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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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38회 작성일 2015-12-06 20:11본문
이사야9::6-7 평강의 왕
신약은 구약의 성경이 없이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고 그의 인격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에 이르기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캐논 헤이그(Cannon D. Hague)는 누가 세익스피어가 태어나기 500년전에 세익스피어가 태어날 것을 예언했는가?
누가 250년전 나폴레옹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그러나 29명의 구약의 기록자들은 한결같이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중 아무도 그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주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끝으로 40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입니다.
창세기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성경의 예언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사야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늘 본문 역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태어나실 장소도 예언했습니다.
미가서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베들레헴이 작은 고을이지만 메시야가 거기서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오신 분이 아니라 이같이 예언하신대로 구약의 말씀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야 할 이유는 이사야가 처한 시대의 상황은 매우 암울한 것이었다.
사실 세상이 어둡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이 땅이 어둡기 때문에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1,2절은 마4:14-16에 인용됨으로 그 뜻을 해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게 됨으로 응답된 예언이다. 나다나엘이 요1:46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할 정도로 갈릴리 지방,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천시를 당하고 있었다. 이사야 때는 아직 그러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러할 것이 예언 된 것이고 아울러 처량한 땅이 빛을 보리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2중 예언이라 하겠다. 이는 더 시대를 넘어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멸시를 당하던 땅이 영화롭게 되며,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을 예언한 것도 되니 3중 예언이다
하나님은 이 아이가 태어 날 때까지 예루살렘을 대적의 손에 붙여 두실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받게 될 징계가 해산을 위한 수고로 여겨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남은 자가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고 메시아는 그들을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과 위엄으로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목양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고 이 같은 평화의 통치는 땅 끝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의 왕이실 뿐 아니라(사 9:6) 평화 그 자체이십니다(5상, 엡 2:14).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정사-영어성경에는 Govement 정부라는 뜻이데
히브리어<미스라> 라는말은 통치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깨에 정부를 메고 오셨습니다.
사22:22절 [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쇄를 그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 ]
예수는 그 어깨에 하늘 보좌를 열 수 있는 열쇄를 메고 오셨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메고 오셨습니다.
본래-신약에 천국이란 말-바실레이야-바로 통치하다 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 천국이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내 가정의 호주로 모시면 마음 가정 천국..
육신의 몸으로 오심
성경 안에서 가장 놀랍고 충격적인 내용. 한 아기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아기에게 이름을 붙이되, 정사를 어깨에 매고 있다. 기묘자라. 모사라. 기묘자와 모사는 영어나 한국어에 딱 떨어지게 번역할 단어가 없다. 카운셀러나 참모 등으로는 부족하다. 한 아기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라는 말을.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불평이란 있을 수 없다.
유대인들로서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명확하지도 않았고, 메시야에 대한 구절이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다 해결이 되는데 예수님을 제쳐놓고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유대인들에게는 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고난 당하다보니까 기다린다는 것이다. 거짓소망과 같이. 민족들로 하여금 희미하더라도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도 희망을 갖게끔.
미가서를 보면 메시야가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신다고 쓰여있다. 현재 베들레헴은 유대인 구역이 아니고 아랍사람(팔레스타인 사람)만 살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성경을 기록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의 생각 안에 갇혀있다. 우리가 볼 때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것은 National Christ. 자기들 민족만 구원해주실 메시야. 그러나 오신 메시야는 Universial Messiah.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보면 다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 생각에 갇혀있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수 없다. 작은 분을 기다렸는데 너무 큰 분이 오셔서, 덜 초라했으면 믿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외적으로 목수의 아들에, 갈릴리 지역에. 처음부터 잘 믿어지지 않더라도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하나씩 무너질 수 있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가진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가본 사람들은 믿었지만 보고 오라고 보낸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오직 예수님께만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신학적으로 보아도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로 쓰여져있다. 이사야서 안에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한군데 집중되어 있지 않고 부분적으로. 그런데 이 6-7절 두 절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너무나 크신 분이 너무나 초라하게 오셨다. 왜 그러셨을까. 겸손한 자만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을 것. 우리 마음이 낮아져야 한다. 베들레헴에 가면 보아스의 집터에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는 예배당을 지어놓았다. 그 정문을 아주 작게 만들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보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고개를 숙이도록. 또한 밟고 지나가야만 하는 돌이 놓여져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는지 돌이 전부 닳아버렸다.
