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이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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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77회 작성일 2016-04-03 19:53본문
시편 23:1-6 부족함이 없는 삶
정연희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 나오는 맹의순은 평양 장대현교회 맹관호 장로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 가족은 공산치하를 떠나 서울로 피난 와서 새 삶을 꾸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그들 가족에게 심상치 않은 고난이 시작된다. 맹의순의 형과 누나가 아무 이유도 없이 병명도 모르는 채로 세상을 떠난다. 거기에다 맹의순의 어머니도 충격을 받으셨는지, 세상을 떠난다. 맹의순은 연희대학 신학과를 다니던 중 육이오 사변을 맞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맹관호 장로는 얼마 있다가 납북 인사로 북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소식을 그 후에는 듣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붙잡히게 부역(인민군 돕는 일)을 하게 된다.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때 탈출하는 과정에서, 맹의순은 이제 유엔군에게 붙잡힌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무조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지다 처음에는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기 시작했다가 나중에 중공군들이 포로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오자, 그는 중공군 막사에 가서, 중공군 포로 중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다. 당시 27세 밖에 안 된 맹의순은 얼마나 진실하고 온전하게 살았던지 포로수용소 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메신저였다.
맹의순이 거기에 무고하게 갇혀 있는 것을 알고 그가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를 만들어, 유엔사령부에 보낸다.
그를 석방시키려고 외부 사람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여기 포로수용소가 참 좋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이 참 많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곳에, 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지 모르겠네. 드디어 석방 명령이 떨어진 하루 전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포로들이 죽으면, 아무 구덩이에다 둘둘 말아서 던졌다고 한다. 당시 포로들의 삶이 그랬다고 한다.
1주기 추도예배 때,
멀리 거제도에서 도착한 편지가 있었는데,
한 쪽에는 중국말로 써진 편지, 또 한쪽에는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편지였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환자를 씻기시고, 우리말(중국말)로 외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렇게 다 외우신 다음, 그 분은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 말씀이 끝나면, 우리 모두도 따라 외었습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선생님은 마지막 환자를 씻기시고 나서 물통을 들고 일어서시다가 바닥에 쓰러지셨습니다.
의사들이 달려와서 그 분을 모시고 갔습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이 믿었던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날이 밝아서,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사실을 듣고는 우리 모두 통곡했습니다.
하지만, 맹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예수 안에 있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맹 선생님은 지금 예수 안에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통곡하고 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
맹의순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며
오히려 내 잔이 넘치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 역시
그의 일생을 볼 때 너무나도 부족함이 많은 삶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잔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왜 부족함이 많은데 여호와가 어떤 분이시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잔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습니까?
여호와는 목자로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유목민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유는 푸른 초장을 찾아서입니다.
야생의 동물들도 대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먹을 곳이 있는 푸른 초장을 찾아서 수천리 길을 이동합니다.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들은 먹을 곳을 찾아 수만리를 날아갑니다.
양들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스스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손해 보고 힘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자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려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쉴만한 물가는 잔잔한 물가라는 뜻입니다.
양들은 매우 겁이 많은 동물인지라 급한 물살에서는 물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야 하고, 물살이 급하면 목자는 바위를 굴리거나 하여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만든 후 양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무래도 잔잔한 물가 근처에는 신선한 풀도 많을 것입니다.
중동은 비가 적기 때문에 물가 근처에는 반드시 풀이 있습니다.
싱싱한 풀을 먹고 또 깨끗한 물을 마셨다면 양에게는 더 이상의 만족감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눕고 편히 쉬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경은 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 주는 일곱 날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크고 복된 날로 정한 것은 바로 안식일 곧 주일입니다.
일정한 쉬는 날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것을 통해서 쉼의 중요성을 알았던 민족이었습니다.
내가 쉬더라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쉰만큼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편안한 쉼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얼마나 동분서주하는지 모릅니다.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안위해 주십니다.
안위라는 말은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위로하다(comfort)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 대해 슬픔, 동정, 위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안위하시느냐하면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떠올렸고 그때마다 그는 정말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적들이 그를 공격해 올 때, 부하들이 자신을 배신할 때, 자녀들 때문에 속이 썩을 때,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괴로울 때, 그럴 때면 다윗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보입니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요.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허리에 차는 곤봉과도 같은 것입니다.
양떼를 모으거나 계수할 때나 양을 보호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유적으로는 종이나, 미련한 자, 자녀 등을 훈계하고 교정하는 징계나 형벌의 도구로도 쓰였습니다.
