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집에 사는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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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22회 작성일 2016-06-13 10:40본문
시편 84:1-4 주의 집에 사는 자의 복
본 시편기자는 거쳐 할 곳이 없는 노숙자 내지는 무 주거자라는 것입니다.
가장 겁이 많은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철따라 날아다니는 철새인 제비 역시 새끼틀 보금자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안식 할 집이 없는 방랑자 무주거자이었습니다.
그이 삶은 끊임없는 방황의식입니다.
목적과 의미가 없는 그리고 안식도 평안도 없는 삶 그 자체이었습니다
사람이 내 것이네 네 것이네 하며 아웅다웅하는 사는 이 세상은 사람이 만든 것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살아 갈 뿐입니다.
모두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삶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직면하면서 끝없는 방황 즉, 노숙자 무거주자임을 인식합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 그 해에 서두에 인본주의자들은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고 좋아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모든 고통을 모두 이겨내고 이제는 이 세상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평화가 왔고 서로 미워하지 않고 전쟁도 사라지며 모든 사람들이 조화 있게 살 것이라는 인간승리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해 7월 14일에 세계 대전이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환상들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찾지만 인생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삶이 끝없는 방황의 모습입니다.
나하나 작은 몸이 쉴 곳이 없습니다.
조그만 참세와 철을 따라 날아다니는 제비도 안식 할 처소가 있고 새끼를 틀 둥지가 있는데 인생은 점점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기웃 거리지만 피곤하기만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도움 없이 찾고 찾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현대를 염려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인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감을 두고 한 말이다.
인간의 두려움을 연구한 휴 미실딘 박사는 인간의 두려움은 영아기 때부터 3가지의 기초적 두려움의 연장선 이라고 말한다.
그 3가지 기초적 두려움은 떨어지는 두려움(Fear of falling),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Fear of loud noise), 버려지는 두려움(Fear of being aboned)이 그것이다.
영아기의 떨어지는 두려움은 성인이 되면서 실패의 두려움,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사고· 사건에 대한 두려움이 된다.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은 어른이 되어도 비판에 대한 두려움, 폭력이나 침범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이어진다. 버려지는 두려움은 인간 최대의 내적 두려움으로 고독과 불안이 주는 두려움, 헤어지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등으로 연결된다.
결국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평생 계속된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보면 두려움이 인간의 삶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에덴에서의 최초의 인류 아담 역시 두려워하며 나무 그늘 아래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용맹 할 것 같은 다윗과 같은 자들도 가드에서 블레셋의 왕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시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나이가 들거나 혹은 질병을 당하였을 때에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시71:9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이같이 사람은 누구든지 두려움에서 자유 할 자는 그 아무도 없습니다.
참새들을 한 번 보십시오.
얼마나 긴장해서 먹이를 찾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가까이에 가기도 전에 도망가 버립니다.
큰 새들, 독수리나 고양이나 다른 짐승들이 늘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참새는 더욱더 안전한 곳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곳이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주의 제단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복이라는 말은 최고의 축복이라는 의미로 행복함과 평안을 누리는 마음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행복감을 느끼는데 얼마나 평안한지 모릅니다
지금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들이며 지금 마음껏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 축복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등은 성전을 가리키거나 암시하는 용어들입니다.
지금 시인은 어떤 상황입니까?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2절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라고 말합니다.
이 복된 성전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사모한다는 말은 열망하다, 갈망하다는 뜻으로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그리워하며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열망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너무 그리워해서 몸이 아플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쇠약하다는 말은 배터리가 끝까지 방전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진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아셔야 합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사랑스러운지요라는 말은 온 마음과 인격을 다해 주의 성전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할 수 없는 환경, 마음대로 성전에 갈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자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압니다그래서 더욱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이 그립고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뭐라고 부르짖었습니까?
얼마나 성전을 사모하는지 제단 곁에서 자유롭게 집을 짓고 새끼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새들을 부러워 할 정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재차 이야기합니다.
어떤 복이 있습니까
3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왕이시니 그의 백성입니다
많은 자들이 안전하게 살기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살기를 싫어합니다.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강하신 왕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십니다.
어지시고 인자하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낮이지만 반대편은 지금 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나라 때문에 못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봄이 끝나고 여름에 접어들지만 반대편에는 가을이 끝나고 겨울에 접어들 것입니다.
열매를 익게 하시느라고 씨앗을 자라게 하시느라고 바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밤낮으로 일을 하셔야 하고 각각 처한 형편이 다르니 춥다고 하는 사람 덥다고 하는 사람
때리는 나라 맞는 나라 별별 유형을 다 들어 주시고 감당하시니 쉬실 기회가 없으시는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 먹이시고 입히시고 재워주시고 직장 주시고 사사로운 일까지 다 맡아 하시니 얼마나 바쁘시겠으며 얼마나 지혜로우셔야 합니까?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시는 것입니다.
