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은 믿고 행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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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8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출애굽기 14: 15-21 하나님의 구원은 믿고 행함에 있습니다.
지난주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시로 행정관급 이상 직원 350명에게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 한 권씩을 선물을 했습니다.
이 책은 영국의 처칠 전 총리의 외손녀 실리아 샌디스가 쓴 돌파의 CEO 윈스턴 처칠,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처칠의 의지를 담은 수많은 메모와 편지, 연설문, 일화 등을 기록한 것입니다.
1,2차 세계대전과 극심한 경제 불황, 불안하고 복잡한 외교안보 상황, 이념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의지로 영국 국민들을 끌어나간 처칠의 열정적인 리더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경제위기, 쇠고기 파동에 이어 최근 금강산, 독도 사태 등 새 정부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악재를 돌파해서 국정장악력과 대국민 지지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민들의 손으로 세운 대통령이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도록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We shall not fail)는 말은 전 유럽이 독일 수중에 떨어지던 1940년, 처칠이 하원에서 했던 연설에서 우리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지도자 처칠의 결단은 온 영국민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영국은 패배를 가져오지 않고 승리를 가져 왔습니다.오늘 본문에 지도자 모세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종살이 하던 애급에서는 나왔지만 축복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까지는 수많은 결단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가야 할 땅입니다.
백성들은 축복의 가나안을 원했지만 현실에 처한 환경은 그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하였습니다.
약속의 가나안은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축복의 바라면 약속도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축복은 바라보지만 약속은 못 믿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까?
그러면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에 갇혀 버렸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아 나아 갈 수가 없고 뒤로는 바로가 전열을 가다듬고 병거를 몰고 추격을 하고 좌우는 낭떠러지 벼랑으로 되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게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는 자들이 보는 시각입니다.
벌써 약속은 보이지 않고 현실만 보고 마음은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놓고서도 약속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급기야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자들도 생깁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고 애급에서 나오게 하였는가? 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이런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면에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사람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자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로 같이 언젠가는 죽을 일이 생깁니다.
죽겠다 죽겠다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죽기 싫어도 죽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부정 가운데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긍정의 믿음을 보이었습니다.
이게 지도자의 모습이요 앞에 서서 일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주의 교회도 이런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다가 길을 내어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말씀 앞에 약속 앞에 바다는 더 이상 무서운 장애거리가 아니라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홍해를 건넸는데 믿음이 없이도 잠을 자면서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 바다 밑으로 해저 터널을 뚫어 놓았기에 관광버스를 타고 땅속으로 건넜습니다.
당시는 터널도 없었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건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언제든지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는 믿음입니다.
13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상실입니다.
두려움은 지혜의 판단을 마비시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두려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떨어질까? 을 두려워하였습니다.
1930년 미국 경제대공황 중에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두려워 할 오직 한 가지는 두려움뿐이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는 유명한 대국민 연설을 남겼습니다.
두려움에서 온전한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은 인간 생존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도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정도를 지나친 두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과도한 두려움이 임하거든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즉각적으로 인지하셔야 합니다. 마귀는 두려움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두려움을 대적하십시오.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에게 나아오십시오.
여러분들은 크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주의 제단에 머물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을 염려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 못한 자라도 성전에 와서 제단의 뿔을 잡으면 모든 것이 다 유예가 되고 죽을죄도 유예가 되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다행스럽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10절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두려움으로 절망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모든 두려움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오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는 세상의 상황에서 전능자요 사랑이신 하나님께로 옮기는 기적의 시작입니다.
조그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철학자가 사공에게 철학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사공이 모른다고 하자 철학자는 인생의 3분의 1을 헛살았군요 라고 말한 후, 그럼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공이 모른다고 하자 철학자는 인생의 3분의 2를 헛살았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배가 급류에 휩싸여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사공이 헤엄칠 줄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철학자가 전혀 못한다고 하자 사공이 말하기를 선생님은 인생 전체를 헛살았군요 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의 최후의 발언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인생 헛살았다는 것입니다.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배위에서 인생을 논하고 있다니 헛 산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도 모르면서 인생살이를 논하다니 헛 산 것입니다.