당나귀 새끼를 타고 아무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오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니고데모같은 사람들. 만군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작은 아기로 오셨다. 모든 예언자를 합한 것보다 더 위대하시고 왕되시고 제사장되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 사도바울이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되었을까. 정확하진 않지만 바울이 서른살 안팎 정도에 이 사실을 깨닫게 된것.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가면 전쟁 중에 죽어간 한 병사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
2차 대전 전쟁 중에 영국의 한부대가 폭격을 받아 사령부와 연결되어 있는 전선이 끊어져 통신이 두절 되었다 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한통신병이 끊어진 전선을 두 손으로 붙들고 그것을 온힘을 다해 연결하고 죽은 그림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이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에서 인간의 모든 비참한 죄와 죽음이 시작 되었으며
인간은 이 길을 잃고 방황하며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죄와 죽음 가운데서 방황하는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한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또 한손은 나의 손을 붙들어 하나님과 끊어진 관게를
연결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는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시기 위한 화목제물 이셨다
예수는 모든 정사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 이시며 위대한 상담자요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신 평강의 왕 이시다 (사 9:6)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은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과거에, 몇 달 전에 혹은 몇 년 전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아니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서 치밀하게 준비된 완벽한 선물이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하고도 치밀한 준비는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중심에는 참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 것을 말합니다.
1) 기묘자 란?
펠레-영어성경-The Wonderful 신기한 분, 히얀한 분
이 말은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1)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흠모와 놀라움의 대상이 되시는 분
예수를 믿게 되면-한번 쇼크를 받아야 정상입니다.
Oh! Wonderful! 그분의 위엄에 엎드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정상이지요
2) 인간사에 오셔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베푸시므로
놀라움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뿐 만이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일을 내게 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삿13: 단 지파 마노아
I am the Wonderful
얼마든지 아들을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모사-Counsellor 우리말로 상담자란 뜻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령님-보혜사
옆에서 가르쳐 주고 변호해 주신느 분
나의 변호사란 말입니다.
지금 변호사는 선임료 주어야 변호해 주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하늘나라 국선 변호사입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백 그라운드> 빽이란 말입니다.
빽 참 좋지요!-우리나라 사람들 빽 참 좋아합니다.
이어령 교수 말 빌리면-우리는 줄 문화라서 그렇답니다.
세상 빽은 변하지만
우리의 백 그라운드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히13:8절 [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인 줄 믿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기묘자 묘사란 말을 한테 묶어 해석합니다.
사28:29에 [ 그의 묘략은 기묘하며 ]
이 말은 기묘한 모사란 말인데
좀 실감나게 말하면-신기한 상담자, 히얀한 상담자
우리인생의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그분 앞에 내어 놓을 때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3)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로 표현
여기서는 깁보르-힘있는 용사라는 말을 사용
대적과 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
사단의 권세와 싸우시는 예수님
그래서 요1서3:8절 [ 나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 ] 고 합니다.
깁보르 예수는 승리하신 예수
우리의 군대장관 되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 앞에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 대장 되시고 우리 졸병 되면 얼마든지 세상과 마귀의 세력
이길 수 있습니다.
4)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합니다.
변함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약1:7절에 [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히 통치하심
본문의 700년 이전의 이사야시대는 북이스라엘(스블론과 납달리 지역은 북 이스라엘지역)이 망하여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노예가 되던지 피난민이 되었는데 이 때 남 유다의 왕 히스기야를 통해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은총과 축복의 사건을 예언하며 그것이 후에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_6-7절의 ‘한 아기’와 ‘한 아들’은 한 사람을 지칭하는 시적표현인데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났고 이미 주었다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분명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시대에는 어떤 인물로 이해되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남왕국의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_바로 ‘여호와의 열심’은 역사 속에서 사람을 대리인 삼으셔서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이라는 족장이었고,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들로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다윗을 통해서 왕국을 세운 이후로는, 바로 왕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게 하십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바로 이 왕을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히브리어로 ‘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 왕)라고 불렀습니다.
