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골육 친척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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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85회 작성일 2017-01-29 07:25본문
로마서 9:1-8 형제 골육 친척을 위하여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죤.낙스는 하나님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영국 수상 윈스톤 처칠이 1965.1.24일 서거하자 런던의 신문은 다음과 같이 그의 애국자 됨을 칭찬했습니다
그는 영국을 불명예스럽게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이며, 영국의 체면을 손상 시키느니 차라리 영국을 파멸시켰을 것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모두가 애국 애족하는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자기 가족, 자기 민족을 사랑합니다. 이는 인간 본능입니다.
그러나 애국 애족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애국애족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도조 히데키 독일의 히틀러 이태리의 무솔리니 같은 사람들은 열렬한 애국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망쳐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극한 이기적인 국수주의에 메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함께 잘 살아 보겠다는 배타 정신 보다는 나만을 생각하는 자기들 밖에 모르는 애국의 정신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자신들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나라와 민족은 역사상에서 오래가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인류의 생사화복과 국가민족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럼 하나님 중심의 애국 애족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성경이나 역사적인 인물들을 보면 신앙인들은 모두가 빠짐없이 애국 애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사무엘, 에스더, 예레미야, 다니엘, 오늘 본문의 바울 등이 그러했습니다.
한국 일제 강점기 때에도 기독 신앙의 정신을 가진 자들이 헌신하며 애국 애족을 많이 하였다는 사실적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3·1 독립선언문을 생명을 걸고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열여섯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본문의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 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로써 바울은 기독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애족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설날의 명절을 통하여 혈육의 정, 골육의 친척의 정신으로만 명절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한 형제가 되는 일에 힘을 썼으면 합니다.
골육을 구원을 위한 진정한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대체로 내 부모 형제 내 자녀가 육신적으로 잘 되지 못한 근심은 많이 하는데 믿음 생활에 대한 근심은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은 내 동족이 그리스도를 불신하므로 하는 근심
그 가운데서 바울 자신을 믿어 주지 아니하는 근심이었습니다
남이 아닌 골육이 불신에 대한 솔직한 고통을 표시했습니다.
골육친척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바울을 반역자같이 여기고 잡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받아서 가는 곳마다 전도 길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은 더욱 구원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골육친척의 구원이 긴요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구원이 확신하지 않는 자는 내 형제 자매의 구원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관심이 없고 애타는 근심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신앙도 잘 보장 못하는 사람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잇기에 내 골육과 친척과 동족이 같이 믿어야 근심이 없어지고 믿어야 평안한 것을 발견한다고 하였습니다.
내 가족의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적인 그것으로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는데도 평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10:34-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복음이 들어가는 가정마다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근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멸망 받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근심하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안식일이면 동족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골육 형제들에게 매를 맞고 옥에 투옥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주하지 않고 불신한 그들의 결과가 멸망할 것을 생각할 때 간장이 끊어지는 고통과 근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 가족들에게 골육에게 가지는 정상적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망하는 것은 볼 수가 없으니 복음전도가 급선무인 것을 재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고생해도 나만은 편하게 살고 남들이 다 죽어도 나만은 살아야겠다는 사람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태도를 취한 바울이었습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되겠지
이것은 결코 자기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나만 잘 되면 되겠지 아닙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에스겔3:17-21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나만이 구원은 결코 없습니다.
즉 동족을 구원을 위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하는 것은 동족을 위한 구원을 위한 헌신이 없는 나 역시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는데 찾아오는 어려움은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자신의 육신적인 헌신에 따르는 어려움을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3-28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동족 유대인들에게 받은 수모와 학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분노를 느낄 만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유대인들을 나의 형제라고 말하며 골육의 친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유대인은 바울을 증오했지만 그는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고 진정한 형제와 골육의 사랑을 했습니다.
기꺼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고 형제의 구원을 이루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동족을 위한 헌신은 진정성이 있는 것이요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촌의 밭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근심과 고통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확실한 보증이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그저 지나가면서 한 번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동족이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좋고 안 믿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안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꼭 믿어야 할 터인데 믿지 않으니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들도 유대 민족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게 되도록 기도하게 하려고 그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도 내 동족이 구원을 받는다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구원의 은혜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며 동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의 깊이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말을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추방될지라도, 혹은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의 분리를 선고 받을지라도로 번역이 됩니다.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만큼 자기 동족의 구원을 갈망하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면 할 수가 있다면 내가 대신하겠다는 정신을 가지지 않습니까
자식이 아파하니 하는 말이 내가 대신 아파 주었으면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저주의 결과를 전제한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바울과 같은 골육 형제 동족애를 가진다면 구원받지 못할 자가 거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지옥의 고통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분리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 끔찍한 고통을 자청하면서까지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바울의 열정은 진정히 바라는 열정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로라.
미완료시제로서 바라다, 기원하다, 염원하다, 기도하다는 뜻이다.
내 삶에 가장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가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즉 동족 구원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전도의 가장 시급한 대상자는 물론 가족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그도 역시 무엇다도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바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배척하며 그를 핍박하자 마음에 큰 고통 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이와 같이 먼저 자신의 민족과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을 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 제 일 먼저 그의 형제인 베드로를 전도했고, 야고보와 요한도 한 형제로 써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생명을 걸 고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 준 후 자신의 구원의 약속을 받은 라합은 그들에게 꼭 부탁하는 내용이 잇습니다.
여호수아2:8-14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가족, 친척에게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습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그 가족을 구원하고 다윗의 증조부가 되는 보아스를 낳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녀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남지 않았습니까?
