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의 결단에 함께 참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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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02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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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 1-10예수님의 고난의 결단에 함께 참여 합시다
미국 켈리포니아주 얼바인시에 소재한 샘물교회 홍집사님은 가정일로 쇼크로 7년 동안 몸져 누워있었으며 9년 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2월 달에 예배를 드리는 중에 찬양과 더불어 말문이 열렸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특송을 하게 되었는데 그 찬양이 이러하였습니다.
136장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 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아마 그가 지난 온 자신의 인생의 여정을 볼 때에 내가 과연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가?
마냥 세상에서만 있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의 사건과 나와 상관이 있었는가?
새삼 나 자신을 생각게 하는 찬송이 된 줄로 여겨집니다.
이번 한 주간은 내 인생에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경험을 하는 기회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나를 위하여 십자가을 지신 그 고난의 현장을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고 그 십자가 현장에 주님과 함께 하는 축복의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그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하시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간의 첫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사야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며,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부활의 승리를 예견하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백성들이 이날 이런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든 것은 종려나무가 승리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를 승리의 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을 종려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이 시간에 나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맛보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다 승리하는 자로 보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택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내 생활에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승리의 찬양이 울려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그 만왕의 왕이고 만 주의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그 은혜를 다 받게 하시려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따라 왕의 차림을 하십니다. 왜 승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왕이 타고 가실 말이 필요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구하지 않으시고 나귀 그 것도 어린 것을 구하였습니다.
맞은편 마을 동네에 제자를 보내어 아직 사람이 탄 적이 없는 나귀가 매여 있으니 풀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태까지 예수님이 남의 무엇을 가진 적이 결코 없으십니다. 그런 제자들은 염려가 되었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가 누구십니까? 만왕의 왕이십니다.
어떻게 그 곳에 나귀가 있는 줄 아시며 또한 그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을 볼 수 있느냐 말입니다.
만 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곳에 가니 나귀가 매여 있었고 푸니 그 주인이 왜 이리하느냐 물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러 준대로 말하였더니 허락하였다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일을 볼 때에 예수님은 참으로 왕이십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나귀를 데려오는 것이 허락이 되고 보니 참으로 만유의 주인이심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왕이 아니라 자비하시고 인자가 많으신 겸손한 왕이십니다. 할렐루야!
왜요? 백마를 구하지 않으시고 나귀를 구하시고 그것도 어린 것을 구하셨습니다.
도저히 왕의 용모하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예루살렘성 문에서 아이들이 나귀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별로 폼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하시기 때문에 나귀가 더 어울리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면 그 사람의 인격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교만해야 폼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몇몇 사람 있습니다.
말도 교만히 해야 하고 행동도 교만히 행해야하고 물론 생각도 교만을 품어야 자신이 겨우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은 겸손한 것이 오히려 나에게 어울리는 것입니다.
교만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는 그의 글에 예수님의 겸손함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이니라
나귀에서 무슨 위엄이나 권력의 위용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타면은 웃음거리가 될 것만 같아 제 자신도 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볼 때에 왕이라는 자가 나귀를 타고 기우뚱 기우뚱 하며 타고 들어오는 것을 볼 때에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소화시키시고 감당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이들과 잘 놀라주지 못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어떤 어른은 자신의 어른이라는 지위를 내려놓고 잘 놀아 주는 어른이 진정한 어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소화시키지 못하는 가난한자 병든 자 나그네 고아 아이 죄인과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친구가 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한 사람 감당하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는 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만왕의 왕으로서의 온 세상의 권력을 다 가졌지만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데 사용 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의 모든 권위를 죄인 된 나를 위하여 다 주시는 그런 왕이십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동 반장만 해도 대단하게 여기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데 말입니다.
이제 이런 겸손하신 만왕의 왕이 나를 위하여 오심을 믿으시고 이 예수님과 함께 하심으로 날마다 왕의 권세를 누리며 세상을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예수님으로 왕으로 인정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에게는 아주 좋지 못한 죄의 종 된 근성이 남아서 인격적으로 순리적으로 은혜로 다스려 주면 받아 들이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겸손하게 그리고 섬김으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온유하게 할 때에 과연 몇 명이나 믿고 따랐는가? 입니다.
