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통하여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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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765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11: 1-10당신을 통하여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소망교회 장로인 참존 화장품 김광석 회장은 한때 그는 서울 중구에서 피보약국을 운영하며 하루 매출이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값이었을 정도로 잘나가던 사업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제조한 약을 다른 약국에 판매한 무허가 제조로 보건 단속범죄로 엄청난 벌금 선고를 받고는 양산 통도사 암자에 숨어들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승복을 입고 살 정도로 불가의 가정에서 자라고 그 역시 서울 근교에 절을 지어 봉헌을 하고, 불교 신도 회장을 지낸 그에게는 이런 처지가 찾아오자 하루는 자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하고 그 곳 암자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산에서 내려와 자수를 하고, 빚더미 위에서 참존 이라는 화장품 회사를 세웠는데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데 당시의 화장품 시장은 여리고성처럼 견고했는데 계속되는 적자 속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피부에 전혀 끈적거림이 없는 클린싱 워터를 개발했고 30만개의 샘플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샘플만 써 봐도 알아요 이것이 홍보 문구였습니다. 그 가운데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했습니다.
사업은 비록 어렵지만 십일조가 아닌 십이조를 드리기로 하고 그 대신 매출을 두 배로 늘려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은 과연 그에게 물 붓듯이 물질을 내려주시는데 클린싱 워터는 당시에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순식간에 매출이 배가 아니라 수십 배로 증가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그의 인생관이 바꾸어졌습니다.
그의 간증을 담은 책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에서 그는 주가 사용하시겠다면, 무엇이든지 주를 위하여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기업인들에게 사업성공의 3대 비결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온전한 십일조다. 사업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매주 십일조를 드려라.
두 번째는 새벽기도다. 하나님께서는 미명에 지혜를 주신다.
세 번째는 청지기 정신이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나는 CEO 즉 경영자 일 뿐이다. 나는 주가 쓰시는 도구 일뿐이다 라 는 이런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틀림없이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신도회장을 하나님은 불러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불러 사용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도 자신의 모습에서 더 이상 귀하게 사용될 수 없는 나귀가 예수께 사용됨으로서 만왕의 왕이 사용하시는 귀한 존재로 변신되었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짐이나 싣고 갈 나귀가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모시는 귀하신 몸이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 어떤 모양으로 보아도 나는 벌 볼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혹시 있다면, 더 이상 나는 소망이 없어 라고 여겨진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예수께 사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과 같이 팔자를 고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신분이 다시 업그래드 되는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주인 의식을 바꾸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모든 주권을 주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다 는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실 내가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스가랴의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서 나귀을 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주중에는 나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나귀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맞은편 마을에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한다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 여러분의 소유, 인격, 더 나아가 생명도 주님이 쓰시겠다는 데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이 나가서 나귀를 끌고 들어왔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주인이 나귀를 왜 내어주었을까요?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나귀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실제 주인이 있어서 어디로 가져가려느냐고 질문하였을 때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그냥 허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주인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자신이 주인이지만 실제로는 만주의 주가 주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은 굉장히 강력한 말씀입니다.
한편, 주님이 쓰신다고 할 때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교회 건물 매입을 하면서 한 가지 큰 은혜를 받았는데 누구나 보고 하는 말이 주님이 쓰시겠다니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뒤 사정을 보지 않고 일단 내어 놓으시라니까요?
오히려 이것저것 핑계 되는 것이 합당치 않는 것입니다.
지난 철야 기도회에 한 청년이 기도에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지 말고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할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긍정적인 그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는데 이 자리에 그 누구도 할 수가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을 차단하는 말입니다.
부정적인 말이 들어가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이 쓰려고 하는 것을 바로가 막으려고 몸부림쳤지만 그것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실 때 겸손이 그분 앞에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내 시간을 쓴다고 할 때 막을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저는 내 청춘이 어느 순간에 보니 다 지내 갔더라고요
이제 힘이 난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있는 힘을 잘 보존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속히 상함니다.
우리 집사람을 보아도 이제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없어요 있는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청춘을 하나님이 쓰신 것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말씀했습니다.
