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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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08회 작성일 2016-05-08 20:41본문
누가복음 15:17-24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자
본문에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어버이들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비유의 말씀입니다.
여기 비유는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3-7절 잃은 양에 대한 비유입니다. 8-10절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입니다. 11-31절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여기에는 온통 잃어버린 것뿐입니다.
양을 잃어버리고, 동전을 잃어버리고, 아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4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8절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역시 잃은 동전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들려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까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절대 기뻐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에 비로소 아버지는 만족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 즐겁고 잃은 동전을 찾고야 즐기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서 비로소 즐거워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바로 이를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입니다.
영혼 구원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잃어버린 영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지금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는 아직도 사랑하는 자녀를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자녀가 잘 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우리의 부모이십니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부모는 어떤 분이십니까
자녀를 위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취하는 방법은 상속과 증여가 있습니다.
상속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후손들이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고 증여는 아직 살아계실지라도 무상 혹은 유상으로 물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자녀가 받는 재산은 아버지가 살아 잇을 때 받은 재산이니 증여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받은 재산은 증여가 아닌 유산입니다.
12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당시 그 사회에서 자녀가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상속해달라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납득 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살아 계신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유산 즉 부모의 죽음으로 주어지는 소유를 탐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에 보면 집 나간 아들은 부모가 나가라고 해서 나간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쫓겨난 아들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자기가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자기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나가버린 자녀입니다.
이 자녀는 아버지의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자식입니다.
이 자녀는 오직 자기생각만 하고 아버지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서 집을 나간 자녀입니다.
자녀의 안중에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런 못난 자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모를 안중에 두지 않고 없는 자 죽은 자같이 여기고 모든 것을 다 가져가 버린 강도 같은 자가 자녀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그것도 모자라 그 자녀를 널리널리 이해하고 용납하는 분이 부모입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미리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고 자기 멋대로 살겠다고 허랑 방탕을 하는 그런 자식인데 그런 못난 자식이라면 더 이상 자식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자녀 다 잊어버리고 두 다리 쭉 뻗고 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식이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 자식이 정말로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서 뭐하고 지낼까 노심초사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는 오직 돈만 있으면 된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세상에서 즐기는 쪽으로만 나가는 자식입니다.
그러니 지극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은 나중에 보면 짐승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생활을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가 비록 못난 자식이라도 여전히 자식입니다.
그가 비록 잘못하고 죄 가운데 있는 자식이라도 여전히 자식입니다.
그가 세상에서 비록 그 누구도 아무 쓸모없는 자라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어도 그 아들은 여전히 자식입니다.
그러니 내 자녀가 행한 지금까지 행한 그 어떤 허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랑 방탕이란 뜻은 구원받지 못할, 낭비하는, 방탕한, 품행이 불량한, 등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아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그런 삶을 찾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레도 아버지는 자기 아들 밖에 없다고 여기시고 그를 귀하게 여기고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다윗에게는 아주 불량한 압살롬 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배다른 형제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고 아버지의 궁녀들을 겁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피신하여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목숨까지 노리고 병사를 보내어 추적하는 이런 아들을 아버지 다윗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의 병사들에게 아들의 목숨만큼은 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싸움터에서 전령 병사들이 자신에게 다가 올 때마다 묻는 말은 내 아들은 잘 있느냐 잘 잇느냐 이게 관심사 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한탄하며 하는 말이 아들 대신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죽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한탄하는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이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그들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 십니다.
우리의 부모 역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언제까지나 내 사랑하는 자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20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멀다는 표현이 상징해주는 의미가 많은데 사람이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거리를 말합니다.
저 멀리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볼 수 없는 거리인데도 아버지는 그가 아들인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십니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 아들은 집나갈 때 말끔하고 멋진 그런 아들이 아니라 완전히 실패하고 망가지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도 채울 수 없는 거지 신세가 된 형편없이 된 아들인데도 멀리서도 저건 내 자식이야 저건 바깥에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한 아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는 어느 한 순간도 집 나간 아들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들을 멀리서도 보고 바로 알아본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본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여겼다고 했습니까?