죄의 근성 종의 근성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거기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 주어 그곳에 종이 되어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의 로마 병사들은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기도 하고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옥중에 가둬 매를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정복한 권력을 그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인의 권력은 오로지 로마인을 위한 것입니다.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많은 식민지와 민족을지배하여 소위 로마의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이 평화는 무자비한 정복과 탄압으로 점철된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자비한 힘으로 내리 누르고 식민지 백성들이 주눅 들어서 아무런 저항을 못하는 것을 그들은 평화로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익숙한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는 주눅이 들어 있고 돈의 기세에 꼼짝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아주 종이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겸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주는 평화는 세상이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요14:27).
그런데 이스라엘인은 로마 사람들을 위협에 겁을 먹고 따랐지 겸손과 온유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어떤 왕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기를 원하십니까?
폭행과 억압과 심판과 진노로 나의 인격을 무시하고 다스려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마 그렇다면 아무도 살아남아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만나려 갈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기를 원하느냐?
고전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왜 나는 순리적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하느냐? 말입니다.
꼭 무슨 풍랑과 환난을 통하여만 예수님을 인정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범사에 그를 인정하시겠습니까?
범사에 주를 인정하라 그러하면 하나님도 너를 인정하시리라 할렐루야!
눅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제 범사에 주를 모른 체하고 외면하는 삶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왕으로 인정 하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왕의 역사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들은 왕의 대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종려가지를 꺾어서 깔고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호산나라고 하였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시야 나(hoshiya na)라는 말을 헬라 식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후에는 구원의 희망을 표현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호산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아우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왕으로 인정한 예수는 로마 병사를 내 몰고 이스라엘을 새롭게 건국시키지 못하고 로마 병사에 붙잡혀온갖 모욕과 치욕을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을까요? 왕의 지위를 누리려고만 했지 왕으로의 사역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세상이 변화되기만을 원했지 실상 자신들은 변화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왕으로의 사역에 나서야 하며 내가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만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내 옛 사람이 함께 못이 박히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못 박히신 줄로 여기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만 못 박히신 것으로 여기면 바로 당신은 예수님을 죽인 죄에서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파는 가륫인 유다보다 낳을 것이 없고 십자가에 못을 박은 로마 병사요 죽음의 자리에 내어 놓은 종교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만 못을 박은 줄 알고 자신들은 살아서 있으니 예수를, 감히 구약에 예언된 왕을 참칭한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이제 이 고난 주간은 예수님이 못을 박고 죽으신 것으로만 알지 말고 내 옛 사람이 못이 박히는 것이고 죽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내가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별로 능력이 없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니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듭니까?
감정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내가 내 감정대로 살아가니 얼마나 상처가 많습니까?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지식 그것도 불완전 한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고 다니니 얼마나 실패가 많습니까?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 되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씨앗은 뿌리지 않고 맛있는 사랑의 열매를 수확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쉽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이 땅에서 잘 살고 천국에서 큰 상금과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옳지 않으며 비 성경적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와 가정과 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 사랑의 고난을 결단하고 즐겁게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과 복을 받음으로서 우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 자신도 큰 복과 상과 영광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왜 나귀가 여기에 인물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주님은 이 나귀를 찾으시고 이 나귀를 이용하시고 그리고 이 나귀는 주님의 영광에 참여 한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종교 개혁자 존 칼빈 선생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의 모습에서 아! 나의 그림이구나! 그래서 선생의 삶의 모토(motto 좌우명)가 나는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다 라고 했습니다.
미쯔노 겐죠 라는 사람은 누워서만 지내는 사람입니다. 손발, 엄지발가락도 움직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말도 못합니다. 의사 표시를 한다면 귀로 말은 들을 수 있는데 눈빛으로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 비참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이 오신 후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벌떡 일어 난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 순간부터 참으로 주를 위한 사람으로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어머니와 의사 표현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눈빛으로 단어 하나 만드는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내 불쌍한 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글을 보고 엄마도 감사해서 울고 그래서 만든 시집이 세 권이나 나왔어요.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하는 책에 저렇게도 라는 찬양 시인데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는데
죄를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까 죄를 슬퍼하지 않아도 좋을까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을 사랑 하시여 피 흘려 괴로워하시는데
회개하지 않아도 좋을까 회개하지 않아도 좋을까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주 예수께서 저렇게도 우리들을 구원하시려 어제도 오늘도 부르시는데
주님께로 가지 않아도 좋을까 주님께로 가지 않아도 좋을까
이와 같은 노래가 평생 누워서 지내는 사람들의 입에서,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쓰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무슨 굉장한 일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오셔서 나를 주님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내 모습 이대로 왕의 사역에 드려지시기 바랍니다. 왕의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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