내 청년 내가 무엇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주께 사용되어 진 거야라고 말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써보았자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남자도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의 태(胎)를 쓴다고 하실 때 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겠습니까?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주의 계집종이오니 그리하옵소서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그 행위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나야가 아니라 이왕이면 나를 써 주십시오 이게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 어려운 때에 왜 하지 마시고 지금이때에 사용 하십시오 라고 해야 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기 위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방문해서 헌금을 작정하는데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장로님, 부자시죠. 건축헌금 좀 하시죠? 뭐가 있어야지요. 일산에 빌딩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큰 아들 것인데요. 분당에도 빌라가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작은 아들 거 에요. 파주에 산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손자 거 에요. 강남에 집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내 거 에요.
그 때 목사님 이 나오면서 혼잣말로 다 있는데 하나님 몫만 없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는 항상 내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것은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자신의 것은 있지만 하나님의 것은 항상 없습니다.
성도의 권리는 순종의 권리만 있을 뿐입니다.
수제자라 할 베드로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예수님께 하는 말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는 안 됩니다.
아닙니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아니냐 내 것이야 내 몫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겠지요 아니야 이 길 밖에 없어
나중에 하시면 어떻습니까? 아니냐 지금이야
자기 합리화로 하나님의 뜻에 거스른 그 자체가 나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16:21-23) 어찌 이일을 거스를 수가 있으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18세기의 독일의 화가 슈텐베르그(Stenberg)가 고향의 시장터를 지나가고 있을 때 한 소녀가 길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려 자기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 춤추는 집시 소녀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그리는 중에 그 모녀가 모델로 화실에 앉아 있으면서 슈텐베르그가 그려 놓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호기심을 갖고 스텐베르그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지독한 못된 짓을 해서 저렇게 못 박혔나 보지요? 그러자 슈텐베르그는 아니다. 저 사람은 훌륭한 분이야. 저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분이지 그러자 그 소녀는 묻기를 그럼 그 분은 당신을 위해서도 죽으셨나요? 이 때 슈텐베르그는 큰 충격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십자가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후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그림 밑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나 너를 위해 죽었건만 너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 는 의식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명제(命題)가 있어야 합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부르신 목적에 나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영광의 입성을 위해 보이지 않는 한 무명의 헌신 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타신 나귀의 주인입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달라고 했을 때 주인은 당신들은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시오? 물었을 때, 제자들은 예, 우리 선생님께서 이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귀 주인이 순순히 그 나귀를 내어놓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헌신입니까?
구원의 주, 생명의 주, 구속의 주가 쓰시겠다니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 혹은 주님이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고 남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너무나 쉽게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큐리오스라는 말로 고백했던 이 말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인생도, 나의 가진 것도, 나의 모든 것도 다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그의 계획도 접고, 그의 욕심도 접고, 그것을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주를 위함에 내 존재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지옥은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루소는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쓰신 나귀는 많은 나귀들 중에 선택받은 나귀였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순간 그 나귀는 위치가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거부하지 않고 주님 손에 내드리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순종을 주님이 받으시기만 한다면 보잘것없는 나귀,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위험한 나귀 왕이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입성케 하는 데는 최고의 도구로 쓰임 받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경험이 없어 두려워합니까?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까?
보잘것없는 것이라 생각합니까? 주님 손에 드리십시오. 주님 손에 드리면 주님이 하십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를 다루시고 쓰신 주님의 능력을 의뢰하고 주께 드리십시오.영어 속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십자가와 고난 뒤에도 부활의 영광과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주께 드려져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의 드린 것을 잘 사용하실 것입니다.