헛살고 있는 사람 바로 나 자신이 아닙니까?
전도서 기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전도서 12장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두려운 세상이 보이고 두려워 떨고 있는 내가 보일 뿐입니다.
옛날 수도자들은 낮은 기도와 깊은 기도의 차이를 같은 유리지만 거울과 창의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낮은 단계의 기도에서는 거울처럼 아직도 자신의 고통, 자기의 소원, 그리고 자기의 욕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복이 제대로 되게 하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은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그것은 창과 같아서 거기에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창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할렐루야!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시더라도 받아 드립니다.
왜요 하나님이 만사를 주관하심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자꾸 말씀에 토를 달거나 자신의 입장만 변명하여 말하다보면 그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역사를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성도는 항상 말씀에 갈급해 있고 말씀에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받아 드립니다.
너희가 어찌 양식 아닌 것에 돈을 달아 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에 수고하느냐?
너는 내게 나아와 들어라 그리하면 내 영혼이 배 불림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믿는 자는 행함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주저주저 하고 있어야 합니까?
믿고 행함에 인생의 진전이 있습니다. 기적은 행동할 때 일어납니다.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앞은 바닷물인데 그 바다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저는 한 가지 은혜를 받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약속의 바다로 몰아넣으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들이 바다 가운데 발을 들여 놓을 때 바다 가운데 길이 열렸고 물이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습니다.믿음으로 행하면 바다에라도 길이 생깁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바다가 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바다는 항상 바다로 내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은 아직도 아무런 일이 없지 않습니까?
콜럼부스가 지구는 둥굴다는 믿음으로 행할 때 바다가 길이 되었지 않은가?
바다가 저 너머 끝이 있다고 믿었다면 결코 멀리 나아 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히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급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저희는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으며믿음으로 하지 않은 애급 사람들은 땅을 보고 들었는데 물이 몰려들어 오히려 바닷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신기하죠
인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가 수장이 됩니다.
내가 나아가는 길이 무슨 길입니까? 아직도 자신의 욕심에 매여 인생을 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서 내 인생을 엮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바다도 길이 되지만 믿음 없이 행하면 육지도 바다가 되어 물에 빠져 죽어요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습니까?
아직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이 확인이 되면 믿음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자기에 대하여 지나친 신념을 가지는 것은 미친 사람이고 자기가 아닌 하나님에 대하여 신뢰를 가지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행함이 믿음이었고, 그 믿음이 홍해를 가르고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내시고 그들을 약속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는 시험을 받을 대상이 아니요 내 믿음을 보이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적으로나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믿음을 보이시기를 원하시지 시험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으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의 의지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엎드려 기도하는 의지가 무엇입니까? 겨우 자신의 소욕이나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기도도 아니니 길이 보이지도 않고 기도하면 할수록 꼬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기도보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가고자 하는 자를 가게 하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하게하신다.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지 않은 병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이 어떤 불우한 환경에 오래 처해있으면 체념해 버려서 벗어나고픈, 극복하고픈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가끔 제 자신과 싸우는 기도 제목이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의욕의 상실입니다.
교회를 향한 의욕의 상실입니다.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할 수없어 하면 뭐해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이제 내가 처한 상황이 사면초가 같은가?
38년을 앓아온 병을 떨치고 일어나고 싶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가?
밤새도록 수고를 했는데 얻은 것이 없는 빈 손 인가? 주님이 우리 앞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들어 보십시오
낫고 싶으냐, 극복하고 싶으냐, 잘 살고 싶으냐, 건강하고 싶으냐, 성공하고 싶으냐, 앞으로 나아가라.
네 마음속의 체념을 걷어내라. 다시 그물을 던져라. 그리하면 내가 채워 주리라.
우리 삶의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오늘 들으시기를 축복한다.
오늘 이 시간에도 믿음으로 바다로 내려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다는 길을 내고 말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가지고 가다가 빠져 죽지 마시고 하나님께 헌신 한 것이 믿음으로 한 것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주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시로 행정관급 이상 직원 350명에게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 한 권씩을 선물을 했습니다.