_여기서 그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사건, 그 말씀과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중요한 신앙적인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라’는 예언이 미완료, 즉 미래형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이사야서 본문이 예언된 지 700년이 지나서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드디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 4:4)하셨던 것입니다.
_예수님의 오심이 여호와의 열심의 결정체다: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반드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이것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바로 이러한 ‘여호와의 열심’의 최종 결정체라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의 완전한 ‘여호와의 열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분을 통하여 하신 모든 일입니다.
_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처음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셨던 말씀으로 이사야(61:1)가 약속했던 참된 메시야, 곧 참된 왕의 사역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다.”
_본문을 통해 얻는 중요한 가르침 3가지입니다.
_첫 번째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치밀하게 준비된 완벽한 선물이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중심에는 참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_이 하나님의 열심 속에 내가 있고, 나의 구원이 있고, 나의 삶의 준비되었음을 믿는다면 연약하고 부족한 나의 열심이지만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_두 번째로, 오늘의 말씀은 그 당시의 왕이었던 히스기야를 생각하게 합니다. ‘히스기야’란 ‘야웨가 나의 힘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힘을 얻어서 살았던 사람이 히스기야였습니다. 사실 본문의 상황에서, 남유다는 실제로 앗수르의 18만 5천명의 대군이 쳐들어왔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자신의 이름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거룩한 자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본래 그 당시에 히스기야 자신을 가리켰던 말씀이 장차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자신의 값진 믿음을 끝까지 지켰더니, 결국 장래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되는 영적인 원리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_사랑하는 신남의 가족 여러분, 바로 여러분이 히스기야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현재 지금은 단지 현재로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현재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와 이어질 것입니다.
_세 번째: “왜 하나님은 이렇게 어렵고도 길게 구원의 역사를 만드셨던 것일까? 단 6일 만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지루하고 고통스러우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셨던 것일까?”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치도록 치밀하게 준비된 ‘여호와의 열심’과 또한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으로 삼았던 히스기야를 발견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여호와의 열심’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_사랑하는 신남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호와의 열심’을 보여주신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여호와의 열심’을 품어야 한다는 도전이 아닐까요!
_하나님의 열심으로 오늘도 선택되어 이 자리에 서신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히스기야의 순전한 믿음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이 히스기야의 순전한 믿음을 품어야 한다는 도전이 아닐까요!
_주신 사명을 이루고 영혼을 섬기려는 그 열심,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려는 그 열심히 우리 교회를 더욱 온전히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내가 히스기야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
1,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교동)를 시작 한다(사9:2)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들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를 도말 하셨다
이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죄를 도말 하신다
이죄가 사라질 때 하나님과의 분명하고 온전한 관계가 시작 된다
어두움은 빛과 하나 될 수 없고 공존 할 수 없다 죄로 어두워진 인간이 죄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없다 죄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인간이 빛 가운데 게신 주님과 교제하기 원한다면
먼저 빛이 되어야 한다 빛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이세상에 보내
셨고 그 아들 예수를 믿는자들을 빛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고 빛으로 만들어 주신다
이빛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요일 5:12)을 믿음으로 소유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다
누구든지 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속에 그의 생명인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그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다 이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이 하나님의 빛이시며 생명이시다
예수님 안에서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는 자신이 만난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자신안에 임하게 된 그생명과 빛으로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2,주님의 평화를 누린다(평화의 나라가 내안에 이루어진다(사9:6 )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의 벽을 예수님이 자기 육체로 허물어 버리시고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화목케 하시는 화목 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에수님은 평강의 왕 이시며 평화의 왕 이시다 예수님을 믿고 죄가 용서된 사실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린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안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 하셨다 이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곧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다 이 평화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화이며 하나님만 주실수 있는 하나님의 평화요 영원한 평강이다 이 평화가 주님 안에 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아무리 암흑으로 변한다 해도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평화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 샬롬 ” (하나님은 평화)라고 부르기도 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2장에는 "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 이시라고 말씀 하셨고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주장하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나님나라는 오직 성령안에서 이루어지는 평강의 나라다(롬 14:17)
