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오히려 기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나 같은 자도 온전하게 하십니다.
19세기 대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에게 하루는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네 라고 했습니다.
왜 나에게도 그렇게도 낙담이 많은 것입니까?
지금도 낙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요 돈이 없어서 일이 제대로 안되어서 그것이 그렇게 되어도 낙담은 또 찾아옵니다.
왜 내 생애에 결실이 없습니까?
낙담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갈6:9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할렐루야!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하는 그 순간 성령이 충만하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에게 용서와 화해의 기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이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 복된 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만나 함께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짧은 기간인데 제가 없는 동안에 남대문도 지키지 못하여 불타 버리고 우리 교회 일용한 양식의 공급처인 극동 슈퍼마켓도 문을 닫아 버리고 참 실망이 큽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돌아오기가 싫어 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 보니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금요일 교회에 올라와보니 어저께가 보름이라고 하였는데 온 교회가 훤하였습니다.
우리 여선교회 회원들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는지 그 증거가 금요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여종들의 기도를 다 들었다고 하시며 성령으로 뜨겁게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새벽 재단을 인도하시는 분들이 은혜롭게 잘 하셨는지 오늘 새벽 기도회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이런 분들의 헌신을 통하여 제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몇 달을 더 있다가 아예 지금까지 한 번도 못해본 안식년 한 일 년을 보내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는 달려가야 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지키는 절기 중 가장 중요한 절기는 우리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일입니다.
그중 부활절을 앞두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며 지내는 사순절이 지난 6일 설날 연휴와 함께 시작된 줄 몰랐죠
많은 교회들이 40일 작정기도, 특별새벽기도, 금식, 헌신 등을 통해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이 가운데서 은혜가 충만 할 줄로 믿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의 전 주일인 종려주일까지의 주일을 뺀 40일 동안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기간에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영적인 부분을 돌아보고 영적으로 회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내 자신을 내어 놓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본문에서도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하자 라고 하였습니다.
바라보고 생각하는데 너무나도 은혜가 많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 자신에 매여 있던 한계를 벗어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나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고 그리고 죄인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고 있었던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을 살펴볼까요?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어떤 낚시꾼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시꾼은 오른손에 낚싯대를 들고 왼손에는 자를 들고 있었습니다. 낚시꾼은 고기를 잡을 때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자로 물고기 길이를 재보았습니다. 고기가 자의 길이보다 크면 버리고 작으면 그릇에 담았습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낚시꾼은 우리 집 프라이팬은 이 자만합니다. 프라이팬보다 더 큰 것은 볶아먹을 수 없어서요. 라고 대답했습니다.제한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 베드로는 자신의 잣대로 고기를 잡으려고 그렇게도 애 썼지만 결국은 주님의 잣대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이 자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 하실 때에 제발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간청을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승이 그 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할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은 엄히 책망을 하시되 저는 사단이야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바로보고 생각을 하십니까?
한번은 우리 신실이가 어떤 여학생이 자꾸만 자기를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드디어 해답이 왔습니다.
그 여학생이 찾아오더니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혹시 차이나 아니냐고 묻는 다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동족의 학생이 그리웠으면 자수아를 신실이를 쳐다보았겠습니까?우리가 먼저 바라보는 바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하는 데에는 그 만큼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세상을 승리한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이러므로 라는 접속사는 11장의 말씀과 12장의 말씀을 연결시켜 준다. 11장에 나타나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선구자들이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에게도 자신들의 상황에서 신앙의 자리를 흔들었던 수많은 사건과 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이겨내었다고 하는가?
‘믿음으로’ 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렐루야!
믿음으로 믿음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해를 보고 자라면 해바라기가 되고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 가면 주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은, 믿음으로 모세는, 믿음으로 다윗은, 믿음으로 사무엘은 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 믿음으로 살았다고 우리에게 끝까지 신앙의 자리를 지킨 믿음의 선배들은 계속된다. 믿음으로 바울은, 믿음으로 디모데는 믿음으로 야고보는, 믿음으로 베드로는, 믿음으로 속사도 폴리갑은, 믿음으로 손양원 목사는 믿음으로 주기철 목사는 믿음으로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그리고 믿음으로 나 아무개는 이라고 기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생활이란 그냥 쉽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는 쉽게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강한데 세상이 그냥 여러분들이 쉽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깨달은 자는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면 되겠지 아닙니다.
