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달려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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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65회 작성일 2017-04-30 06:52본문
디모데후서4:6-8 나의 달려갈 길
아이디 햇살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2006년이 시작되면서 갑상선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그즈음에 내 주변에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인 사람이 세 사람 더 있어 나까지 네 명이 암투병중이었다.
위암을 앓던 시누이는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이미 식도까지 전이가 되어 손도 대지 못하고 그냥 닫았다.
몇 개월 투병하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간암을 앓던 분도 수술을 하고 병세가 호전되어 나은 줄 알았는데 결국 이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한 교회를 섬기던 집사님은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다 나은 듯 교회도 잘 나오시고 하시더니 다리 신경 쪽으로 전이가 되셔서 걸을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시고 잘 걷지 못하시다가 말기 암의 고통을 겪으시고 엊그제 천국으로 가셨다.
내 주변에서 함께 투병하며 아픔을 공유하던 분들이라
유달리 마음이 많이 가고 안쓰러웠는데 이제 말기 암의 고통에서는 자유로워 지셨겠지만 애석한 마음이다.
동료들이 떠나가고 아직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나는 내가 걸어 가야할 남은 나의 길을 헤아려 본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에 자기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며 사명의 길을 갔는데 나 역시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하여 달려가리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인생 여정을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역시 자신의 달려 갈 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본문의 배경은 바울이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려고 하면서 에베소 교회 리더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그에게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린다고 말씀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가 가는 길에는 내 생명을 다 드려도 가야 할 사명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성령께서 직접 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바울의 걸음을 말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갈 길은 맡기신 복음 전파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이요 내 삶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놀라운 일은 이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바울은 그것을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목숨을 걸고 달려가는 사람이 상실하기 쉬운 것은 기쁨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알고 그 은혜로 일하는 사람은 복음의 사역을 억지로 전하지 않습니다.
감격과 기쁨 가운데 전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역에 감당하기가 최선을 다하기가 희생과 헌신을 하는데 그것을 행하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행하고 있는지요?
다른 사람보다도 열심히 더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불평과 불만과 원망입니다.
구속하신 분께 매인 자의 삶
하나는 성령에 매여이고, 또 하나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입니다.
성도의 삶의 방식은 매 순간의 삶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이고, 그 삶의 길의 끝에 자리하는 것, 즉 목적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언제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 사명 앞에서 생명조차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영의 인도함을 받지 않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순간 성도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메이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명이란 사신이 왕으로부터 부여 받은 특별한 임무/명령이라고 합니다.
왕으로 부터 받은 특별한 임무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나 자신의 뜻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명은 하나님으로 나왔고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열정과 목숨을 걸었습니다.
내 인생이 복음을 위한 인생임을 아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자신에게 부여하신 인생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고 방황합니다.
솔로몬은 사명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는 인간적으로 최고를 가지고 누렸다고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고 허된 일이 라고 합니다
전도서1:1-2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10-11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바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에 열정과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난 2000년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사랑의 유효기간에 관한 연구입니다.
2년간 남녀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남녀가 가슴 뛰는 사랑을 나누는 기간은 대체로 18-30개월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사랑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을 단순히 뇌 속의 화학작용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것인 지나친 감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하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뒤에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머리, 가슴, 온 몸에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사랑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 내 이름으로는 살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으로만 살겠습니다.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 , 달려서라도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합니다.
20-30개월 만에 끝나는 화학적인 생물학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랑이 더 깊어 갑니다.
이제 주를 위해 죽으려 길을 나섭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변함없이 누군가의 사랑에 매여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랑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무조전적인 사랑, 변함없는 사람, 영원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받은 은혜의 복음에 구원 받았다면, 진정 우리가 받은 복음이 은혜이고 감격이라면 우리 역시 복음 전파 사명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다윗은 날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받고 깨달은 은혜의 깊이는 자신의 헌신의 깊이와 비례한다.
누가복음7:41-47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상급이 있다
받을 상을 기대하라
디모데후서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아름다운 결산을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100년의 우리의 삶이 영원한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설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으로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땅에서 아름다움 결산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상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소망하며 아름다운 결산의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 원형 경기장은 2000년 전에 세워진 운동장으로 5만 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운동장 가운데 사자 같은 맹수와 사형수를 싸움을 시킵니다.
그러면 짐승의 밥이 되느냐 살아남느냐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때 사형수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라 그야말로 필사적인 싸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지냈으니까 이런 모습을 생각하며 감옥에서 자기는 선한 싸움을 일생 싸워 왔다고 그리고 승리하였다고
언제일지 모르지만내 인생의 마지막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세에도 내세에도 상을 들고 금메달을 이빨로 깨물어 확인하는 것 같은 기쁨이 나의 삶에 날마다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67년 경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바울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30대 중반에 회심하여 30년 이상을 복음사역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30여 년 동안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감수하면서 사역해왔던 노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그리고 이듬해 바울은 네로에 의해 처형당함으로써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제와 같이 이미 부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전제란 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 재물에 향을 더 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제는 희생제사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처음 부름을 밭을 때보다 살아 갈수록 아니 말년에 더욱 주님 앞에 아름다운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아 갈수록 추한 인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 에서
여기서 떠난다는 단어는 군대가 막사를 거두고 진을 철수한다는 뜻입니다.
또 항해 용어로는 배가 떠날 때 배의 닻줄을 푸는 출항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마지막 종착점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절망스런 최후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육체로부터 떠나는 새로운 출발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마치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엄청나게 설레고 기대되는, 그래서 기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사도 바울이 아름다운 결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심, 예수님이 살아계심,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사는 자가 바울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인식하며 믿음으로 보고 느끼고 살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울로 아름다운 결산을 하게 하였다.
