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다시 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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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44회 작성일 2018-04-01 08:51본문
고린도전서15:1-8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
1987년 4월 중국의 산시성 법문사에서 석가모니의 4㎝ 크기의 손가락뼈 불지사리가 발견되었다고 중국 당국은 물론 인도 등 불교국가에서는 떠들썩했습니다.
진위여부도 확실치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뼈를 발견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환호했지만 그 사실은 석가모니도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하나를 가지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가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이슬람교도는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우리는 정말 그가 실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라고 되물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겼던 그 관 역시 마호메트도 확실히 죽어 관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라는 것을 역시 반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절의 핵심 곧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하는 것은 부활이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를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후 사흘이라는 시간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매우 절망적이고 힘든 시간입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깊은 절망감으로 그들의 앞날을 위한 대책을 간구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고향 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그 시신에 바르기 위해 동정심과 연민을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으며, 누가 자기들을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 것인가를 염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 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줄로 알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놀라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는 한편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몇몇 목격자들의 놀라움과 기쁨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후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라는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 후 부활신앙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주의 날이 주일이 생겨났습니다.
창조후 안식한 안식일이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주님의 날(주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시 오심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부활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예수의 빈 무덤을 강조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후 분명히 돌로 무덤 문을 막고 밀봉까지 하고 로마 병사들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의 실체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던 도중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문을 모두 닫아 걸었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증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인류의 미래는 심판과 저주가 아니라 구원과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부활이라는 믿음으로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참인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희망과 허상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인생들은 죽음이 생의 마지막인 줄 알고서 그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세상은 죽음을 앞세워 우리를 협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것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8:1-2,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부활의 그 사실을 믿고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시베리아의 화물회사 직원이 고장이 난 냉동차 안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일이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짐을 부리려 하는데, 그만 그 냉동차의 문이 철컥하고 잠겼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내 그 냉동차를 끄는 열차가 출발을 해 버렸습니다.
그 사내는 냉동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이제 그 사내는 자신이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분명히 그 차가운 냉동차 안에서 얼어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추위가 몰아치고 자신의 현실에 대해 절망을 하자 그 절망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때는 봄이었고 냉동차는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기온에서는 절대사람이 얼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내는 결국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냉동차 벽에 낙서처럼 남기고 다음 정류장에서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고장 난 냉동차 안에서 사람이 얼어 죽을 수 있는지 모두들 의아해 했습니다.
십자가를 전후해서 성경 속에 그려져 있는 주의 제자의 서로 다른 두면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한 면의 얼굴은 희망을 온전히 상실해 버린 버림받은 자의 실망하는 자의 얼굴로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 이후 공포와 낙담과 체념과 불안의 분위기 속에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덜덜 떨며 문을 잠그고 움츠려 있는 제자들의 얼굴입니다.
또 한 면의 얼굴은 용기와 산 소망이 넘치는 승리자의 얼굴로서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얼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얼굴은 언제나 우리 각자 얼굴의 양면일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사망의 그늘의 삶에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새 생명을 누리는 풍성한 삶을 사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생활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생명을 체험의 종교입니다.