3,죄에서 벗어나 영화로워 진다 (사11:4~5 11:1~2)
영화로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다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이 세상에 어떤 방법도 없다
이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도 없고 영화로운 삶을
살아 낼수도 없다 이세상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부터 해방 시길수 없다
인간이 메고 있는 무거운 죄의 멍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벗기시고 깨트릴수 있다
죄의 멍에가 벗어질 때 인간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한다
이 평화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주님의 형상에 이르도록 영화로워져 간다
날마다 주님과의 분명한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의 영화로우심을 경험하기 시작
한다 그는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점점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 되기 시작
하고 영광 가운데 계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기 시작 한다
한번도 볼 수 없었고 맛 볼수도 누려 볼수도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교제를 통해 이루어진 평화 속에서 사모하기 시작 하고 마침내 그 영광을 맛보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기 시작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정 하시고 또한 부르셔서 의롭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영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롬 8:29~30) 그의 영화로움심 같이 우리가
주님을 닮아갈 때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전할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된다
4,즐거움과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이사야 9:3)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내 죄가 모두 용서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 속에서 주님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이 갖게된 또 하나의 최고의 선물은 "기쁨과 즐거움"
이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내안에 부어지고 이루어진 사랑의 열정에서 시작 되는 것들이다
예수를 믿어도 기쁘지 않고 예수를 믿어도 즐겁지 않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속에서 갖게된 사랑의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감옥에서 같힌 사도바울이 감옥밖의 지체들을 향하여 “기뻐하라 ”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권면하고 하고 있다
환경으로 보면 사도바울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의 감옥에 같혀 있다
바울이 기뻐 하라고 권면 하는 권면 “주 안에서”를 강조하고 있다
기쁨과 들거운 삶을 원 한다면 항상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진 이유는 주안에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반증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의 열정이 불타 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열정과 함께 즐겁고 기쁜 사랑의 환희를 누리게 되어 있다
내 안에 이즐거움과 기쁨이 누려져야 비로서 밖으로 뛰어나가 이 주님을 자랑하고 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사랑의 열정과 사랑의 기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만나는 것이 모든
사역의 원동력이며 근간이 되는 것이다
신약은 구약의 성경이 없이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고 그의 인격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에 이르기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캐논 헤이그(Cannon D. Hague)는 누가 세익스피어가 태어나기 500년전에 세익스피어가 태어날 것을 예언했는가?
누가 250년전 나폴레옹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그러나 29명의 구약의 기록자들은 한결같이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중 아무도 그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주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끝으로 40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입니다.
창세기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성경의 예언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사야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늘 본문 역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태어나실 장소도 예언했습니다.
미가서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베들레헴이 작은 고을이지만 메시야가 거기서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오신 분이 아니라 이같이 예언하신대로 구약의 말씀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야 할 이유는 이사야가 처한 시대의 상황은 매우 암울한 것이었다.
사실 세상이 어둡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이 땅이 어둡기 때문에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1,2절은 마4:14-16에 인용됨으로 그 뜻을 해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게 됨으로 응답된 예언이다. 나다나엘이 요1:46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할 정도로 갈릴리 지방,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천시를 당하고 있었다. 이사야 때는 아직 그러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러할 것이 예언 된 것이고 아울러 처량한 땅이 빛을 보리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2중 예언이라 하겠다. 이는 더 시대를 넘어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멸시를 당하던 땅이 영화롭게 되며,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될 것을 예언한 것도 되니 3중 예언이다
하나님은 이 아이가 태어 날 때까지 예루살렘을 대적의 손에 붙여 두실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받게 될 징계가 해산을 위한 수고로 여겨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남은 자가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고 메시아는 그들을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과 위엄으로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목양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고 이 같은 평화의 통치는 땅 끝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의 왕이실 뿐 아니라(사 9:6) 평화 그 자체이십니다(5상, 엡 2:14).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정사-영어성경에는 Govement 정부라는 뜻이데
히브리어<미스라> 라는말은 통치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깨에 정부를 메고 오셨습니다.
사22:22절 [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쇄를 그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 ]
예수는 그 어깨에 하늘 보좌를 열 수 있는 열쇄를 메고 오셨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메고 오셨습니다.
본래-신약에 천국이란 말-바실레이야-바로 통치하다 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 천국이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내 가정의 호주로 모시면 마음 가정 천국..