그 다음이 막대기인데, 이 막대기는 지지한다, 의지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이 집고 다니는 것, 즉 우리가 지팡이로 떠올리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막대기는 지팡이보다 긴 것으로서, 옛날 목자들은 자신의 키보다 더 길며 그 끝이 굽어져 있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막대기의 기능은 이중적인데 짐승들이 양들을 공격할 때 그것으로 짐승들을 내리치거나 던져서 쫓아내는, 양들을 보호하는 용도였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양떼들이 잘못할 때나 엉뚱한 길로 갈 때, 이 막대기로 그런 양들을 가볍게 때려서 바른 길로 이끌었고, 양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끌어올리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다른 길로 가는 양을 지팡이의 구부러진 끝을 사용하여 잡아당기기도 했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대로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본문의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말은 때로는 나는 벌하고, 또 때로는 나를 공격하는 세력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백이 있기까지는 여러 차례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효력을 체험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윗은 자신이 양으로서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효력을 경험했고,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평생에 적들에게 둘러싸여 힘들었을 때나 곤경에 처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때마다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고, 그렇게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목자로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물론 대적들과 원수들을 물리치시기도 했지만 엉뚱한 길로 갈 때, 이 막대기로 그런 양들을 때려서 바른 길로 이끌었듯이 그가 우리아의 아내의 일로 인하여 혹은 병사들을 계수하는 교만으로 인하여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히12:6-1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없이는 다윗은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의 인도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팡이와 막대기도 자신을 안위하는 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과분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배가 고프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배가 부르고 평안해야 양들이 푸른 초장에서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듯이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 또한 우리들이 이처럼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렇게 되도록 복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보이는 물질적인 축복이 축복의 전부가 아니라 말씀합니다.
마음의 축복 또한 중요합니다.
인간의 마음의 가짐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푸른 초장도 어느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음이 감사로 차고 넘치면 그 어느 곳도 푸른 초장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 말씀에서 주님이 마음의 행복에 대해서 강조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요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지금 웃고 있는 자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온갖 생각과 계획과 염려로 가득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싸우고 승리하는 자들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누리고 있는 자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이며 푸른 초장은 마음이 자족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고대 철학자들 중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자들로 알려졌습니다.
쾌락주의자들이니까 이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육체적인 방탕을 추구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금욕을 더 중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만족이 오히려 진정한 쾌락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때 절제하는 것이 더 큰 쾌락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취한 사람은 빼앗길 것을 염려해야 하고 또 빼앗긴 후에는 그 상실의 고통이 더 큽니다.
그래서 진정한 만족이란 적은 소유가 오히려 부족함을 느낄 때에 그 쾌락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부족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신약의 다윗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도바울 역시 예수로 채움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제 저는 고백 할 것이 있다면 내 잔이 넘친다는 말 뿐입니다
중동에서는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잔에 붓지는 않습니다. 만약 넘치도록 붓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환대의 표시입니다. 만약 주인이 잔이 비었는데도 채우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잔을 재우되 넘치도록 채우는 것은 그 주인이 손님을 여전히 환대하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이처럼 환대하십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었지만 주님 지난 시간 제잔이 주로 인하여 넘쳤습니다
정연희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 나오는 맹의순은 평양 장대현교회 맹관호 장로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 가족은 공산치하를 떠나 서울로 피난 와서 새 삶을 꾸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그들 가족에게 심상치 않은 고난이 시작된다. 맹의순의 형과 누나가 아무 이유도 없이 병명도 모르는 채로 세상을 떠난다. 거기에다 맹의순의 어머니도 충격을 받으셨는지, 세상을 떠난다. 맹의순은 연희대학 신학과를 다니던 중 육이오 사변을 맞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맹관호 장로는 얼마 있다가 납북 인사로 북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소식을 그 후에는 듣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붙잡히게 부역(인민군 돕는 일)을 하게 된다.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때 탈출하는 과정에서, 맹의순은 이제 유엔군에게 붙잡힌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무조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지다 처음에는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기 시작했다가 나중에 중공군들이 포로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오자, 그는 중공군 막사에 가서, 중공군 포로 중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다. 당시 27세 밖에 안 된 맹의순은 얼마나 진실하고 온전하게 살았던지 포로수용소 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메신저였다.
맹의순이 거기에 무고하게 갇혀 있는 것을 알고 그가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를 만들어, 유엔사령부에 보낸다.
그를 석방시키려고 외부 사람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여기 포로수용소가 참 좋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이 참 많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곳에, 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지 모르겠네. 드디어 석방 명령이 떨어진 하루 전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포로들이 죽으면, 아무 구덩이에다 둘둘 말아서 던졌다고 한다. 당시 포로들의 삶이 그랬다고 한다.
1주기 추도예배 때,
멀리 거제도에서 도착한 편지가 있었는데,
한 쪽에는 중국말로 써진 편지, 또 한쪽에는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편지였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환자를 씻기시고, 우리말(중국말)로 외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렇게 다 외우신 다음, 그 분은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 말씀이 끝나면, 우리 모두도 따라 외었습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선생님은 마지막 환자를 씻기시고 나서 물통을 들고 일어서시다가 바닥에 쓰러지셨습니다.
의사들이 달려와서 그 분을 모시고 갔습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이 믿었던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날이 밝아서,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사실을 듣고는 우리 모두 통곡했습니다.
하지만, 맹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예수 안에 있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맹 선생님은 지금 예수 안에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통곡하고 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
맹의순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며
오히려 내 잔이 넘치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 역시
그의 일생을 볼 때 너무나도 부족함이 많은 삶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잔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왜 부족함이 많은데 여호와가 어떤 분이시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잔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습니까?