측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열을 받고 기분 나빠지고 속상할 것 같은데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를 측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측은히 여겼다는 말은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아버지가 측은히 여긴 것은 그 아들이 외로울 때 함께 외로움을 느끼고, 그가 힘들어할 때 함께 힘들어했고, 그가 아파 할 때 그 이상으로 아버지도 함께 아파하며 그 마음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의 마음이 측은히 여겼다는 그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달려갔습니까?
아버지가 달려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어른인 아버지가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권위를 세우고 아버지는 점잖게 있어야 되는데 아버지가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는 아들 앞에 체면이고 체통이고 자존심도 없고 다 내려놓았습니다.
달려가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지나간 잘못의 용서로 만족 할 수가 없으십니다.
그는 아들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그의 신분을 완벽하게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십니다.
새 신을 신겨 주십니다.
모두가 새 출발을 위한 은총의 준비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오자마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십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석상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선언해 주십니다.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이런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할일은 무엇일까요?
꼭 한 가지입니다.
언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데 최대의 장애물은 죄 문제와 죄책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다 희생했습니다. 자식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오늘 성경에 나오는 탕자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는데 다 탕진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가 돈을 보내지 않으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당신 아들 굶어죽음 아들 이렇게 쳤답니다.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아들 굶어죽어라, 애비가 당시의 전보 기본은 10자입니다.
아버지의 전보를 받은 아들은 분발하여 살기 시작하고 그래서 고향 떠난지 20여년 만에 아버지의 아들을 사랑하는 일인 줄 알고 아버지를 찾아 갔더니 아버지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지난해 세상 떠나시며 유서 한 장을 남기셨다는 것입니다.
유서에는 아들아, 너를 기다리다가 먼저 간다. 너를 하루도 잊어본 날이 없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찾아오지 않는 자녀를 부모는 오늘인가 내일 인가 망부석이 되어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날에 주께 나올 수 있음은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마냥 기다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심판이 없다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어리석은 자들도 있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신 까닭에 오래 참고 기다리심 때문에 심판이 더딘 것뿐입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우리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오기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부모님을 통하여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없는 자녀는 없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일러 주는 대사입니다.
사실 부모를 보고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고 그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엡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본문에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어버이들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비유의 말씀입니다.
여기 비유는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3-7절 잃은 양에 대한 비유입니다. 8-10절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입니다. 11-31절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여기에는 온통 잃어버린 것뿐입니다.
양을 잃어버리고, 동전을 잃어버리고, 아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4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8절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역시 잃은 동전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들려주시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까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절대 기뻐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에 비로소 아버지는 만족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십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 즐겁고 잃은 동전을 찾고야 즐기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서 비로소 즐거워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바로 이를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입니다.
영혼 구원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잃어버린 영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지금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는 아직도 사랑하는 자녀를 넓은 사랑의 마음으로 자녀가 잘 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우리의 부모이십니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부모는 어떤 분이십니까
자녀를 위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취하는 방법은 상속과 증여가 있습니다.
상속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후손들이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고 증여는 아직 살아계실지라도 무상 혹은 유상으로 물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자녀가 받는 재산은 아버지가 살아 잇을 때 받은 재산이니 증여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받은 재산은 증여가 아닌 유산입니다.
12절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당시 그 사회에서 자녀가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상속해달라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납득 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살아 계신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유산 즉 부모의 죽음으로 주어지는 소유를 탐하였던 것입니다.
말씀에 보면 집 나간 아들은 부모가 나가라고 해서 나간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쫓겨난 아들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자기가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자기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나가버린 자녀입니다.
이 자녀는 아버지의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자식입니다.
이 자녀는 오직 자기생각만 하고 아버지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서 집을 나간 자녀입니다.
자녀의 안중에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런 못난 자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모를 안중에 두지 않고 없는 자 죽은 자같이 여기고 모든 것을 다 가져가 버린 강도 같은 자가 자녀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그것도 모자라 그 자녀를 널리널리 이해하고 용납하는 분이 부모입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미리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고 자기 멋대로 살겠다고 허랑 방탕을 하는 그런 자식인데 그런 못난 자식이라면 더 이상 자식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자녀 다 잊어버리고 두 다리 쭉 뻗고 잘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는 자식이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 자식이 정말로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서 뭐하고 지낼까 노심초사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는 오직 돈만 있으면 된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세상에서 즐기는 쪽으로만 나가는 자식입니다.