우리에게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의 자리를 흔드는 고난과 핍박과 유혹에 내가 적극적으로 맞섬으로 믿음의 선배들처럼 오늘 누구누구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평가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의 선배들은 나의 신앙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나갔던 선배,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달려갔던 선배,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켜갔던 선배,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감사함과 기쁨으로 이겨내었던 선배, 그런 선배를 보고, 듣고, 그 선배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가?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어떤 전통을 자랑하는가?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것인가? 단순히 년수가 되어 얻는 직분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통은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던 믿음의 선배들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우리 가운데 신앙에 반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반하는 자들로만 기억된다면 참으로 안타깝다고 할 것이다.
우리 가정에서도 역시 믿음의 조상하면 떠오르는 분이 계신가?
무릎 꿇고 울며 기도하셨던 어머니, 그토록 헌신 하시던 아버지로 형님 누나로 자리 매김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위해 충성 봉사했던, 힘에 지나도록 헌신했던,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헌신 했던 직계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 집안은 참 축복받은 가문이라 할 것입니다.
믿음은 경주자와 같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거추장스러운 것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로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거운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 세속적인 관심사나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또 얽매이기 쉬운 죄는 단단히 밀착하여 얽매는 것으로 성격적 결함, 쉽게 저지르는 죄나 끊을 수 없는 습관과 같은 고범 죄를 말합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주렁주렁 달고 신앙생활을 하니 무슨 골인 점에 언제나 도착하겠습니까?
담이나 뻘뻘 흘리고 힘들어서 못하겠다니 투덜투덜 거리기만 하지 않습니까?
본인도 말 할 것 없지만 옆에서 보는 자도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좀 벗어 버리세요
주님께 맡겨 버리세요 그러면 가벼워 질 것입니다.
제가 귀국했지만 아직 미국의 생활들이 이렇게 저렇게 저에게 짐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차 때문에 새벽에 1-2시에 깨어나서 육신은 피곤한데 머리에는 잠이 안 오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까지 기다리는데 얼마나 그 시간이 긴지 새벽 제단에 와서 말씀을 전하고 한 시간 기도하고 나니 얼마나 짐이 가벼워 졌는지 …….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안하겠느냐? 말입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좋은 일이 생기에 마련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좋은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그 앞에 잇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주의 즐거움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자는 낙심되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의 바라본다 는 동사는 화가가 그 모델을 세워놓고, 그 모델을 그릴 때, 그 모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주시하듯 오직 목표만을 뚜렷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의 그 모진 고통을 감내하고 그 목숨조차 내어 놓으면서까지 그 신앙의 자리를 지키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발가 벗겨짐을 당하고, 온갖 모욕을 개의치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고통도, 부끄러움도 예수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혀 마음의 짐으로 다가 오지 않았다. 왜인가? 나중에 있을 즐거움 때문입니다.
어떤 즐거움인가? 순전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무리 살펴봐도 자랑할 것 전혀 없는 죄인인 한 성도 한 성도가 구원받게 될 것을 바라보니 즐거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목회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한 성도가 바로 서는 것을 볼 때에 그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시면 서도 오늘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기뻤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자 그 가시관이 그 머릿속으로 쑥 들어가 큰 고통과 함께 피를 흘려도 오늘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즐거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홍포를 입으시며 놀림을 당해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며 한 걸음 한 걸음 떼시기 힘이 드셨지만 그래도 다시금 일어나 골고다 언덕길을 가셨던 것은 바로 오늘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고된 것이 고된 것이 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손과 발목에 대못을 박히시면 서도,옆구리에 창으로 찔렸어도, 구원 받을 이를 생각하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마르고, 숨이 가파 올라 죽을 지경이 되었어도, 죄인인 내가 구원받을 것을 생각하니 십자가의 고통과 모진 부끄러움을 전혀 개의치 않으셨고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보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만큼, 예수님께서 당했던 수치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내 자존심이 심하게 뭉개졌다고 해도, 나의 권위가 땅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우리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만 바라보면 능히 참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오히려 기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나 같은 자도 온전하게 하십니다.
19세기 대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에게 하루는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네 라고 했습니다.
왜 나에게도 그렇게도 낙담이 많은 것입니까?
지금도 낙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요 돈이 없어서 일이 제대로 안되어서 그것이 그렇게 되어도 낙담은 또 찾아옵니다.
왜 내 생애에 결실이 없습니까?
낙담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갈6:9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할렐루야!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하는 그 순간 성령이 충만하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에게 용서와 화해의 기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이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 복된 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