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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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16회 작성일 2016-03-1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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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4:14-16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
어느 시골의 한 가정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한 행동이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자 소녀는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죽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이 그리워 고향집에 내려갔다. 밤중에 가서 달밤에 자기 집을 바라보니 담장 옆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 소녀는 문 가까이 가서 자신도 모르게 아 아버지하고 나지막하게 불렀는데 그러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뛰어 나왔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네가 집을 나간 뒤 대문을 닫아 보지 못했단다. 언젠가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혹시 밤중에 딸이 돌아올까 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가 딸이 부르는 작은 소리를 듣고 뛰어나와 그 딸을 맞이했다는 이야깁니다.
마치 누가 복음에 아버지 유산을 먼저 받고 집을 나간 아들과 같지 않습니까?
허랑 방탕하게 허비하고 굶어 죽게 되어 집에 돌아 왔을 때에 아버지가 그 아들을 그냥 받아 주시고 오히려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셨습니다.
책망이나 문책이나 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녀이기 때문에 받아 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은혜의 보좌라고 합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보좌는 왕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앉는 의자로 임금님의 통치행위.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릴 때의 모습입니다.
현대 민주국가에는 3권이 분립이지만 그러나 옛날 왕정시대는 왕이 3권을 다 쥐고 있었다.
법도 임금님이 만들고(왕의 명령이 곧 법), 집행도 왕이 하고, 재판도 왕이 했다.
악인에게 벌. 선한사람에게 상. 이런 모든 것들이 보좌에 앉은 왕이 했다.
그러니 그 보좌 앞에는 아무도 함부로 나아 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또한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죄짓고 사망에 이른 자들에게 살 길을 주시려고, 사죄의 은총을 선포하시려는 보좌입니다.
말 그대로 은혜의 보좌입니다,
그러니 주저주저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은혜의 보좌로 나와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대 제사장이 계십니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중보자란 양편 사이에 서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중보자가 필요 없었다.
범죄 하기 전 무죄 성을 보전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며 인간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하여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거룩 성을 상실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제 인간은 중재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의 정황을 배려하여 만들어 주신 것이 제사장 직제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속죄하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죄악 된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그러나 속죄와 중보의 직임을 맡은 제사장 역시 범죄 하기 쉬운 속성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그 직무는 완전할 수 없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한 속죄에 앞서 자신의 죄를 사유 받아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완전치 못한 제물의 피를 의지해야 했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쓰고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고 나아가더라도 이것이 온전하지 못해 제사장이 죽기도 했습니다.
레10:1-2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거의 공포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합니다.
히10:1-4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구약 시대에 제사장 아론과 그 후손들이 행했던 중보는 이처럼 미흡했으며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행할 사역의 예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편에서나 인간 편에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중보를 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해 친히 속죄 제물이 되셨기에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었으며, 완전한 화해를 중재하신 참 중보자가 되실 수 있으셨다.
범죄 한 인간들에게 선고된 형벌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육축의 피는 일시적인 속죄를 이룰 수 있을 뿐 죄악을 완전히 도말시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악을 근원까지 도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가치를 지닌 생명을 대속 물로 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대속의 원리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인간의 죄 값으로 지불하셨다.
흠과 티가 전혀 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간의 죄 값으로 지불하셨다.
흠과 티가 전혀 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모든 죄악 된 인간들을 위한 속전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
죄악의 빚을 다 갚아주셨다.
그리고 결국엔 모든 죄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의 왕으로 영광된 하나님 나라에 들려 올라가셨다.
모든 약함의 사정을 아십니다
캐나다의 교육 운동가 메리 고든이 교육 프로그램인 공감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진정한 공감은 상대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할 때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고든은 교과서 대신 생후 2개월에서 4개월 정도의 아기를 택했다고 합니다.
아기는 감정을 속이지 않고 약자나 소수자를 파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유치원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아기를 만나며, 학생들은 아기의 성장과 감정, 타인과의 관계를 체험하도록 하였다
어떤 의지를 가지고 아무런 차별하지도 않는 아기에게서 아이들은 공감을 느껴서 마음을 연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네 살 때 눈앞에서 엄마를 잃은 뒤 양부모 집을 전전하며 거칠게 살아온 대런이라는 아이는 프로그램을 처음 접한 날 아기를 안아보고 아기와 한참을 눈 맞춘 대런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불운한 과거 때문에 얼어붙은 미래를 이제는 희망적으로 생각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그 누구한테도 사랑받지 못했어요. 그래도 나도 가정을 가지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나요? 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자폐증을 앓는 데이비드는 한 번도 친구 집에 놀러 간 적 없지만, 아기들을 만나는 프로그램이 시작된 해에는 세 번이나 생일 파티에 갔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경험한 학생들은 서로 돕기 서로를 받아들이기, 서로 나누기 등 친사회적 행동이 78%, 74%, 71% 늘었다고 합니다.
이 교육에 참여한 학생들을 10년 동안 관찰한 결과는 더 놀라운데요. 집단 괴롭힘이 90%이상 줄고 더불어 학습 능력까지 향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공감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은 저마다 소망적인 말과 생각을 전한다고 합니다.
언제나 웃었어 좋겠다.
네 미소는 온 세상을 기분 좋게 만든다
내가 대우받기를 바라는 만큼 남을 대우해야 한다
매우 긍정적인 뿐만 아니라 치유와 회복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 주고 누군가가 내 편이 되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을 다르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대제사장이신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시험과 상황들을 완전히 잘 아심으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이 땅에서 겪어야 하는 시험들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어야 하는 그 이상의 아픔과 고통과 좌절을 맛 보셨어야 했습니다
인간이 당하는 시험을 동일하게 당하신 경험이 있으므로 그 시험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고통스러운지 아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시편에는 참으로 예수님이 당한 세상의 경험이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시22: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사람들에게 병신 바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시22:6-8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또한 정신적으로 육체적인 고통이 심하였습니다
끝내 그 고통 중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시22:14-17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이 같은 시험에 노출 되셨으나 죄는 짓지 않으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된 인생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다 이해하시고 받아 주시는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이해와 긍휼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이해와 긍휼이 있는 곳은 천국입니다.
절대로 주님에게는 왕따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값없이 조건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다 받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저 말로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나아갈 때 구걸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제 자유하는 자가 되었고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도 주저주저하고 있으니 예수를 힘입어 담대하게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왜 못 나아가는지 내가 이 모양 이 꼴을 해가지고 내가 한 짓이 있는데 하는 죄책감과 그 것을 해결하고 내가 뜻뜻하게 나아오겠다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죄책감 아무 필요 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또 못나오는 이유는 세상이 좋아서 스스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쾌락, 물질, 명예, 권세등 썩어 없어질 것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들에 빠져서 은혜에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을 잊고 삽니다.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믿음이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히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 자유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니 어떤 사람 어떤 세상적인 것이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 공로 믿고 담대히 나아가면 됩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저는 날마다 마음을 다잡아먹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로 내 마음을 얼마나 약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예수 이름으로 마음을 담대히 가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때마다 시마다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살전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간다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계속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긍휼과 은혜가 생활 가운데 없으니 얼마나 냉정함을 받고 정죄와 심판을 받는 기분으로 버림을 받은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 갈 것입니다.
긍휼은 자비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곧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가 없는 지옥 같은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는 삶을 더 이상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받는 긍휼이 풍성한 이해와 자비를 받는 천국의 삶이 날마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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