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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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93회 작성일 2016-07-24 20:06본문
하박국 2:4-8 믿음으로 삽시다
포용하다 껴안다의 뜻을 가진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하는 내용이 이 하박국서입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주전 605년에 애굽을 무찌릅니다. 바벨론은 고대 근동의 패권자가 됩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도 압박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무너지기 20년 전이었습니다.
이때 활동한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정의를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데 언제까지 침묵을 지키십니까?
하나님은 왜 악한 세력인 바벨론을 일으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1:2-3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은 답답하여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침묵하실 것입니까? 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본문을 직역하면 폭력이요, 하고 내가 외쳐도 당신은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쉽게 말하면 감당할 수 없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도둑이야, 불이야 라고 외쳤는데도 이런 사회를 보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엎친데 겹친 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하박국의 요청에 왜 응답하지 않으시고,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대답이 떨어졌는데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깨달은 것은 응답을 받은 것은 그가 괴로워서 이해가 안 되어서 받아 드릴 수가 없어서 그것의 해결을 바라고 했던 그것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주신 응답이 깨달은 은혜가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그토록 그들이 바랐던 그 무엇을 주신 것도 아니요 주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곧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은 인간의 그 필요의 충족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요의 충족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요의 충족이 얼마나 믿음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 분 만을 믿는 그이 공로를 의지하는 것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공로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으므로 다만 그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산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해 하늘 보좌까지 버리시고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그리고는 죽기까지 하시고 저 음부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그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해서 구원받은 것이지 결코 나 자신의 그 무엇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의인은 자기의 필요를 그 무엇을 채워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호수에 광풍이 불어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히게 되어 죽는 줄 알고 죽을상이 되어 예수께 달려 와서 소리를 치며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까
하니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응 그래 하고 대답을 해 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죽게 되었다고 그러면 믿음으로 살아야지 믿음은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믿습니다 하고 있지만 진작 주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자같이 되어 버리고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잘못 알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은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위기 앞에는 믿음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믿음 생활을 하지만 내가 소유한 믿음이 얼마나 실력을 발휘하였습니까?
아니면 번번이 내 믿음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내 믿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실력을 발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당시의 세상이라고 대변이 되는 바벨론은 어떠합니까
결코 오늘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인이 그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실상을 살펴보면
5절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힌다고 합니다.
사망과 같다고 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다가옵니다.
그런데도 무덤과 사망은 족한 줄을 모르고 계속하여 사람을 삼키듯이 바벨론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면서도 족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국을 자기에게로 모으며 만민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은 쾌락으로 살고 욕심으로 살고
바벨론의 욕심이 세상의 욕심이요 나 인간의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은 술 취한 자같이 세상이 전부 자기 것 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착각은 음부처럼, 죽음처럼 욕심을 넓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다 가져도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욕심에 중독자들입니다.
세상은 다 욕심의 중독자이면서도 다른 욕심의 중독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6-8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솔직히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속삭이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지금은 힘이 없어서 너에게 당하고만 살지만, 언제가 힘만 주워지면 원수를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 내가 잘 되면 한번 본데를 보여 줄 거야입니다.
이게 세상의 심보입니다.
자꾸만 육신적인 것으로만 해결하고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주변의 나라가 내가 힘이 없어서 죽은 자 같이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힘만 생기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줄을 배워라 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삶을 살아 왔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삶의 방식도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링컨은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져라고 합니다.
한 4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면 이미 삶의 방식이 몸에 배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꾸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의 자유하는 삶을 허락하였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장소이동을 하고 환경이동을 하는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홍해라는 상황이 더 이상 나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삶의 정신이 바꿔야 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반복되는 형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그들에게 남아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동안 세상의 노예근성으로 찌들었습니다.
육적인 삶으로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해 앞에서 육신적인 근성을 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14:10-12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들의 삶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세상 방식으로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이런 과거 노예의식을 청산하지 아니하고는 이들에게서 어떤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습니다.
