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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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97회 작성일 2016-11-06 21:05본문
빌립보서4:4-7 하나님의 평강
지금의 시대는 매우 우울하고 그리고 불안해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시대를 논하지 않더라도 인생은 참으로 여러 가지로 두렵고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음을 너나 모두 그렇게 여겨집니다.
사실 이 시대에서 이 세상에는 나라를 봐도 가정을 봐도 그리고 내 자신을 보아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자리에 진정 나는 평안해 하고 평안함을 말 할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인생이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누리고 싶은 그 평안을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그 평안을 하나님의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허락하신다는 기쁨 소식이 있습니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인생이 화해의 결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완벽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잘 하였기 때문에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 주시는 평안입니다.
나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하나님의 평안을 내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 오는 하나님의 평안함입니다.
곧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 아니 내 마음에 평안한 분으로 계십니다.
즉, 주께서 가까우시느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아23:23-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평안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3가지로 표현이 됩니다.
일상생활에 기쁨이 있으며 그리고 모든 이에게 관용하는 마음이요 더 이상 세상일로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기쁨은 주 안에서 있는 기쁨입니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 할 수 있음은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어른과 아이의 차이를 연구를 했는데 여러 차이 중에서 특별한 것은 하루에 몇 번이나 웃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 15-20번 정도 웃습니다.
사실 어떤 분은 하루 한번을 웃는 것을 보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무표정 이거 참으로 무섭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데도 웃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안 웃습니다.
웃음의 빈도가 나이와 함께 낮아지는 데 그런데도 정 안 웃으면 그 때는 하나님이 데려 가시는 겁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로마의 음침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기쁨의 원천이라면 바울은 감옥에서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갇힌 바울이 자유하는 자들에게 권합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할렐루야
무슨 이유로 예수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주님 안에 있으면 항상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음은 그의 성령으로 함께 하는 자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기쁨이 아니라 예수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6:22-24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린도후서7: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예수가 함께 하는 곳 그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 그리고 그 영의 인도함을 받는 곳은 그 곳이 어디인지 기쁨이 함께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를 핍박하는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네로 혹은 도미티아누스, 디오클에티안 황제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살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 밥이 되게 했으며 산채로 불에 태워 화형을 하였고 나아가 밤에 가로등처럼 쓰기 위하여 사람의 몸에 기름을 발라 대나무 창으로 사람의 몸을 관통 시켜 메달은 후 밤새 밤을 밝히는 불빛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움이요 가의 기절하기 일분전 일 것인데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음 앞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어린아이를 꼭 안고 굶주린 사자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순교 한단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니 이제 조금 후에 우리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나자
애고 애고 애곡이 아니라 슬픔이 달아나고 기쁨이 충만해 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1:3-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시야51:11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평강의 주님을 가까이 하는 자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는 자입니다.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친절, 용서, 인내, 사랑을 포함한 단어입니다.
이런 관용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이 자연스럽게 삶을 통해 이웃에게 나타나는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감격을 깨달을 때, 십자가의 용서를 알 때, 스테반 집사와 같이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향하여 온갖 욕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함을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인색하고 화도 잘 내고 작은 일에도 심하게 따지면서 다투고, 남의 잘못을 절대로 쉽게 용서하지 않고, 화를 풀지 않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안에서 있는 참된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기쁨이 없는데 나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나 아닌 이웃에게 친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새가 노래하는 줄 몰랐습니다.
무조건 운다는 표현을 함으로 슬픔이 많은 민족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언제부터 새가 노래하는 줄 알았습니까
서구 기독교 문명이 영어가 들어오고 부터입니다. 복음이 들어오고부터입니다.
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가서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이윤복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라는 이윤복 소년의 가족 역시 그 삶의 현실이 고달팠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찌들어 살았고 어머니는 윤복이가 초교 1학년 때 집을 나가버렸다. 그때부터 동생 셋을 돌보는 소년 가장이었습니다. 윤복이는 깡통을 들고 이집 저집 밥 동냥을 하러 다녀야 했고, 껌팔이와 구두닦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윤복이의 얘기가 알려진 것은 일기장 덕분인데 담임선생님이 발견하고 적은 일기를 1964년 책으로 펴냈고, 이후 세간의 화제가 된 윤복이 일기장을 바탕으로 김수용 감독이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고, 온 국민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일본 등 동남아 지역에서도 상영됐고 영화가 나온 뒤 대구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격려편지와 성금이 답지했고 심지어 외국에서도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영화 제작을 계기로 윤복이 네는 일어섰고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집을 나갔던 어머니도 돌아왔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끊지 못했고 어머니는 다시 집을 나갔고 어떻게 되었는지 집안 형편은 다시 어려워졌고 또 다시 인생을 그는 행복하기 보다는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제목처럼 슬픔 쪽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 우울한 사람의 되어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간염 악화로 슬픔의 인생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윤복이에게 찾아온 세상적인 축복의 기회도 결코 행복이 되지 못하였고 역시 슬픔을 노래하고 말았습니다.