내 골육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민족과 교회를 위해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 속하신 영원히 빛나는 이름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죤.낙스는 하나님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영국 수상 윈스톤 처칠이 1965.1.24일 서거하자 런던의 신문은 다음과 같이 그의 애국자 됨을 칭찬했습니다
그는 영국을 불명예스럽게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이며, 영국의 체면을 손상 시키느니 차라리 영국을 파멸시켰을 것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모두가 애국 애족하는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자기 가족, 자기 민족을 사랑합니다. 이는 인간 본능입니다.
그러나 애국 애족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애국애족은 엄청난 재앙을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도조 히데키 독일의 히틀러 이태리의 무솔리니 같은 사람들은 열렬한 애국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망쳐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극한 이기적인 국수주의에 메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함께 잘 살아 보겠다는 배타 정신 보다는 나만을 생각하는 자기들 밖에 모르는 애국의 정신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자신들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나라와 민족은 역사상에서 오래가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인류의 생사화복과 국가민족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럼 하나님 중심의 애국 애족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성경이나 역사적인 인물들을 보면 신앙인들은 모두가 빠짐없이 애국 애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사무엘, 에스더, 예레미야, 다니엘, 오늘 본문의 바울 등이 그러했습니다.
한국 일제 강점기 때에도 기독 신앙의 정신을 가진 자들이 헌신하며 애국 애족을 많이 하였다는 사실적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3·1 독립선언문을 생명을 걸고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열여섯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본문의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인 이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로써 바울은 기독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애족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설날의 명절을 통하여 혈육의 정, 골육의 친척의 정신으로만 명절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한 형제가 되는 일에 힘을 썼으면 합니다.
골육을 구원을 위한 진정한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대체로 내 부모 형제 내 자녀가 육신적으로 잘 되지 못한 근심은 많이 하는데 믿음 생활에 대한 근심은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근심은 내 동족이 그리스도를 불신하므로 하는 근심
그 가운데서 바울 자신을 믿어 주지 아니하는 근심이었습니다
남이 아닌 골육이 불신에 대한 솔직한 고통을 표시했습니다.
골육친척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바울을 반역자같이 여기고 잡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받아서 가는 곳마다 전도 길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은 더욱 구원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골육친척의 구원이 긴요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구원이 확신하지 않는 자는 내 형제 자매의 구원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무런 관심이 없고 애타는 근심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신앙도 잘 보장 못하는 사람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잇기에 내 골육과 친척과 동족이 같이 믿어야 근심이 없어지고 믿어야 평안한 것을 발견한다고 하였습니다.
내 가족의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적인 그것으로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가 없는데도 평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10:34-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복음이 들어가는 가정마다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근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멸망 받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근심하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안식일이면 동족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골육 형제들에게 매를 맞고 옥에 투옥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주하지 않고 불신한 그들의 결과가 멸망할 것을 생각할 때 간장이 끊어지는 고통과 근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 가족들에게 골육에게 가지는 정상적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망하는 것은 볼 수가 없으니 복음전도가 급선무인 것을 재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고생해도 나만은 편하게 살고 남들이 다 죽어도 나만은 살아야겠다는 사람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태도를 취한 바울이었습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되겠지
이것은 결코 자기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나만 잘 되면 되겠지 아닙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에스겔3:17-21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나만이 구원은 결코 없습니다.
즉 동족을 구원을 위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하는 것은 동족을 위한 구원을 위한 헌신이 없는 나 역시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는데 찾아오는 어려움은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자신의 육신적인 헌신에 따르는 어려움을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11:23-28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동족 유대인들에게 받은 수모와 학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분노를 느낄 만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유대인들을 나의 형제라고 말하며 골육의 친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유대인은 바울을 증오했지만 그는 유대인을 미워하지 않고 진정한 형제와 골육의 사랑을 했습니다.
기꺼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고 형제의 구원을 이루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동족을 위한 헌신은 진정성이 있는 것이요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촌의 밭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근심과 고통이 그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확실한 보증이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일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그저 지나가면서 한 번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동족이 자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좋고 안 믿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안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꼭 믿어야 할 터인데 믿지 않으니 큰 근심이 되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들도 유대 민족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게 되도록 기도하게 하려고 그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도 내 동족이 구원을 받는다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유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구원의 은혜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며 동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의 깊이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말을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추방될지라도, 혹은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의 분리를 선고 받을지라도로 번역이 됩니다.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만큼 자기 동족의 구원을 갈망하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면 할 수가 있다면 내가 대신하겠다는 정신을 가지지 않습니까
자식이 아파하니 하는 말이 내가 대신 아파 주었으면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저주의 결과를 전제한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바울과 같은 골육 형제 동족애를 가진다면 구원받지 못할 자가 거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지옥의 고통은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분리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 끔찍한 고통을 자청하면서까지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바울의 열정은 진정히 바라는 열정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로라.
미완료시제로서 바라다, 기원하다, 염원하다, 기도하다는 뜻이다.
내 삶에 가장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가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즉 동족 구원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전도의 가장 시급한 대상자는 물론 가족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그도 역시 무엇다도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바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배척하며 그를 핍박하자 마음에 큰 고통 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이와 같이 먼저 자신의 민족과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을 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후 제 일 먼저 그의 형제인 베드로를 전도했고, 야고보와 요한도 한 형제로 써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생명을 걸 고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 준 후 자신의 구원의 약속을 받은 라합은 그들에게 꼭 부탁하는 내용이 잇습니다.
여호수아2:8-14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가족, 친척에게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습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그 가족을 구원하고 다윗의 증조부가 되는 보아스를 낳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녀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남지 않았습니까?
내 골육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민족과 교회를 위해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 속하신 영원히 빛나는 이름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