애굽의 노예라고 하는 억압된 상황이 수백 년 지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노예지식이 몸에 배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런 노예의식과 패배의식을 갖고서는 가나안의 자유를 주었지만 애굽의 종살이의 실력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홍해는 무엇입니까?
애굽을 씻어 내는 세례의 도구입니다.
출애굽기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 홍해를 통하여 애굽적인 노예근성의 정신 상태를 씻어내야 할 것은 씻어내고 벗어버려야 할 것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의 세상적인 생각이나 의식을 모두 홍해의 깊은 물에 장사지내고 씻어내기 위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홍해를 건너기를 주저하지 말고 건너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정신 상태를 가지고는 그 땅의 기업과 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세상에 노예의식 세상에 패배의식으로는 새 땅에 들어갈 수 없으니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통하여 과거 노예의식 사로잡힌 것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 홍해를 건넘으로 그들이 새롭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홍해가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홍해를 통하여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예수 안에서 많은 축복을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르심을 받지 않는 자 같이 세속적인 종으로 살아갑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가지고 있는 뜻은 무엇입니까
의인이란 더 이상 세상적인 보상관념에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행하면 무엇이 올까가 문제가 아니고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 그것만을 따지는 것입니다.
악은 천만금이 생겨도 악이고 의는 생명의 위협이 와도 의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떤 보상 개념으로 자기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이란 그 누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할지라도 그 잘 산다는 것이 악에서 나오는 것일 때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고 아무리 가난하여도 그 사람이 의의 생활을 할 때 그 의를 몹시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율법의 의로 돌아가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이고, 받은 구원도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지금 하박국은 믿음으로 산다면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즉 그 분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도 좋지만 무엇을 잃고도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 참으로 의인의 신앙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세상 만물이 다 상실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으로 된 것을 최대 만족을 삼을 수 있는 이 사람이 참 의인이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소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고상한 축복인 줄 알기 때문에 과거에 좋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왜 내 인생의 광야 길을 이렇게 힘겹게 걷게 하신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신명기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포용하다 껴안다의 뜻을 가진 선지자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하는 내용이 이 하박국서입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주전 605년에 애굽을 무찌릅니다. 바벨론은 고대 근동의 패권자가 됩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도 압박하였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무너지기 20년 전이었습니다.
이때 활동한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정의를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데 언제까지 침묵을 지키십니까?
하나님은 왜 악한 세력인 바벨론을 일으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1:2-3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은 답답하여 부르짖었으나,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침묵하실 것입니까? 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된 본문을 직역하면 폭력이요, 하고 내가 외쳐도 당신은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쉽게 말하면 감당할 수 없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도둑이야, 불이야 라고 외쳤는데도 이런 사회를 보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엎친데 겹친 식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하박국의 요청에 왜 응답하지 않으시고,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대답이 떨어졌는데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깨달은 것은 응답을 받은 것은 그가 괴로워서 이해가 안 되어서 받아 드릴 수가 없어서 그것의 해결을 바라고 했던 그것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주신 응답이 깨달은 은혜가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그토록 그들이 바랐던 그 무엇을 주신 것도 아니요 주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곧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은 인간의 그 필요의 충족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요의 충족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요의 충족이 얼마나 믿음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 분 만을 믿는 그이 공로를 의지하는 것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공로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으므로 다만 그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산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위해 하늘 보좌까지 버리시고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그리고는 죽기까지 하시고 저 음부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그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해서 구원받은 것이지 결코 나 자신의 그 무엇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의인은 자기의 필요를 그 무엇을 채워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호수에 광풍이 불어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히게 되어 죽는 줄 알고 죽을상이 되어 예수께 달려 와서 소리를 치며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까
하니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응 그래 하고 대답을 해 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죽게 되었다고 그러면 믿음으로 살아야지 믿음은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8:22-25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믿습니다 하고 있지만 진작 주님 앞에서 믿음이 없는 자같이 되어 버리고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잘못 알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은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위기 앞에는 믿음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믿음 생활을 하지만 내가 소유한 믿음이 얼마나 실력을 발휘하였습니까?