육신의 몸으로 오심
성경 안에서 가장 놀랍고 충격적인 내용. 한 아기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아기에게 이름을 붙이되, 정사를 어깨에 매고 있다. 기묘자라. 모사라. 기묘자와 모사는 영어나 한국어에 딱 떨어지게 번역할 단어가 없다. 카운셀러나 참모 등으로는 부족하다. 한 아기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라는 말을.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불평이란 있을 수 없다.
유대인들로서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명확하지도 않았고, 메시야에 대한 구절이 산발적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다 해결이 되는데 예수님을 제쳐놓고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유대인들에게는 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고난 당하다보니까 기다린다는 것이다. 거짓소망과 같이. 민족들로 하여금 희미하더라도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도 희망을 갖게끔.
미가서를 보면 메시야가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신다고 쓰여있다. 현재 베들레헴은 유대인 구역이 아니고 아랍사람(팔레스타인 사람)만 살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성경을 기록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의 생각 안에 갇혀있다. 우리가 볼 때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것은 National Christ. 자기들 민족만 구원해주실 메시야. 그러나 오신 메시야는 Universial Messiah.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보면 다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 생각에 갇혀있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을 수 없다. 작은 분을 기다렸는데 너무 큰 분이 오셔서, 덜 초라했으면 믿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외적으로 목수의 아들에, 갈릴리 지역에. 처음부터 잘 믿어지지 않더라도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하나씩 무너질 수 있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그것이 가능했지만 가진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가본 사람들은 믿었지만 보고 오라고 보낸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오직 예수님께만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신학적으로 보아도 인간이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언어로 쓰여져있다. 이사야서 안에도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한군데 집중되어 있지 않고 부분적으로. 그런데 이 6-7절 두 절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너무나 크신 분이 너무나 초라하게 오셨다. 왜 그러셨을까. 겸손한 자만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을 것. 우리 마음이 낮아져야 한다. 베들레헴에 가면 보아스의 집터에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는 예배당을 지어놓았다. 그 정문을 아주 작게 만들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보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고개를 숙이도록. 또한 밟고 지나가야만 하는 돌이 놓여져 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는지 돌이 전부 닳아버렸다.
당나귀 새끼를 타고 아무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오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니고데모같은 사람들. 만군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작은 아기로 오셨다. 모든 예언자를 합한 것보다 더 위대하시고 왕되시고 제사장되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 사도바울이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되었을까. 정확하진 않지만 바울이 서른살 안팎 정도에 이 사실을 깨닫게 된것.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가면 전쟁 중에 죽어간 한 병사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
2차 대전 전쟁 중에 영국의 한부대가 폭격을 받아 사령부와 연결되어 있는 전선이 끊어져 통신이 두절 되었다 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한통신병이 끊어진 전선을 두 손으로 붙들고 그것을 온힘을 다해 연결하고 죽은 그림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이 하나님과의 단절된 삶에서 인간의 모든 비참한 죄와 죽음이 시작 되었으며
인간은 이 길을 잃고 방황하며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죄와 죽음 가운데서 방황하는 인간들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한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또 한손은 나의 손을 붙들어 하나님과 끊어진 관게를
연결하기 위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는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시기 위한 화목제물 이셨다
예수는 모든 정사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 이시며 위대한 상담자요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신 평강의 왕 이시다 (사 9:6)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은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과거에, 몇 달 전에 혹은 몇 년 전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아니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서 치밀하게 준비된 완벽한 선물이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하고도 치밀한 준비는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중심에는 참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 것을 말합니다.
1) 기묘자 란?
펠레-영어성경-The Wonderful 신기한 분, 히얀한 분
이 말은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1)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흠모와 놀라움의 대상이 되시는 분
예수를 믿게 되면-한번 쇼크를 받아야 정상입니다.
Oh! Wonderful! 그분의 위엄에 엎드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정상이지요
2) 인간사에 오셔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베푸시므로
놀라움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뿐 만이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일을 내게 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삿13: 단 지파 마노아
I am the Wonderful
얼마든지 아들을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모사-Counsellor 우리말로 상담자란 뜻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령님-보혜사
옆에서 가르쳐 주고 변호해 주신느 분
나의 변호사란 말입니다.