아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나귀가 풀려나서 예수님을 등에 태우면 나귀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죠?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영광을 받으실 때 나귀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가족들의 면회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고 자신이 이 풀을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풀은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주를 위해 드려지는 자는 결코 죽는 자 같지만 살게 되고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 인생을 새롭게 살아 갈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주저하지 말고 주를 위하여 담대해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삶이 참으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소망교회 장로인 참존 화장품 김광석 회장은 한때 그는 서울 중구에서 피보약국을 운영하며 하루 매출이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값이었을 정도로 잘나가던 사업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제조한 약을 다른 약국에 판매한 무허가 제조로 보건 단속범죄로 엄청난 벌금 선고를 받고는 양산 통도사 암자에 숨어들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승복을 입고 살 정도로 불가의 가정에서 자라고 그 역시 서울 근교에 절을 지어 봉헌을 하고, 불교 신도 회장을 지낸 그에게는 이런 처지가 찾아오자 하루는 자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하고 그 곳 암자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산에서 내려와 자수를 하고, 빚더미 위에서 참존 이라는 화장품 회사를 세웠는데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데 당시의 화장품 시장은 여리고성처럼 견고했는데 계속되는 적자 속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피부에 전혀 끈적거림이 없는 클린싱 워터를 개발했고 30만개의 샘플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샘플만 써 봐도 알아요 이것이 홍보 문구였습니다. 그 가운데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했습니다.
사업은 비록 어렵지만 십일조가 아닌 십이조를 드리기로 하고 그 대신 매출을 두 배로 늘려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은 과연 그에게 물 붓듯이 물질을 내려주시는데 클린싱 워터는 당시에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순식간에 매출이 배가 아니라 수십 배로 증가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그의 인생관이 바꾸어졌습니다.
그의 간증을 담은 책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에서 그는 주가 사용하시겠다면, 무엇이든지 주를 위하여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기업인들에게 사업성공의 3대 비결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온전한 십일조다. 사업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매주 십일조를 드려라.
두 번째는 새벽기도다. 하나님께서는 미명에 지혜를 주신다.
세 번째는 청지기 정신이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나는 CEO 즉 경영자 일 뿐이다. 나는 주가 쓰시는 도구 일뿐이다 라 는 이런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틀림없이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신도회장을 하나님은 불러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불러 사용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도 자신의 모습에서 더 이상 귀하게 사용될 수 없는 나귀가 예수께 사용됨으로서 만왕의 왕이 사용하시는 귀한 존재로 변신되었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짐이나 싣고 갈 나귀가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모시는 귀하신 몸이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 어떤 모양으로 보아도 나는 벌 볼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혹시 있다면, 더 이상 나는 소망이 없어 라고 여겨진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예수께 사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과 같이 팔자를 고치게 될 것입니다.
운명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신분이 다시 업그래드 되는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주인 의식을 바꾸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모든 주권을 주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다 는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실 내가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스가랴의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서 나귀을 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주중에는 나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나귀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맞은편 마을에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한다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이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 여러분의 소유, 인격, 더 나아가 생명도 주님이 쓰시겠다는 데에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이 나가서 나귀를 끌고 들어왔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주인이 나귀를 왜 내어주었을까요?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나귀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실제 주인이 있어서 어디로 가져가려느냐고 질문하였을 때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그냥 허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주인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자신이 주인이지만 실제로는 만주의 주가 주인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은 굉장히 강력한 말씀입니다.
한편, 주님이 쓰신다고 할 때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교회 건물 매입을 하면서 한 가지 큰 은혜를 받았는데 누구나 보고 하는 말이 주님이 쓰시겠다니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뒤 사정을 보지 않고 일단 내어 놓으시라니까요?
오히려 이것저것 핑계 되는 것이 합당치 않는 것입니다.
지난 철야 기도회에 한 청년이 기도에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지 말고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할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긍정적인 그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는데 이 자리에 그 누구도 할 수가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을 차단하는 말입니다.
부정적인 말이 들어가 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이 쓰려고 하는 것을 바로가 막으려고 몸부림쳤지만 그것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실 때 겸손이 그분 앞에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내 시간을 쓴다고 할 때 막을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저는 내 청춘이 어느 순간에 보니 다 지내 갔더라고요
이제 힘이 난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있는 힘을 잘 보존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속히 상함니다.
우리 집사람을 보아도 이제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없어요 있는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청춘을 하나님이 쓰신 것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말씀했습니다.
