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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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04회 작성일 2015-12-13 19:19본문
마태복음1:21-23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8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 일입니다.
당시 남쪽 유다 나라는 풍랑에 꺼져가는 등불같이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유다 나라는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북에서 이스라엘 쳐들어 내려온 것입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인 아람이나, 모압, 암몬, 에돔등과 동맹관계를 맺고 수시로 남쪽의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남쪽의 유다는 당시 가장 강대국이었던 아람과 북쪽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습니다.
유대나라는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이길 능력도 없습니다. 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왕에게 보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보호한다.
네가 내 말을 못 믿겠거든 징조를 구하라
그러나 유다왕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7:10-14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 난국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 징조, sign으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유다가 연약하고, 아하스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비록 나는 약하고 그리고 부족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를 위하여 구주가 오셨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 분은 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주가 되시고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그 땅의 중심부에 한 성읍이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성읍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 성읍의 이름을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임마누엘의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과 여호와 삼마는 이 둘 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겠다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서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폐허가운데 있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라가 멸망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성읍을 건축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머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새로운 성읍을 건축하시고 거기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만 거기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때에도 거기에 계셨고, 나라가 멸망당하고 성전이 파괴된 지금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하나님께 거기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임마누엘이며, 여호와 삼마입니다.
지난 날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믿음이 떨어져 하나님의 손을 놔버릴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여기까지 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하나님이 임마누엘 되시고 에벤에셀이 되시지 않았더라면 지나온 모든 날들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임마누엘이 되셨기에 살아남아 올 수 있었습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
어느 날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해변을 주님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가로질러 그의 인생의 지난 장면들이 번쩍이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매 장면마다, 모래 위에 새겨진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고 하나는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지날 때 모래위에 새겨진 발자국들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에 그는 그의 인생의 뒤안길에서 오직 한사람의 발자국만이 남은 것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시간들에 생겼던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너무도 의아한 그는 주님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을 때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저와 영원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내 인생에서 가장 문제 많았던 시간에는 오직 단 한사람의 발자국만 새겨져 있군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주님은 저를 떠나셨었나요?
주님은 대답 하시기를, 나의 보배로운 자녀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또 단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시험과 고난을 지나는 동안에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발자국은,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구원자로 함께 계십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원자로 함께 하신다
예수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자란 뜻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에덴의 행복에서 쫓겨나서 쉼이 없는 불행한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복된 자 이었지만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딤후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사람이 사람답기보다는 짐승보다 못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이 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사형수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며 고깃국을 먹는다고 행복하겠습니까?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늘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형수의 하루를 거울삼기
사형수들의 하루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형수들 중에서 교화한 사람, 정말 죽을 준비(일반적으로 사형수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가장 듣기 싫어한다)를 하고 있는 수인들의 하루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들이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목욕이다.
한국은 아직 사형수들에게 사형날짜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제 죽더라도 죽은 후 지저분한 모습을 남기기가 싫은 것이다.
오늘도 죽을 수 있다는 심정으로 매일 목욕을 한다.
이들의 취침 시간은 다른 재소자들보다 4시간 늦고 기상시간은 2시간 빠르다.
구치소의 잠자는 시간은 8시30분, 기상 시간은 6시인데 이들은 거의 하루에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는 것이다.
하루라도 주어진 삶을 아껴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형수들은 들어올 때의 모습과 나중에 나갈 때의 모습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들어올 때는 가장 극악한 모습으로 들어온다.
살인, 강간, 폭력 등 상상을 초월한 범죄를 저지르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사회구조로 돌리며 부모를 원망하는 등 6개월 동안은 원한에 파 묻혀 산다.
그러나 그 후 정작 죽을 준비가 된 사형수들의 경우는 그 마음이 달라진다.
비로소 6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짓게 됐는지를 알게 되고 피해자들에게 참회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점점 인간의 참모습에 대해 깨달아간다.
사형수들이 감방 안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이 뭔지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경우 이래서 생긴다.
그들이 이렇게 살던 어느 날 간수가 찾아온다.
면회가 있다. 나와라!