지금 변호사는 선임료 주어야 변호해 주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하늘나라 국선 변호사입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백 그라운드> 빽이란 말입니다.
빽 참 좋지요!-우리나라 사람들 빽 참 좋아합니다.
이어령 교수 말 빌리면-우리는 줄 문화라서 그렇답니다.
세상 빽은 변하지만
우리의 백 그라운드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히13:8절 [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인 줄 믿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기묘자 묘사란 말을 한테 묶어 해석합니다.
사28:29에 [ 그의 묘략은 기묘하며 ]
이 말은 기묘한 모사란 말인데
좀 실감나게 말하면-신기한 상담자, 히얀한 상담자
우리인생의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그분 앞에 내어 놓을 때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분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3)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로 표현
여기서는 깁보르-힘있는 용사라는 말을 사용
대적과 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
사단의 권세와 싸우시는 예수님
그래서 요1서3:8절 [ 나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 ] 고 합니다.
깁보르 예수는 승리하신 예수
우리의 군대장관 되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 앞에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 대장 되시고 우리 졸병 되면 얼마든지 세상과 마귀의 세력
이길 수 있습니다.
4)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합니다.
변함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약1:7절에 [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히 통치하심
본문의 700년 이전의 이사야시대는 북이스라엘(스블론과 납달리 지역은 북 이스라엘지역)이 망하여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노예가 되던지 피난민이 되었는데 이 때 남 유다의 왕 히스기야를 통해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은총과 축복의 사건을 예언하며 그것이 후에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_6-7절의 ‘한 아기’와 ‘한 아들’은 한 사람을 지칭하는 시적표현인데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났고 이미 주었다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분명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시대에는 어떤 인물로 이해되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남왕국의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_바로 ‘여호와의 열심’은 역사 속에서 사람을 대리인 삼으셔서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이라는 족장이었고,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들로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다윗을 통해서 왕국을 세운 이후로는, 바로 왕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게 하십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바로 이 왕을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히브리어로 ‘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 왕)라고 불렀습니다.
_여기서 그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사건, 그 말씀과 오늘 우리 삶의 현실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중요한 신앙적인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리라’는 예언이 미완료, 즉 미래형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이사야서 본문이 예언된 지 700년이 지나서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드디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 4:4)하셨던 것입니다.
_예수님의 오심이 여호와의 열심의 결정체다: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반드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이것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바로 이러한 ‘여호와의 열심’의 최종 결정체라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의 완전한 ‘여호와의 열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그분을 통하여 하신 모든 일입니다.
_그래서 누가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처음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셨던 말씀으로 이사야(61:1)가 약속했던 참된 메시야, 곧 참된 왕의 사역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다.”
_본문을 통해 얻는 중요한 가르침 3가지입니다.
_첫 번째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치밀하게 준비된 완벽한 선물이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중심에는 참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_이 하나님의 열심 속에 내가 있고, 나의 구원이 있고, 나의 삶의 준비되었음을 믿는다면 연약하고 부족한 나의 열심이지만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_두 번째로, 오늘의 말씀은 그 당시의 왕이었던 히스기야를 생각하게 합니다. ‘히스기야’란 ‘야웨가 나의 힘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힘을 얻어서 살았던 사람이 히스기야였습니다. 사실 본문의 상황에서, 남유다는 실제로 앗수르의 18만 5천명의 대군이 쳐들어왔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자신의 이름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거룩한 자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본래 그 당시에 히스기야 자신을 가리켰던 말씀이 장차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자신의 값진 믿음을 끝까지 지켰더니, 결국 장래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있게 되는 영적인 원리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_사랑하는 신남의 가족 여러분, 바로 여러분이 히스기야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현재 지금은 단지 현재로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현재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와 이어질 것입니다.
_세 번째: “왜 하나님은 이렇게 어렵고도 길게 구원의 역사를 만드셨던 것일까? 단 6일 만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지루하고 고통스러우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셨던 것일까?”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치도록 치밀하게 준비된 ‘여호와의 열심’과 또한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으로 삼았던 히스기야를 발견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여호와의 열심’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_사랑하는 신남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호와의 열심’을 보여주신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여호와의 열심’을 품어야 한다는 도전이 아닐까요!