아니면 번번이 내 믿음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내 믿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실력을 발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당시의 세상이라고 대변이 되는 바벨론은 어떠합니까
결코 오늘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인이 그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 실상을 살펴보면
5절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힌다고 합니다.
사망과 같다고 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다가옵니다.
그런데도 무덤과 사망은 족한 줄을 모르고 계속하여 사람을 삼키듯이 바벨론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면서도 족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국을 자기에게로 모으며 만민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은 쾌락으로 살고 욕심으로 살고
바벨론의 욕심이 세상의 욕심이요 나 인간의 욕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은 술 취한 자같이 세상이 전부 자기 것 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착각은 음부처럼, 죽음처럼 욕심을 넓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다 가져도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욕심에 중독자들입니다.
세상은 다 욕심의 중독자이면서도 다른 욕심의 중독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6-8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솔직히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속삭이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지금은 힘이 없어서 너에게 당하고만 살지만, 언제가 힘만 주워지면 원수를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 내가 잘 되면 한번 본데를 보여 줄 거야입니다.
이게 세상의 심보입니다.
자꾸만 육신적인 것으로만 해결하고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주변의 나라가 내가 힘이 없어서 죽은 자 같이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힘만 생기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줄을 배워라 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삶을 살아 왔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삶의 방식도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링컨은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져라고 합니다.
한 4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면 이미 삶의 방식이 몸에 배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꾸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의 자유하는 삶을 허락하였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장소이동을 하고 환경이동을 하는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홍해라는 상황이 더 이상 나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삶의 정신이 바꿔야 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반복되는 형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그들에게 남아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동안 세상의 노예근성으로 찌들었습니다.
육적인 삶으로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해 앞에서 육신적인 근성을 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14:10-12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들의 삶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세상 방식으로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이런 과거 노예의식을 청산하지 아니하고는 이들에게서 어떤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습니다.
애굽의 노예라고 하는 억압된 상황이 수백 년 지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노예지식이 몸에 배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런 노예의식과 패배의식을 갖고서는 가나안의 자유를 주었지만 애굽의 종살이의 실력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홍해는 무엇입니까?
애굽을 씻어 내는 세례의 도구입니다.
출애굽기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이 홍해를 통하여 애굽적인 노예근성의 정신 상태를 씻어내야 할 것은 씻어내고 벗어버려야 할 것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의 세상적인 생각이나 의식을 모두 홍해의 깊은 물에 장사지내고 씻어내기 위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홍해를 건너기를 주저하지 말고 건너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정신 상태를 가지고는 그 땅의 기업과 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세상에 노예의식 세상에 패배의식으로는 새 땅에 들어갈 수 없으니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통하여 과거 노예의식 사로잡힌 것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 홍해를 건넘으로 그들이 새롭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홍해가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홍해를 통하여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예수 안에서 많은 축복을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르심을 받지 않는 자 같이 세속적인 종으로 살아갑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가지고 있는 뜻은 무엇입니까
의인이란 더 이상 세상적인 보상관념에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행하면 무엇이 올까가 문제가 아니고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 그것만을 따지는 것입니다.
악은 천만금이 생겨도 악이고 의는 생명의 위협이 와도 의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떤 보상 개념으로 자기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이란 그 누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할지라도 그 잘 산다는 것이 악에서 나오는 것일 때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고 아무리 가난하여도 그 사람이 의의 생활을 할 때 그 의를 몹시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율법의 의로 돌아가면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이고, 받은 구원도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지금 하박국은 믿음으로 산다면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즉 그 분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도 좋지만 무엇을 잃고도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이 참으로 의인의 신앙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세상 만물이 다 상실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내 하나님으로 된 것을 최대 만족을 삼을 수 있는 이 사람이 참 의인이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소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고상한 축복인 줄 알기 때문에 과거에 좋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왜 내 인생의 광야 길을 이렇게 힘겹게 걷게 하신 줄을 아시기 바랍니다.
신명기8: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