일개 나라의 대통령도 자신의 5년의 임기를 수행하는데 해 먹겠느니 못 해 먹겠니?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우주를 주장하시고 나라를 경영하시고 내 인생을 다 주장하시니 얼마나 감사 한 일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보좌자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고, 그의 통치의 수단은 확실하고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통치에 거역하고 거스리는 자가 되지 말고 그의 통치에 아멘하고 받아드리는 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때가 되면 모든 사람,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사람이든, 부인하였던 사람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역사와 세상을 통치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스스로 멸망을 초래 할 뿐입니다.
애가3:37-38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그의 자녀가 되고
사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한 것처럼,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에서 읽어 들려 준 노래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를 일러 줍니다.
신32: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값으로 사서 속량하신 구속주이시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며,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여 어루만지시고, 강한 손으로 붙드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지으시고 사랑으로 보살피며 양육하시고, 인애와 긍휼을 더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어 만족하게 하십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구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하고 송사하거나 정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세상을 이기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시니 삶의 승리자가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은 주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그리고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및 시편 등에 사용되어 있는 바, 이스라엘이 왕국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을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자로 삼으라
여호와 하나님이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자기의 영광과 나라 및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들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언제라도 부리실 수 있는 존재들이며, 죄인들을 회개시키는데 쓰임 받기도 하며,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자기의 이름을 만군의 여호와로 나타내시던 때의 정황을 보면, 그 시대는 종교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불신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였고,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타락된 이 시대에 만군의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고자 열심을 내시는 거룩한 전사(warrior)이시다.
렘50:34 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반드시 그들 때문에 싸우시리니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리라
그래서 백성들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강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 했습니다.
그것은 마을 마을 마다 교회가 마을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번성기는 바로 기독교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쇠퇴는 기독교의 몰락과 함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동 베를린에 가 보았습니다.
통일전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가 망하였음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동 베를린과 동독지역은 가난과 범죄의 소굴이 되어 있어 사람들이 그 곳을 가기를 기피한다고 합니다.
북한 아무리 큰 소리 치지만 끝까지 하나님 부인하면 언제 망 할 줄 모릅니다.
국민들은 가난과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는 공산 정권 하나님 부인하는 정권 참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오기만 해도 은혜를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들에게 예배 시간에 나아오지 못하도록 핑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피곤하다, 집 안에 일이 생겼다, 아프다, 등등 이런 핑계는 하나님은 절대로 받아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고 열심히 성전에 올라 와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다윗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성전을 짓는 일에 사용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의 시편의 글 중에 보면 성전에 올라가기를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시120편-134편 솔로몬 등 해서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즐거움을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본 시편기자는 거쳐 할 곳이 없는 노숙자 내지는 무 주거자라는 것입니다.
가장 겁이 많은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철따라 날아다니는 철새인 제비 역시 새끼틀 보금자리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안식 할 집이 없는 방랑자 무주거자이었습니다.
그이 삶은 끊임없는 방황의식입니다.
목적과 의미가 없는 그리고 안식도 평안도 없는 삶 그 자체이었습니다
사람이 내 것이네 네 것이네 하며 아웅다웅하는 사는 이 세상은 사람이 만든 것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살아 갈 뿐입니다.
모두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삶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직면하면서 끝없는 방황 즉, 노숙자 무거주자임을 인식합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 그 해에 서두에 인본주의자들은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고 좋아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모든 고통을 모두 이겨내고 이제는 이 세상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평화가 왔고 서로 미워하지 않고 전쟁도 사라지며 모든 사람들이 조화 있게 살 것이라는 인간승리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해 7월 14일에 세계 대전이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환상들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찾지만 인생은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삶이 끝없는 방황의 모습입니다.
나하나 작은 몸이 쉴 곳이 없습니다.
조그만 참세와 철을 따라 날아다니는 제비도 안식 할 처소가 있고 새끼를 틀 둥지가 있는데 인생은 점점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기웃 거리지만 피곤하기만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도움 없이 찾고 찾지만 찾을 수 없습니다
현대를 염려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인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감을 두고 한 말이다.
인간의 두려움을 연구한 휴 미실딘 박사는 인간의 두려움은 영아기 때부터 3가지의 기초적 두려움의 연장선 이라고 말한다.
그 3가지 기초적 두려움은 떨어지는 두려움(Fear of falling),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Fear of loud noise), 버려지는 두려움(Fear of being aboned)이 그것이다.
영아기의 떨어지는 두려움은 성인이 되면서 실패의 두려움,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사고· 사건에 대한 두려움이 된다.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은 어른이 되어도 비판에 대한 두려움, 폭력이나 침범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이어진다. 버려지는 두려움은 인간 최대의 내적 두려움으로 고독과 불안이 주는 두려움, 헤어지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등으로 연결된다.
결국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평생 계속된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보면 두려움이 인간의 삶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에덴에서의 최초의 인류 아담 역시 두려워하며 나무 그늘 아래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용맹 할 것 같은 다윗과 같은 자들도 가드에서 블레셋의 왕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시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나이가 들거나 혹은 질병을 당하였을 때에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시71:9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이같이 사람은 누구든지 두려움에서 자유 할 자는 그 아무도 없습니다.