아이디 햇살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2006년이 시작되면서 갑상선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그즈음에 내 주변에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인 사람이 세 사람 더 있어 나까지 네 명이 암투병중이었다.
위암을 앓던 시누이는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이미 식도까지 전이가 되어 손도 대지 못하고 그냥 닫았다.
몇 개월 투병하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 간암을 앓던 분도 수술을 하고 병세가 호전되어 나은 줄 알았는데 결국 이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한 교회를 섬기던 집사님은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다 나은 듯 교회도 잘 나오시고 하시더니 다리 신경 쪽으로 전이가 되셔서 걸을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시고 잘 걷지 못하시다가 말기 암의 고통을 겪으시고 엊그제 천국으로 가셨다.
내 주변에서 함께 투병하며 아픔을 공유하던 분들이라
유달리 마음이 많이 가고 안쓰러웠는데 이제 말기 암의 고통에서는 자유로워 지셨겠지만 애석한 마음이다.
동료들이 떠나가고 아직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나는 내가 걸어 가야할 남은 나의 길을 헤아려 본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에 자기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며 사명의 길을 갔는데 나 역시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하여 달려가리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인생 여정을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역시 자신의 달려 갈 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본문의 배경은 바울이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려고 하면서 에베소 교회 리더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그에게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린다고 말씀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가 가는 길에는 내 생명을 다 드려도 가야 할 사명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아가보라는 선지자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할 것을 예언합니다.
성령께서 직접 또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바울의 걸음을 말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갈 길은 맡기신 복음 전파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이요 내 삶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놀라운 일은 이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바울은 그것을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목숨을 걸고 달려가는 사람이 상실하기 쉬운 것은 기쁨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알고 그 은혜로 일하는 사람은 복음의 사역을 억지로 전하지 않습니다.
감격과 기쁨 가운데 전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역에 감당하기가 최선을 다하기가 희생과 헌신을 하는데 그것을 행하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행하고 있는지요?
다른 사람보다도 열심히 더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불평과 불만과 원망입니다.
구속하신 분께 매인 자의 삶
하나는 성령에 매여이고, 또 하나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입니다.
성도의 삶의 방식은 매 순간의 삶의 행보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이고, 그 삶의 길의 끝에 자리하는 것, 즉 목적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언제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 사명 앞에서 생명조차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영의 인도함을 받지 않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순간 성도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메이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명이란 사신이 왕으로부터 부여 받은 특별한 임무/명령이라고 합니다.
왕으로 부터 받은 특별한 임무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나 자신의 뜻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명은 하나님으로 나왔고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열정과 목숨을 걸었습니다.
내 인생이 복음을 위한 인생임을 아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자신에게 부여하신 인생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고 방황합니다.
솔로몬은 사명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는 인간적으로 최고를 가지고 누렸다고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고 허된 일이 라고 합니다
전도서1:1-2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10-11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바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에 열정과 목숨을 걸었습니다.
지난 2000년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사랑의 유효기간에 관한 연구입니다.
2년간 남녀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남녀가 가슴 뛰는 사랑을 나누는 기간은 대체로 18-30개월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사랑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을 단순히 뇌 속의 화학작용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것인 지나친 감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하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뒤에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머리, 가슴, 온 몸에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사랑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 나는 더 내 이름으로는 살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으로만 살겠습니다.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 , 달려서라도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합니다.
20-30개월 만에 끝나는 화학적인 생물학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랑이 더 깊어 갑니다.
이제 주를 위해 죽으려 길을 나섭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변함없이 누군가의 사랑에 매여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랑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 무조전적인 사랑, 변함없는 사람, 영원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받은 은혜의 복음에 구원 받았다면, 진정 우리가 받은 복음이 은혜이고 감격이라면 우리 역시 복음 전파 사명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다윗은 날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받고 깨달은 은혜의 깊이는 자신의 헌신의 깊이와 비례한다.
누가복음7:41-47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상급이 있다
받을 상을 기대하라
디모데후서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아름다운 결산을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100년의 우리의 삶이 영원한 삶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설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으로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땅에서 아름다움 결산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상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소망하며 아름다운 결산의 삶을 살았습니다.
로마 원형 경기장은 2000년 전에 세워진 운동장으로 5만 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운동장 가운데 사자 같은 맹수와 사형수를 싸움을 시킵니다.
그러면 짐승의 밥이 되느냐 살아남느냐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때 사형수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라 그야말로 필사적인 싸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지냈으니까 이런 모습을 생각하며 감옥에서 자기는 선한 싸움을 일생 싸워 왔다고 그리고 승리하였다고
언제일지 모르지만내 인생의 마지막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세에도 내세에도 상을 들고 금메달을 이빨로 깨물어 확인하는 것 같은 기쁨이 나의 삶에 날마다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67년 경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바울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30대 중반에 회심하여 30년 이상을 복음사역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30여 년 동안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감수하면서 사역해왔던 노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그리고 이듬해 바울은 네로에 의해 처형당함으로써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제와 같이 이미 부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전제란 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 재물에 향을 더 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제는 희생제사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처음 부름을 밭을 때보다 살아 갈수록 아니 말년에 더욱 주님 앞에 아름다운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살아 갈수록 추한 인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 에서
여기서 떠난다는 단어는 군대가 막사를 거두고 진을 철수한다는 뜻입니다.
또 항해 용어로는 배가 떠날 때 배의 닻줄을 푸는 출항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마지막 종착점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절망스런 최후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 육체로부터 떠나는 새로운 출발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마치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엄청나게 설레고 기대되는, 그래서 기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사도 바울이 아름다운 결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심, 예수님이 살아계심,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사는 자가 바울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인식하며 믿음으로 보고 느끼고 살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울로 아름다운 결산을 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