대구의 대명동에 역시 남산 초등학교에 다니는 윤복군과 나이가 똑같은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 윤복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일날만 되면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고 윤복군과 같은 대박이 터지는 일이 없지만 그 꿈을 꺾지 않고 하나하나 이루고 꿈을 오늘도 꾸고 있었습니다. 윤복군은 힘겨운 삶을 연약한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려고 하니 온통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찼고 좀 더 나은 삶이 왔지만 그것 또한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또 다른 슬픔의 요소가 그를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슬픔은 자신을 참으로 슬픈 인생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깡통을 차고 밥을 얻으려 다니지는 않았지만 한 때는 잘 집도 없어 여기 저기 다니기도 하고 먹을 양식이 없어 배를 쫄쫄 굶은 경험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매주 다니는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꿈이요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아이는 자라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지만 역시 하나님이 꿈이요 그의 힘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여러분도 말 하면은 아하 이 사람이구나 할 것입니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주철이라는 자입니다.
내가 기쁘면 다 기쁨니다.
이사야5511-13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가정에서 관용하기 바랍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며느리에게 시부모님에게 형제들에게 자녀들에게 관용하기 바랍니다. 직장에서도 관용하길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관용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것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평안의 관계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초조와 불안과 고민을 말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일들 속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 때, 나의 사람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고 그러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염려의 문제는 염려한다고 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가지고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6:28-30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필히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왜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염려는 먼저 무엇을 구해야 하는 우선순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염려 대신에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주의 뜻 안에서 감사함으로 내 자신을 주께 맡기는 헌신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평강은 모든 지적이해 관계를 초월합니다.
한 인간이 살아오던 세계가 무너져 버리는 위기의 순간에 부와 명성과 권력과 지위가 무너지는 동시에 나라는 인생이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 지금 이 시대를 잘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준 것은 세상이 빼앗아 갑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를 위해서라면 즐거이 내 소유를 내어 놓을 삶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평강은 나의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 평안은 나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는 파수꾼과 같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매우 우울하고 그리고 불안해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시대를 논하지 않더라도 인생은 참으로 여러 가지로 두렵고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음을 너나 모두 그렇게 여겨집니다.
사실 이 시대에서 이 세상에는 나라를 봐도 가정을 봐도 그리고 내 자신을 보아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 자리에 진정 나는 평안해 하고 평안함을 말 할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인생이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누리고 싶은 그 평안을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그 평안을 하나님의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허락하신다는 기쁨 소식이 있습니다.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인생이 화해의 결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완벽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잘 하였기 때문에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 주시는 평안입니다.
나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하나님의 평안을 내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 오는 하나님의 평안함입니다.
곧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 아니 내 마음에 평안한 분으로 계십니다.
즉, 주께서 가까우시느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아23:23-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평안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3가지로 표현이 됩니다.
일상생활에 기쁨이 있으며 그리고 모든 이에게 관용하는 마음이요 더 이상 세상일로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기쁨은 주 안에서 있는 기쁨입니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 할 수 있음은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 자체가 기쁨의 원천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어른과 아이의 차이를 연구를 했는데 여러 차이 중에서 특별한 것은 하루에 몇 번이나 웃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하루에 400-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 15-20번 정도 웃습니다.
사실 어떤 분은 하루 한번을 웃는 것을 보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무표정 이거 참으로 무섭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데도 웃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안 웃습니다.
웃음의 빈도가 나이와 함께 낮아지는 데 그런데도 정 안 웃으면 그 때는 하나님이 데려 가시는 겁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로마의 음침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기쁨의 원천이라면 바울은 감옥에서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갇힌 바울이 자유하는 자들에게 권합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할렐루야
무슨 이유로 예수로 인하여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주님 안에 있으면 항상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음은 그의 성령으로 함께 하는 자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기쁨이 아니라 예수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6:22-24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고린도후서7: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예수가 함께 하는 곳 그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 그리고 그 영의 인도함을 받는 곳은 그 곳이 어디인지 기쁨이 함께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를 핍박하는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네로 혹은 도미티아누스, 디오클에티안 황제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살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 밥이 되게 했으며 산채로 불에 태워 화형을 하였고 나아가 밤에 가로등처럼 쓰기 위하여 사람의 몸에 기름을 발라 대나무 창으로 사람의 몸을 관통 시켜 메달은 후 밤새 밤을 밝히는 불빛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움이요 가의 기절하기 일분전 일 것인데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음 앞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어린아이를 꼭 안고 굶주린 사자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순교 한단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니 이제 조금 후에 우리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나자
애고 애고 애곡이 아니라 슬픔이 달아나고 기쁨이 충만해 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1:3-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시야51:11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평강의 주님을 가까이 하는 자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는 자입니다.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친절, 용서, 인내, 사랑을 포함한 단어입니다.