여호와는 목자로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유목민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유는 푸른 초장을 찾아서입니다.
야생의 동물들도 대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먹을 곳이 있는 푸른 초장을 찾아서 수천리 길을 이동합니다.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들은 먹을 곳을 찾아 수만리를 날아갑니다.
양들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스스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손해 보고 힘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자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려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쉴만한 물가는 잔잔한 물가라는 뜻입니다.
양들은 매우 겁이 많은 동물인지라 급한 물살에서는 물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야 하고, 물살이 급하면 목자는 바위를 굴리거나 하여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만든 후 양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무래도 잔잔한 물가 근처에는 신선한 풀도 많을 것입니다.
중동은 비가 적기 때문에 물가 근처에는 반드시 풀이 있습니다.
싱싱한 풀을 먹고 또 깨끗한 물을 마셨다면 양에게는 더 이상의 만족감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눕고 편히 쉬는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경은 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 주는 일곱 날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크고 복된 날로 정한 것은 바로 안식일 곧 주일입니다.
일정한 쉬는 날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것을 통해서 쉼의 중요성을 알았던 민족이었습니다.
내가 쉬더라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쉰만큼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편안한 쉼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얼마나 동분서주하는지 모릅니다.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안위해 주십니다.
안위라는 말은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위로하다(comfort)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 대해 슬픔, 동정, 위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안위하시느냐하면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힘들고 어려울 때면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떠올렸고 그때마다 그는 정말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적들이 그를 공격해 올 때, 부하들이 자신을 배신할 때, 자녀들 때문에 속이 썩을 때,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괴로울 때, 그럴 때면 다윗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보입니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요.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허리에 차는 곤봉과도 같은 것입니다.
양떼를 모으거나 계수할 때나 양을 보호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유적으로는 종이나, 미련한 자, 자녀 등을 훈계하고 교정하는 징계나 형벌의 도구로도 쓰였습니다.
그 다음이 막대기인데, 이 막대기는 지지한다, 의지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이 집고 다니는 것, 즉 우리가 지팡이로 떠올리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막대기는 지팡이보다 긴 것으로서, 옛날 목자들은 자신의 키보다 더 길며 그 끝이 굽어져 있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막대기의 기능은 이중적인데 짐승들이 양들을 공격할 때 그것으로 짐승들을 내리치거나 던져서 쫓아내는, 양들을 보호하는 용도였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양떼들이 잘못할 때나 엉뚱한 길로 갈 때, 이 막대기로 그런 양들을 가볍게 때려서 바른 길로 이끌었고, 양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끌어올리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다른 길로 가는 양을 지팡이의 구부러진 끝을 사용하여 잡아당기기도 했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대로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본문의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말은 때로는 나는 벌하고, 또 때로는 나를 공격하는 세력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백이 있기까지는 여러 차례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효력을 체험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윗은 자신이 양으로서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효력을 경험했고,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평생에 적들에게 둘러싸여 힘들었을 때나 곤경에 처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때마다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고, 그렇게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목자로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물론 대적들과 원수들을 물리치시기도 했지만 엉뚱한 길로 갈 때, 이 막대기로 그런 양들을 때려서 바른 길로 이끌었듯이 그가 우리아의 아내의 일로 인하여 혹은 병사들을 계수하는 교만으로 인하여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히12:6-1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이 없이는 다윗은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의 인도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팡이와 막대기도 자신을 안위하는 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과분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배가 고프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배가 부르고 평안해야 양들이 푸른 초장에서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듯이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 또한 우리들이 이처럼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렇게 되도록 복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보이는 물질적인 축복이 축복의 전부가 아니라 말씀합니다.
마음의 축복 또한 중요합니다.
인간의 마음의 가짐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푸른 초장도 어느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음이 감사로 차고 넘치면 그 어느 곳도 푸른 초장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 말씀에서 주님이 마음의 행복에 대해서 강조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요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지금 웃고 있는 자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온갖 생각과 계획과 염려로 가득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싸우고 승리하는 자들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누리고 있는 자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이며 푸른 초장은 마음이 자족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고대 철학자들 중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자들로 알려졌습니다.
쾌락주의자들이니까 이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육체적인 방탕을 추구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금욕을 더 중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만족이 오히려 진정한 쾌락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때 절제하는 것이 더 큰 쾌락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취한 사람은 빼앗길 것을 염려해야 하고 또 빼앗긴 후에는 그 상실의 고통이 더 큽니다.
그래서 진정한 만족이란 적은 소유가 오히려 부족함을 느낄 때에 그 쾌락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부족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신약의 다윗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도바울 역시 예수로 채움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제 저는 고백 할 것이 있다면 내 잔이 넘친다는 말 뿐입니다
중동에서는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잔에 붓지는 않습니다. 만약 넘치도록 붓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환대의 표시입니다. 만약 주인이 잔이 비었는데도 채우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잔을 재우되 넘치도록 채우는 것은 그 주인이 손님을 여전히 환대하고 있다는 사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이처럼 환대하십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었지만 주님 지난 시간 제잔이 주로 인하여 넘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