간수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오면 무술 고단자들인 교도관들이 두 팔을 껴서 붙든다.
사형집행인 것이다.
사형수나 나나 공통점이 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과 그 날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도 어느 순간 하나님이 부르는 날이 있을 거다.
그날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을 살아보자고 다짐해 본다.
예수님은 이처럼 죄와 죽음권세에 사로잡혀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죄인과 함께 하시기 위하시고 그 죄를 담담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요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오늘날을 풍요 속에 빈곤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은 메스컴을 대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제가 있는 것 같지만 가장 외로워하는 고독에 빠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주택에 이상한 냄새가 나고 사람의 인기척이 없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과 소방관이 잠겨 있던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자마자 악취가 코를 찔렀습니다.
방의 전등과 TV는 켜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60대 여성이 이불을 덮은 채 가지런히 누운 채로 숨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20여일 전쯤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시신은 집주인인 장모(60)씨였습니다.
그녀는 70년대 초 여자 배구 스타로 이름을 날렸고, 90년대에는 청소년국가대표팀 트레이너도 지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장씨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다 10여 년 전쯤 어머니가 사망한 후부터는 줄곧 혼자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과도 별다른 교류 없이, 몇 년에 한 번씩 미국에 있는 언니와 형부가 찾아오는 게 유일한 손님이었습니다.
바로 옆집에서 20여년 가까이 살았다는 김모(76) 할머니는 수십 년간 옆에서 살았지만 이웃과 얘기하는 것은 거의 못 봤다면서 장씨가 죽은 것조차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장씨 집에 세들어 사는 최모(35)씨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평소에 교류가 없이 살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누가 우리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 그 사람은 어느 누구도 무엇을 하던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일 겁니다.
어려울 때 위로해 줄 사람이 없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제 진정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와 함께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살고 못 살고가 아닙니다.
임마누엘 대시는 주님은 세상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나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대신 당신이 희생당하시고 당신의 가장 귀한 구원과 생명과 축복을 영원토록 함께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나 알아주지 못함을 슬퍼하지 마시고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시록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800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 일입니다.
당시 남쪽 유다 나라는 풍랑에 꺼져가는 등불같이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유다 나라는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북에서 이스라엘 쳐들어 내려온 것입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인 아람이나, 모압, 암몬, 에돔등과 동맹관계를 맺고 수시로 남쪽의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남쪽의 유다는 당시 가장 강대국이었던 아람과 북쪽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습니다.
유대나라는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이길 능력도 없습니다. 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왕에게 보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보호한다.
네가 내 말을 못 믿겠거든 징조를 구하라
그러나 유다왕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사7:10-14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 난국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 징조, sign으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유다가 연약하고, 아하스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비록 나는 약하고 그리고 부족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를 위하여 구주가 오셨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 분은 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주가 되시고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그 땅의 중심부에 한 성읍이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성읍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 성읍의 이름을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임마누엘의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과 여호와 삼마는 이 둘 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겠다는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서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폐허가운데 있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라가 멸망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성읍을 건축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머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새로운 성읍을 건축하시고 거기에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만 거기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때에도 거기에 계셨고, 나라가 멸망당하고 성전이 파괴된 지금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하나님께 거기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임마누엘이며, 여호와 삼마입니다.
지난 날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믿음이 떨어져 하나님의 손을 놔버릴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여기까지 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하나님이 임마누엘 되시고 에벤에셀이 되시지 않았더라면 지나온 모든 날들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임마누엘이 되셨기에 살아남아 올 수 있었습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
어느 날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해변을 주님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가로질러 그의 인생의 지난 장면들이 번쩍이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매 장면마다, 모래 위에 새겨진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고 하나는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지날 때 모래위에 새겨진 발자국들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시간에 그는 그의 인생의 뒤안길에서 오직 한사람의 발자국만이 남은 것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시간들에 생겼던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너무도 의아한 그는 주님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을 때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저와 영원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내 인생에서 가장 문제 많았던 시간에는 오직 단 한사람의 발자국만 새겨져 있군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주님은 저를 떠나셨었나요?