이런 관용은 예수 안에서의 기쁨이 자연스럽게 삶을 통해 이웃에게 나타나는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감격을 깨달을 때, 십자가의 용서를 알 때, 스테반 집사와 같이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향하여 온갖 욕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함을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인색하고 화도 잘 내고 작은 일에도 심하게 따지면서 다투고, 남의 잘못을 절대로 쉽게 용서하지 않고, 화를 풀지 않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안에서 있는 참된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기쁨이 없는데 나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나 아닌 이웃에게 친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새가 노래하는 줄 몰랐습니다.
무조건 운다는 표현을 함으로 슬픔이 많은 민족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언제부터 새가 노래하는 줄 알았습니까
서구 기독교 문명이 영어가 들어오고 부터입니다. 복음이 들어오고부터입니다.
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가서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이윤복이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라는 이윤복 소년의 가족 역시 그 삶의 현실이 고달팠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찌들어 살았고 어머니는 윤복이가 초교 1학년 때 집을 나가버렸다. 그때부터 동생 셋을 돌보는 소년 가장이었습니다. 윤복이는 깡통을 들고 이집 저집 밥 동냥을 하러 다녀야 했고, 껌팔이와 구두닦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윤복이의 얘기가 알려진 것은 일기장 덕분인데 담임선생님이 발견하고 적은 일기를 1964년 책으로 펴냈고, 이후 세간의 화제가 된 윤복이 일기장을 바탕으로 김수용 감독이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고, 온 국민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일본 등 동남아 지역에서도 상영됐고 영화가 나온 뒤 대구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격려편지와 성금이 답지했고 심지어 외국에서도 편지가 날아들었습니다. 영화 제작을 계기로 윤복이 네는 일어섰고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집을 나갔던 어머니도 돌아왔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끊지 못했고 어머니는 다시 집을 나갔고 어떻게 되었는지 집안 형편은 다시 어려워졌고 또 다시 인생을 그는 행복하기 보다는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제목처럼 슬픔 쪽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 우울한 사람의 되어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간염 악화로 슬픔의 인생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윤복이에게 찾아온 세상적인 축복의 기회도 결코 행복이 되지 못하였고 역시 슬픔을 노래하고 말았습니다.
대구의 대명동에 역시 남산 초등학교에 다니는 윤복군과 나이가 똑같은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 윤복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일날만 되면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고 윤복군과 같은 대박이 터지는 일이 없지만 그 꿈을 꺾지 않고 하나하나 이루고 꿈을 오늘도 꾸고 있었습니다. 윤복군은 힘겨운 삶을 연약한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려고 하니 온통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찼고 좀 더 나은 삶이 왔지만 그것 또한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또 다른 슬픔의 요소가 그를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슬픔은 자신을 참으로 슬픈 인생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깡통을 차고 밥을 얻으려 다니지는 않았지만 한 때는 잘 집도 없어 여기 저기 다니기도 하고 먹을 양식이 없어 배를 쫄쫄 굶은 경험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매주 다니는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꿈이요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그 아이는 자라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지만 역시 하나님이 꿈이요 그의 힘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여러분도 말 하면은 아하 이 사람이구나 할 것입니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주철이라는 자입니다.
내가 기쁘면 다 기쁨니다.
이사야5511-13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가정에서 관용하기 바랍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며느리에게 시부모님에게 형제들에게 자녀들에게 관용하기 바랍니다. 직장에서도 관용하길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관용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것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갖는 평안의 관계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초조와 불안과 고민을 말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일들 속에는 나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 때, 나의 사람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 수 있고 그러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염려의 문제는 염려한다고 해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가지고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6:28-30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필히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왜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염려는 먼저 무엇을 구해야 하는 우선순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염려 대신에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주의 뜻 안에서 감사함으로 내 자신을 주께 맡기는 헌신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평강은 모든 지적이해 관계를 초월합니다.
한 인간이 살아오던 세계가 무너져 버리는 위기의 순간에 부와 명성과 권력과 지위가 무너지는 동시에 나라는 인생이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 지금 이 시대를 잘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준 것은 세상이 빼앗아 갑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를 위해서라면 즐거이 내 소유를 내어 놓을 삶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평강은 나의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세상에서 방황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 평안은 나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는 파수꾼과 같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