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풍성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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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64회 작성일 2017-08-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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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7-15 더 풍성한 삶
다윗 왕이 준비하고 솔로몬 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메데 바사 고레스 왕 때에 느헤미야 선지자가 재건축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한 것이 양의 문입니다
느헤미아 3:1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처음 양의 문에서 시작해서 한 바퀴 돌면 양의 문에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출입 할 수 있는 문은 7-8개 가 있다고 합니다.
어문, 옛문, 골짜기문, 분문, 샘문, 마문, 미문이라고 하는 동문, 함밉가문등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양의 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이 많은 문중에 양의 문이라고 하신 데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문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층이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평민이나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기는 성전 세금을 내고 들어갈 수 있으니 가난한 이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양을 약탈하는 도적이었습니다.
짐승이 드나들던 양의 문이 있습니다.
원래 이 문의 용도는 희생제물이 짐승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 양문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다른 문으로 들어 갈 수 없으니 이 문으로 왕래를 합니다.
예수님은 특권층의 문도 아니요 그렇다고 종교지도자들의 문도 아니시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 되셨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만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9-10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두 가지 의미의 생명이 있고 어떤 생명으로 사느냐 따라서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물학적인 생명이다.
태어나서 먹고 자고 성장하다가 때가 되면 죽는 동물적인 생명을 말한다.
여러분 시끄럽도록 우는 매미 보셨지요
그렇게 시끄럽게 울더니 땅 바닥에 생명이 다 하여 떨어지니 차와 사람에게 밝히고 개미들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이런 동물적인 생명은 하나님을 모르는 삶을 말한다.
이것을 헬라어로 비오스의 생명이라고 표현한다.
생물학을 말하는 biology는 이 말에서 생겼다.
생물학적인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삶이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일서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함께 하는 삶,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이제 두 가지 생명을 삶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납니다.
허무한 삶을 사는 자, 의미와 보람을 누리는 삶이다.
참 기쁨과 평안이 없는 삶, 참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삶이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가는 삶, 하나님의 지혜와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므로 형통하고 복 받는 삶이다.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치닫는 삶, 현실에도 미래에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다.
이 생명으로 삶을 풍성하십니다.
풍성히의 뜻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충분한 만족이라는 뜻이다.
시편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세상으로 쫓겨 난후 이 세상의 삶을 죽음으로 치 닫는 삶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땀을 흘려야 했고, 노동과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더 힘든 것은 좀 더 가지기 위해 다투어야 했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투쟁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늘 부족하여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의 풍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의 결핍함을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세상엔 참 빛이 없어 어두움 가운데 사는 빛의 결핍 이야기입니다.
2장은 잔칫집에 기쁨을 더하는 포도주의 결핍,
3장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자 랍비였던 니고데모의 선한 행실을 많이 하였지만 확신의 결핍,
4장은 사마리아 여인의 다섯명의 남편을 두었지만 참 소망과 기쁨의 결핍을 말합니다.
5장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서 수많은 병자들과 38년 된 병자가 못으로 들어가서 못해 치료 할 수 없어 도와줄 사람의 결핍을 이야기 합니다.
6장에는 빈들에 수많은 군중이 모였지만 그곳에 먹을 양식이 결핍을 말하고
7장에는 예수님의 친 형제들까지도 주님을 믿지 않는 믿음의 결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장은 간음한 여인의 용서와 용납이 결핍한 사회를 말합니다.
9장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시각 장애인을 통해 참다운 것을 볼 줄 아는 시력이 결핍된 종교인을
10장에는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무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목자는 그들 사이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에서는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 바로 모든 결핍의 근원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결핍은 오로지 양의 목자이신 주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10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것만으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의 무엇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도둑이라 하고, 폭행하면 강도라 합니다.
근데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이런 사람들의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람들 중 누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성향입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욕망 때문입니다.
이렇게 뺏고, 뺏기지 않으려 애쓰는 세상은 결과적으로 죽음과 멸망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런 연속된 삶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풍성한 생명의 삶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가입니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제 이 그리스로 인한 생활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알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소명의식과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아시고 나의 인생에게 사명을 지워주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만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나를 알고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다는 소명의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확신가운데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성도로, 사회의 일원으로, 가정에 부모로 자녀등 구성원으로 보내셨음을 알아야 한다.
그 믿음이 있으면 어떤 장애도 감당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
시편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예레미야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나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뜻을 알면 내 삶은 풍성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끄러운 일이 많은 이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마을로 들어가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예수님과의 이 짧은 대화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이 여인이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내가 만난 그분을 보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짧은 만남 중에 이 여인은 주님을 알고 풍성한 생명을 공급을 공급 받았습니다.
그 생명은 그 여인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을 알고 믿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은 아주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일은 매우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인색했고 그리스도는 풍성했고
나는 실패했고 그리스도가 승리했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는 전부입니다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가 살고
나는 원망 전공 이었는데 감사하고
나는 미련하고 그리스도로 지혜로웠습니다.
고린도후서6:8-10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제는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6:16-18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어도 전혀 변함이 없이 인간 그대로 남아 있는 기적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 보십시오
결국은 여러분들이 꼼짝하지 못하고 항복하게 됩니다.
이것저것 다 잃어버리기 전에 아니 내 생명이 다하기 전에 항복하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 권속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과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교회는 천국 타작마당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고릅니다.
다 하나님 편으로 세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알곡은 거둬 드리고 쭉정이는 불태워 버립니다.
곡식을 뜨는 키를 보십시오.
까불수록 곡식은 안쪽으로 다가오고 쭉정이는 밖으로 밀려 나갑니다.
저는 늘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부모가 매를 가지고 아이들을 때리며 교훈 할 때에 참 자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지만 남의 자식은 보따리 싸서 아예 나가 버립니다.
여기 아니면 어디 살 데가 없나 하고 말입니다.
가륫유다는 예수님께서 네 갈 길로 가라 하니 그 시로 어두운 데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주를 떠나서도 살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살아 갈 자신이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26-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왜 순종하지 않느냐?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왜 순종 못하지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아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내가 구원을 받을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까?
따지고 판단 할 이유가 없는 줄로 여겨집니다.
아멘으로 그냥 받아 드릴 것뿐입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 따지고 숨을 쉽니까?
그냥 자동으로 쉬는 것 아닙니까?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종이 듣겠습니다. 하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나에게 새롭게 살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나를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하면 크나큰 허무를 맛 볼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나의 삶의 사이클을 맞춰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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