이 책은 영국의 처칠 전 총리의 외손녀 실리아 샌디스가 쓴 돌파의 CEO 윈스턴 처칠,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처칠의 의지를 담은 수많은 메모와 편지, 연설문, 일화 등을 기록한 것입니다.
1,2차 세계대전과 극심한 경제 불황, 불안하고 복잡한 외교안보 상황, 이념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의지로 영국 국민들을 끌어나간 처칠의 열정적인 리더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경제위기, 쇠고기 파동에 이어 최근 금강산, 독도 사태 등 새 정부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악재를 돌파해서 국정장악력과 대국민 지지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민들의 손으로 세운 대통령이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도록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We shall not fail)는 말은 전 유럽이 독일 수중에 떨어지던 1940년, 처칠이 하원에서 했던 연설에서 우리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지도자 처칠의 결단은 온 영국민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영국은 패배를 가져오지 않고 승리를 가져 왔습니다.오늘 본문에 지도자 모세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종살이 하던 애급에서는 나왔지만 축복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까지는 수많은 결단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가야 할 땅입니다.
백성들은 축복의 가나안을 원했지만 현실에 처한 환경은 그들을 크게 두려워하게 하였습니다.
약속의 가나안은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축복의 바라면 약속도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축복은 바라보지만 약속은 못 믿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까?
그러면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에 갇혀 버렸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아 나아 갈 수가 없고 뒤로는 바로가 전열을 가다듬고 병거를 몰고 추격을 하고 좌우는 낭떠러지 벼랑으로 되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게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는 자들이 보는 시각입니다.
벌써 약속은 보이지 않고 현실만 보고 마음은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놓고서도 약속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급기야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자들도 생깁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고 애급에서 나오게 하였는가? 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이런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면에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사람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자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로 같이 언젠가는 죽을 일이 생깁니다.
죽겠다 죽겠다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죽기 싫어도 죽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부정 가운데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긍정의 믿음을 보이었습니다.
이게 지도자의 모습이요 앞에 서서 일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주의 교회도 이런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다가 길을 내어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말씀 앞에 약속 앞에 바다는 더 이상 무서운 장애거리가 아니라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홍해를 건넸는데 믿음이 없이도 잠을 자면서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 바다 밑으로 해저 터널을 뚫어 놓았기에 관광버스를 타고 땅속으로 건넜습니다.
당시는 터널도 없었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건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원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언제든지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는 믿음입니다.
13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상실입니다.
두려움은 지혜의 판단을 마비시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두려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떨어질까? 을 두려워하였습니다.
1930년 미국 경제대공황 중에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두려워 할 오직 한 가지는 두려움뿐이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는 유명한 대국민 연설을 남겼습니다.
두려움에서 온전한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은 인간 생존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도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정도를 지나친 두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과도한 두려움이 임하거든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즉각적으로 인지하셔야 합니다. 마귀는 두려움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두려움을 대적하십시오.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에게 나아오십시오.
여러분들은 크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주의 제단에 머물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을 염려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 못한 자라도 성전에 와서 제단의 뿔을 잡으면 모든 것이 다 유예가 되고 죽을죄도 유예가 되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다행스럽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10절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두려움으로 절망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모든 두려움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오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기도는 세상의 상황에서 전능자요 사랑이신 하나님께로 옮기는 기적의 시작입니다.
조그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철학자가 사공에게 철학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사공이 모른다고 하자 철학자는 인생의 3분의 1을 헛살았군요 라고 말한 후, 그럼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공이 모른다고 하자 철학자는 인생의 3분의 2를 헛살았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배가 급류에 휩싸여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사공이 헤엄칠 줄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철학자가 전혀 못한다고 하자 사공이 말하기를 선생님은 인생 전체를 헛살았군요 했다고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의 최후의 발언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인생 헛살았다는 것입니다.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배위에서 인생을 논하고 있다니 헛 산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도 모르면서 인생살이를 논하다니 헛 산 것입니다.