주님은 대답 하시기를, 나의 보배로운 자녀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또 단 한 번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시험과 고난을 지나는 동안에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발자국은,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구원자로 함께 계십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원자로 함께 하신다
예수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자란 뜻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에덴의 행복에서 쫓겨나서 쉼이 없는 불행한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복된 자 이었지만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딤후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사람이 사람답기보다는 짐승보다 못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이 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사형수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며 고깃국을 먹는다고 행복하겠습니까?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늘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형수의 하루를 거울삼기
사형수들의 하루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형수들 중에서 교화한 사람, 정말 죽을 준비(일반적으로 사형수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가장 듣기 싫어한다)를 하고 있는 수인들의 하루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들이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목욕이다.
한국은 아직 사형수들에게 사형날짜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언제 죽더라도 죽은 후 지저분한 모습을 남기기가 싫은 것이다.
오늘도 죽을 수 있다는 심정으로 매일 목욕을 한다.
이들의 취침 시간은 다른 재소자들보다 4시간 늦고 기상시간은 2시간 빠르다.
구치소의 잠자는 시간은 8시30분, 기상 시간은 6시인데 이들은 거의 하루에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는 것이다.
하루라도 주어진 삶을 아껴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형수들은 들어올 때의 모습과 나중에 나갈 때의 모습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
들어올 때는 가장 극악한 모습으로 들어온다.
살인, 강간, 폭력 등 상상을 초월한 범죄를 저지르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사회구조로 돌리며 부모를 원망하는 등 6개월 동안은 원한에 파 묻혀 산다.
그러나 그 후 정작 죽을 준비가 된 사형수들의 경우는 그 마음이 달라진다.
비로소 6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짓게 됐는지를 알게 되고 피해자들에게 참회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점점 인간의 참모습에 대해 깨달아간다.
사형수들이 감방 안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이 뭔지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경우 이래서 생긴다.
그들이 이렇게 살던 어느 날 간수가 찾아온다.
면회가 있다. 나와라!
간수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오면 무술 고단자들인 교도관들이 두 팔을 껴서 붙든다.
사형집행인 것이다.
사형수나 나나 공통점이 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과 그 날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도 어느 순간 하나님이 부르는 날이 있을 거다.
그날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을 살아보자고 다짐해 본다.
예수님은 이처럼 죄와 죽음권세에 사로잡혀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죄인과 함께 하시기 위하시고 그 죄를 담담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요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오늘날을 풍요 속에 빈곤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은 메스컴을 대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제가 있는 것 같지만 가장 외로워하는 고독에 빠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주택에 이상한 냄새가 나고 사람의 인기척이 없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과 소방관이 잠겨 있던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자마자 악취가 코를 찔렀습니다.
방의 전등과 TV는 켜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60대 여성이 이불을 덮은 채 가지런히 누운 채로 숨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20여일 전쯤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시신은 집주인인 장모(60)씨였습니다.
그녀는 70년대 초 여자 배구 스타로 이름을 날렸고, 90년대에는 청소년국가대표팀 트레이너도 지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장씨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다 10여 년 전쯤 어머니가 사망한 후부터는 줄곧 혼자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과도 별다른 교류 없이, 몇 년에 한 번씩 미국에 있는 언니와 형부가 찾아오는 게 유일한 손님이었습니다.
바로 옆집에서 20여년 가까이 살았다는 김모(76) 할머니는 수십 년간 옆에서 살았지만 이웃과 얘기하는 것은 거의 못 봤다면서 장씨가 죽은 것조차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장씨 집에 세들어 사는 최모(35)씨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평소에 교류가 없이 살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누가 우리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 그 사람은 어느 누구도 무엇을 하던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일 겁니다.
어려울 때 위로해 줄 사람이 없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제 진정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와 함께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살고 못 살고가 아닙니다.
임마누엘 대시는 주님은 세상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나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대신 당신이 희생당하시고 당신의 가장 귀한 구원과 생명과 축복을 영원토록 함께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나 알아주지 못함을 슬퍼하지 마시고 임마누엘 되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시록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