_하나님의 열심으로 오늘도 선택되어 이 자리에 서신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히스기야의 순전한 믿음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이 히스기야의 순전한 믿음을 품어야 한다는 도전이 아닐까요!
_주신 사명을 이루고 영혼을 섬기려는 그 열심,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려는 그 열심히 우리 교회를 더욱 온전히 세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내가 히스기야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
1,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교동)를 시작 한다(사9:2)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들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를 도말 하셨다
이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죄를 도말 하신다
이죄가 사라질 때 하나님과의 분명하고 온전한 관계가 시작 된다
어두움은 빛과 하나 될 수 없고 공존 할 수 없다 죄로 어두워진 인간이 죄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없다 죄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인간이 빛 가운데 게신 주님과 교제하기 원한다면
먼저 빛이 되어야 한다 빛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이세상에 보내
셨고 그 아들 예수를 믿는자들을 빛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고 빛으로 만들어 주신다
이빛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요일 5:12)을 믿음으로 소유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다
누구든지 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속에 그의 생명인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그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다 이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이 하나님의 빛이시며 생명이시다
예수님 안에서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 그는 자신이 만난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자신안에 임하게 된 그생명과 빛으로
세상의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2,주님의 평화를 누린다(평화의 나라가 내안에 이루어진다(사9:6 )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의 벽을 예수님이 자기 육체로 허물어 버리시고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화목케 하시는 화목 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에수님은 평강의 왕 이시며 평화의 왕 이시다 예수님을 믿고 죄가 용서된 사실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린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안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말씀 하셨다 이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곧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다 이 평화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화이며 하나님만 주실수 있는 하나님의 평화요 영원한 평강이다 이 평화가 주님 안에 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아무리 암흑으로 변한다 해도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평화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 샬롬 ” (하나님은 평화)라고 부르기도 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2장에는 "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 이시라고 말씀 하셨고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주장하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나님나라는 오직 성령안에서 이루어지는 평강의 나라다(롬 14:17)
3,죄에서 벗어나 영화로워 진다 (사11:4~5 11:1~2)
영화로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다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이 세상에 어떤 방법도 없다
이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도 없고 영화로운 삶을
살아 낼수도 없다 이세상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부터 해방 시길수 없다
인간이 메고 있는 무거운 죄의 멍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벗기시고 깨트릴수 있다
죄의 멍에가 벗어질 때 인간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한다
이 평화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주님의 형상에 이르도록 영화로워져 간다
날마다 주님과의 분명한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의 영화로우심을 경험하기 시작
한다 그는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점점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 되기 시작
하고 영광 가운데 계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기 시작 한다
한번도 볼 수 없었고 맛 볼수도 누려 볼수도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교제를 통해 이루어진 평화 속에서 사모하기 시작 하고 마침내 그 영광을 맛보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기 시작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정 하시고 또한 부르셔서 의롭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의 영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롬 8:29~30) 그의 영화로움심 같이 우리가
주님을 닮아갈 때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전할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된다
4,즐거움과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이사야 9:3)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내 죄가 모두 용서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 속에서 주님의 평강을 누리는 사람들이 갖게된 또 하나의 최고의 선물은 "기쁨과 즐거움"
이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내안에 부어지고 이루어진 사랑의 열정에서 시작 되는 것들이다
예수를 믿어도 기쁘지 않고 예수를 믿어도 즐겁지 않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속에서 갖게된 사랑의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감옥에서 같힌 사도바울이 감옥밖의 지체들을 향하여 “기뻐하라 ”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권면하고 하고 있다
환경으로 보면 사도바울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의 감옥에 같혀 있다
바울이 기뻐 하라고 권면 하는 권면 “주 안에서”를 강조하고 있다
기쁨과 들거운 삶을 원 한다면 항상 주님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진 이유는 주안에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반증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의 열정이 불타 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열정과 함께 즐겁고 기쁜 사랑의 환희를 누리게 되어 있다
내 안에 이즐거움과 기쁨이 누려져야 비로서 밖으로 뛰어나가 이 주님을 자랑하고 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사랑의 열정과 사랑의 기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영혼들을 만나는 것이 모든
사역의 원동력이며 근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