헛살고 있는 사람 바로 나 자신이 아닙니까?
전도서 기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전도서 12장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두려운 세상이 보이고 두려워 떨고 있는 내가 보일 뿐입니다.
옛날 수도자들은 낮은 기도와 깊은 기도의 차이를 같은 유리지만 거울과 창의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낮은 단계의 기도에서는 거울처럼 아직도 자신의 고통, 자기의 소원, 그리고 자기의 욕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복이 제대로 되게 하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은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그것은 창과 같아서 거기에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창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할렐루야!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시더라도 받아 드립니다.
왜요 하나님이 만사를 주관하심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자꾸 말씀에 토를 달거나 자신의 입장만 변명하여 말하다보면 그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역사를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성도는 항상 말씀에 갈급해 있고 말씀에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받아 드립니다.
너희가 어찌 양식 아닌 것에 돈을 달아 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에 수고하느냐?
너는 내게 나아와 들어라 그리하면 내 영혼이 배 불림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믿는 자는 행함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주저주저 하고 있어야 합니까?
믿고 행함에 인생의 진전이 있습니다. 기적은 행동할 때 일어납니다.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앞은 바닷물인데 그 바다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저는 한 가지 은혜를 받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약속의 바다로 몰아넣으라는 것입니다.그리고 그들이 바다 가운데 발을 들여 놓을 때 바다 가운데 길이 열렸고 물이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습니다.믿음으로 행하면 바다에라도 길이 생깁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바다가 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바다는 항상 바다로 내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은 아직도 아무런 일이 없지 않습니까?
콜럼부스가 지구는 둥굴다는 믿음으로 행할 때 바다가 길이 되었지 않은가?
바다가 저 너머 끝이 있다고 믿었다면 결코 멀리 나아 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히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급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저희는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으며믿음으로 하지 않은 애급 사람들은 땅을 보고 들었는데 물이 몰려들어 오히려 바닷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신기하죠
인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가 수장이 됩니다.
내가 나아가는 길이 무슨 길입니까? 아직도 자신의 욕심에 매여 인생을 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서 내 인생을 엮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바다도 길이 되지만 믿음 없이 행하면 육지도 바다가 되어 물에 빠져 죽어요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습니까?
아직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이 확인이 되면 믿음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자기에 대하여 지나친 신념을 가지는 것은 미친 사람이고 자기가 아닌 하나님에 대하여 신뢰를 가지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행함이 믿음이었고, 그 믿음이 홍해를 가르고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내시고 그들을 약속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는 시험을 받을 대상이 아니요 내 믿음을 보이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적으로나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믿음을 보이시기를 원하시지 시험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으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의 의지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엎드려 기도하는 의지가 무엇입니까? 겨우 자신의 소욕이나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기도도 아니니 길이 보이지도 않고 기도하면 할수록 꼬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기도보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가고자 하는 자를 가게 하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하게하신다.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지 않은 병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사람이 어떤 불우한 환경에 오래 처해있으면 체념해 버려서 벗어나고픈, 극복하고픈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가끔 제 자신과 싸우는 기도 제목이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의욕의 상실입니다.
교회를 향한 의욕의 상실입니다.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할 수없어 하면 뭐해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이제 내가 처한 상황이 사면초가 같은가?
38년을 앓아온 병을 떨치고 일어나고 싶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가?
밤새도록 수고를 했는데 얻은 것이 없는 빈 손 인가? 주님이 우리 앞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들어 보십시오
낫고 싶으냐, 극복하고 싶으냐, 잘 살고 싶으냐, 건강하고 싶으냐, 성공하고 싶으냐, 앞으로 나아가라.
네 마음속의 체념을 걷어내라. 다시 그물을 던져라. 그리하면 내가 채워 주리라.
우리 삶의 위기의 순간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오늘 들으시기를 축복한다.
오늘 이 시간에도 믿음으로 바다로 내려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다는 길을 내고 말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가지고 가다가 빠져 죽지 마시고 하나님께 헌신 한 것이 믿음으로 한 것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