참새들을 한 번 보십시오.
얼마나 긴장해서 먹이를 찾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가까이에 가기도 전에 도망가 버립니다.
큰 새들, 독수리나 고양이나 다른 짐승들이 늘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참새는 더욱더 안전한 곳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곳이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주의 제단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복이라는 말은 최고의 축복이라는 의미로 행복함과 평안을 누리는 마음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행복감을 느끼는데 얼마나 평안한지 모릅니다
지금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들이며 지금 마음껏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 축복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등은 성전을 가리키거나 암시하는 용어들입니다.
지금 시인은 어떤 상황입니까?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2절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라고 말합니다.
이 복된 성전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사모한다는 말은 열망하다, 갈망하다는 뜻으로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그리워하며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열망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너무 그리워해서 몸이 아플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쇠약하다는 말은 배터리가 끝까지 방전된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진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아셔야 합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사랑스러운지요라는 말은 온 마음과 인격을 다해 주의 성전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할 수 없는 환경, 마음대로 성전에 갈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자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잘 압니다그래서 더욱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이 그립고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뭐라고 부르짖었습니까?
얼마나 성전을 사모하는지 제단 곁에서 자유롭게 집을 짓고 새끼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새들을 부러워 할 정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사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재차 이야기합니다.
어떤 복이 있습니까
3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왕이시니 그의 백성입니다
많은 자들이 안전하게 살기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살기를 싫어합니다.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강하신 왕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십니다.
어지시고 인자하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낮이지만 반대편은 지금 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나라 때문에 못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봄이 끝나고 여름에 접어들지만 반대편에는 가을이 끝나고 겨울에 접어들 것입니다.
열매를 익게 하시느라고 씨앗을 자라게 하시느라고 바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밤낮으로 일을 하셔야 하고 각각 처한 형편이 다르니 춥다고 하는 사람 덥다고 하는 사람
때리는 나라 맞는 나라 별별 유형을 다 들어 주시고 감당하시니 쉬실 기회가 없으시는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 먹이시고 입히시고 재워주시고 직장 주시고 사사로운 일까지 다 맡아 하시니 얼마나 바쁘시겠으며 얼마나 지혜로우셔야 합니까?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시는 것입니다.
일개 나라의 대통령도 자신의 5년의 임기를 수행하는데 해 먹겠느니 못 해 먹겠니?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우주를 주장하시고 나라를 경영하시고 내 인생을 다 주장하시니 얼마나 감사 한 일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보좌자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고, 그의 통치의 수단은 확실하고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통치에 거역하고 거스리는 자가 되지 말고 그의 통치에 아멘하고 받아드리는 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때가 되면 모든 사람,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사람이든, 부인하였던 사람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역사와 세상을 통치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은 스스로 멸망을 초래 할 뿐입니다.
애가3:37-38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그의 자녀가 되고
사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한 것처럼,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에서 읽어 들려 준 노래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를 일러 줍니다.
신32: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값으로 사서 속량하신 구속주이시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며,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여 어루만지시고, 강한 손으로 붙드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지으시고 사랑으로 보살피며 양육하시고, 인애와 긍휼을 더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어 만족하게 하십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구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하고 송사하거나 정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세상을 이기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시니 삶의 승리자가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은 주로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그리고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및 시편 등에 사용되어 있는 바, 이스라엘이 왕국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을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8: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자로 삼으라
여호와 하나님이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자기의 영광과 나라 및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을 다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들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언제라도 부리실 수 있는 존재들이며, 죄인들을 회개시키는데 쓰임 받기도 하며,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자기의 이름을 만군의 여호와로 나타내시던 때의 정황을 보면, 그 시대는 종교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불신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였고,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타락된 이 시대에 만군의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고자 열심을 내시는 거룩한 전사(warrior)이시다.
렘50:34 그들의 구원자는 강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반드시 그들 때문에 싸우시리니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리라
그래서 백성들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강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 했습니다.
그것은 마을 마을 마다 교회가 마을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크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번성기는 바로 기독교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쇠퇴는 기독교의 몰락과 함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동 베를린에 가 보았습니다.
통일전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가 망하였음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동 베를린과 동독지역은 가난과 범죄의 소굴이 되어 있어 사람들이 그 곳을 가기를 기피한다고 합니다.
북한 아무리 큰 소리 치지만 끝까지 하나님 부인하면 언제 망 할 줄 모릅니다.
국민들은 가난과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는 공산 정권 하나님 부인하는 정권 참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오기만 해도 은혜를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들에게 예배 시간에 나아오지 못하도록 핑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피곤하다, 집 안에 일이 생겼다, 아프다, 등등 이런 핑계는 하나님은 절대로 받아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고 열심히 성전에 올라 와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다윗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성전을 짓는 일에 사용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의 시편의 글 중에 보면 성전에 올라가기를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시120편-134편 솔로몬 등 해서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즐거움을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