내 청년 내가 무엇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주께 사용되어 진 거야라고 말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써보았자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남자도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의 태(胎)를 쓴다고 하실 때 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겠습니까?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주의 계집종이오니 그리하옵소서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그 행위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나야가 아니라 이왕이면 나를 써 주십시오 이게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 어려운 때에 왜 하지 마시고 지금이때에 사용 하십시오 라고 해야 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기 위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방문해서 헌금을 작정하는데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장로님, 부자시죠. 건축헌금 좀 하시죠? 뭐가 있어야지요. 일산에 빌딩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큰 아들 것인데요. 분당에도 빌라가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작은 아들 거 에요. 파주에 산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손자 거 에요. 강남에 집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내 거 에요.
그 때 목사님 이 나오면서 혼잣말로 다 있는데 하나님 몫만 없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는 항상 내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것은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자는 자신의 것은 있지만 하나님의 것은 항상 없습니다.
성도의 권리는 순종의 권리만 있을 뿐입니다.
수제자라 할 베드로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예수님께 하는 말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는 안 됩니다.
아닙니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아니냐 내 것이야 내 몫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겠지요 아니야 이 길 밖에 없어
나중에 하시면 어떻습니까? 아니냐 지금이야
자기 합리화로 하나님의 뜻에 거스른 그 자체가 나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16:21-23) 어찌 이일을 거스를 수가 있으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18세기의 독일의 화가 슈텐베르그(Stenberg)가 고향의 시장터를 지나가고 있을 때 한 소녀가 길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려 자기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 춤추는 집시 소녀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그리는 중에 그 모녀가 모델로 화실에 앉아 있으면서 슈텐베르그가 그려 놓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호기심을 갖고 스텐베르그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지독한 못된 짓을 해서 저렇게 못 박혔나 보지요? 그러자 슈텐베르그는 아니다. 저 사람은 훌륭한 분이야. 저 사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분이지 그러자 그 소녀는 묻기를 그럼 그 분은 당신을 위해서도 죽으셨나요? 이 때 슈텐베르그는 큰 충격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십자가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후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그림 밑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나 너를 위해 죽었건만 너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 는 의식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명제(命題)가 있어야 합니다.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부르신 목적에 나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영광의 입성을 위해 보이지 않는 한 무명의 헌신 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타신 나귀의 주인입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달라고 했을 때 주인은 당신들은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시오? 물었을 때, 제자들은 예, 우리 선생님께서 이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귀 주인이 순순히 그 나귀를 내어놓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헌신입니까?
구원의 주, 생명의 주, 구속의 주가 쓰시겠다니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 혹은 주님이라는 말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고 남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너무나 쉽게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큐리오스라는 말로 고백했던 이 말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인생도, 나의 가진 것도, 나의 모든 것도 다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그의 계획도 접고, 그의 욕심도 접고, 그것을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주를 위함에 내 존재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지옥은 할 일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루소는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쓰신 나귀는 많은 나귀들 중에 선택받은 나귀였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순간 그 나귀는 위치가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거부하지 않고 주님 손에 내드리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순종을 주님이 받으시기만 한다면 보잘것없는 나귀,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위험한 나귀 왕이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입성케 하는 데는 최고의 도구로 쓰임 받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경험이 없어 두려워합니까?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까?
보잘것없는 것이라 생각합니까? 주님 손에 드리십시오. 주님 손에 드리면 주님이 하십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를 다루시고 쓰신 주님의 능력을 의뢰하고 주께 드리십시오.영어 속담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십자가와 고난 뒤에도 부활의 영광과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주께 드려져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의 드린 것을 잘 사용하실 것입니다.
아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나귀가 풀려나서 예수님을 등에 태우면 나귀는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죠?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영광을 받으실 때 나귀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가족들의 면회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고 자신이 이 풀을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풀은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주를 위해 드려지는 자는 결코 죽는 자 같지만 살게 되고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 인생을 새롭게 살아 갈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주저하지 말고 주를 위하여 담대해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삶이 참으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