그러니 지극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은 나중에 보면 짐승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한 생활을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가 비록 못난 자식이라도 여전히 자식입니다.
그가 비록 잘못하고 죄 가운데 있는 자식이라도 여전히 자식입니다.
그가 세상에서 비록 그 누구도 아무 쓸모없는 자라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어도 그 아들은 여전히 자식입니다.
그러니 내 자녀가 행한 지금까지 행한 그 어떤 허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랑 방탕이란 뜻은 구원받지 못할, 낭비하는, 방탕한, 품행이 불량한, 등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아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그런 삶을 찾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레도 아버지는 자기 아들 밖에 없다고 여기시고 그를 귀하게 여기고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다윗에게는 아주 불량한 압살롬 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배다른 형제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고 아버지의 궁녀들을 겁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피신하여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목숨까지 노리고 병사를 보내어 추적하는 이런 아들을 아버지 다윗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의 병사들에게 아들의 목숨만큼은 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싸움터에서 전령 병사들이 자신에게 다가 올 때마다 묻는 말은 내 아들은 잘 있느냐 잘 잇느냐 이게 관심사 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한탄하며 하는 말이 아들 대신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죽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한탄하는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이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며 그들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 십니다.
우리의 부모 역시 모든 것을 다 주시고 언제까지나 내 사랑하는 자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20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멀다는 표현이 상징해주는 의미가 많은데 사람이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거리를 말합니다.
저 멀리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볼 수 없는 거리인데도 아버지는 그가 아들인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십니다.
시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 아들은 집나갈 때 말끔하고 멋진 그런 아들이 아니라 완전히 실패하고 망가지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도 채울 수 없는 거지 신세가 된 형편없이 된 아들인데도 멀리서도 저건 내 자식이야 저건 바깥에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한 아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는 어느 한 순간도 집 나간 아들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들을 멀리서도 보고 바로 알아본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본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여겼다고 했습니까?
측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열을 받고 기분 나빠지고 속상할 것 같은데 그 아버지의 마음은 그를 측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측은히 여겼다는 말은 불쌍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아버지가 측은히 여긴 것은 그 아들이 외로울 때 함께 외로움을 느끼고, 그가 힘들어할 때 함께 힘들어했고, 그가 아파 할 때 그 이상으로 아버지도 함께 아파하며 그 마음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의 마음이 측은히 여겼다는 그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달려갔습니까?
아버지가 달려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어른인 아버지가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권위를 세우고 아버지는 점잖게 있어야 되는데 아버지가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는 아들 앞에 체면이고 체통이고 자존심도 없고 다 내려놓았습니다.
달려가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지나간 잘못의 용서로 만족 할 수가 없으십니다.
그는 아들이 새로운 미래를 향해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그의 신분을 완벽하게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십니다.
새 신을 신겨 주십니다.
모두가 새 출발을 위한 은총의 준비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오자마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십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석상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선언해 주십니다.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이런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할일은 무엇일까요?
꼭 한 가지입니다.
언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데 최대의 장애물은 죄 문제와 죄책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다 희생했습니다. 자식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다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오늘 성경에 나오는 탕자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는데 다 탕진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가 돈을 보내지 않으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당신 아들 굶어죽음 아들 이렇게 쳤답니다.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아들 굶어죽어라, 애비가 당시의 전보 기본은 10자입니다.
아버지의 전보를 받은 아들은 분발하여 살기 시작하고 그래서 고향 떠난지 20여년 만에 아버지의 아들을 사랑하는 일인 줄 알고 아버지를 찾아 갔더니 아버지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지난해 세상 떠나시며 유서 한 장을 남기셨다는 것입니다.
유서에는 아들아, 너를 기다리다가 먼저 간다. 너를 하루도 잊어본 날이 없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찾아오지 않는 자녀를 부모는 오늘인가 내일 인가 망부석이 되어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날에 주께 나올 수 있음은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마냥 기다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벧후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심판이 없다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어리석은 자들도 있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신 까닭에 오래 참고 기다리심 때문에 심판이 더딘 것뿐입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우리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돌아오기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부모님을 통하여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없는 자녀는 없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일러 주는 대사입니다.
사실 부모를 보고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고 그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이 있습니다.
엡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