이제 인생의 모든 문제는 부활의 신앙으로 해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울음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안식후 첫날 이른 새벽에 주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런 마리아를 향해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찾아오셔서 그의 눈물을 멈추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남모르는 아픈 사연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과 절망의 눈물을 많이 흘렸지만 오늘 주의 방문을 받기만 하면 그 모든 눈물도 멈추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승리의 낭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부활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도 절망의 인생을 넘치는 소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과제만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부활의 삶을 살아내느냐이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내가 잘하여 내 힘으로 구원을 얻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부여받은 새 생명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희망과 비전은, 세상의 어떤 소유나 재정적 풍부나 세상적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희망과 미래는 부활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안에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까지 극복할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라면, 오늘에 처한 어떤 환경도 뛰어넘지 못할 문제는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젊은 20대 초반의 의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선교사가 1885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 인천항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을 먼저 받아드린 선진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본 19세기의 조선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나태와 무기력, 불결과 사치, 까다로움이나 탐욕, 수다스러움, 폭식과 폭음, 느슨한 시간과 수량 개념을 흠으로 잡는 이들도 있다
서구인들이 조선에 와서 가장 연민을 느낀 것은 여성들의 삶이다. 사회적 멸시와 남존여비에서 오는 비애와 절망, 힘든 노동, 병, 사랑 부족, 은둔 등이 그를 자극한 조선 여성상이다. 남자들의 방탕한 외도와 축첩을 놓고 조선 사람들에게는 집(하우스)은 있으나 가정(홈)은 없으며, 조선의 딸들은 아버지에 손에 처형되며 아내는 남편한테 살해당한다는 끔직한 표현마저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식탐이 조선인들이 가진 악덕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의정이나 임금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말 그대로 캄캄하고 답답하고 가난하고 무지하였습니다.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을 보면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알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누구에게나 이 소식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명성황후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왕비는 크리스마스 전날에 나를 불러서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축하하는 방법 따위를 물었다. 누가 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천사들의 합창과 별들에 대하여, 그리고 말구유에 누운 어린아이에 대하여,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왕비는 깊은 흥미를 느끼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며칠 뒤 왕과 왕비는 미국에 대하여 많은 것을 묻고는 왠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 조선도 미국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자유롭고 힘이 있다면!
나는 미국이 비록 부유하고 강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가장 강하고 훌륭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죄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나라, 무한한 영광과 기쁨만이 있는 나라를 설명할 기회를 다시 한 번 얻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비통한 감정으로 왕비는 탄식하며 전하와 세자와 내가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죄인은 안 된다고? 왕비는 얼굴을 떨구었고 방금 전에 그렇게 빛났던 표정은 어두워졌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했다. 왕비는 사려 깊게 내 말을 들었다. 그 후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나 그 일로 왕비에게 구원의 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한국은 복음으로 거듭난 나라입니다
복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물론 나 역시 부활의 권능을 힘입고 날마다 거듭나며 날마다 생명의 즐거움을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
1987년 4월 중국의 산시성 법문사에서 석가모니의 4㎝ 크기의 손가락뼈 불지사리가 발견되었다고 중국 당국은 물론 인도 등 불교국가에서는 떠들썩했습니다.
진위여부도 확실치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뼈를 발견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환호했지만 그 사실은 석가모니도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하나를 가지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가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이슬람교도는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우리는 정말 그가 실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라고 되물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겼던 그 관 역시 마호메트도 확실히 죽어 관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라는 것을 역시 반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절의 핵심 곧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하는 것은 부활이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를 강조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후 사흘이라는 시간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매우 절망적이고 힘든 시간입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깊은 절망감으로 그들의 앞날을 위한 대책을 간구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고향 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그 시신에 바르기 위해 동정심과 연민을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으며, 누가 자기들을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 것인가를 염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 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줄로 알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접한 제자들은 놀라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는 한편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몇몇 목격자들의 놀라움과 기쁨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후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라는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 후 부활신앙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주의 날이 주일이 생겨났습니다.
창조후 안식한 안식일이 예수 부활을 기념하는 주님의 날(주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시 오심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부활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예수의 빈 무덤을 강조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후 분명히 돌로 무덤 문을 막고 밀봉까지 하고 로마 병사들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의 실체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던 도중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문을 모두 닫아 걸었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증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인류의 미래는 심판과 저주가 아니라 구원과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부활이라는 믿음으로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참인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희망과 허상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인생들은 죽음이 생의 마지막인 줄 알고서 그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세상은 죽음을 앞세워 우리를 협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것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8:1-2,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부활의 그 사실을 믿고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시베리아의 화물회사 직원이 고장이 난 냉동차 안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일이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짐을 부리려 하는데, 그만 그 냉동차의 문이 철컥하고 잠겼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내 그 냉동차를 끄는 열차가 출발을 해 버렸습니다.
그 사내는 냉동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이제 그 사내는 자신이 다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분명히 그 차가운 냉동차 안에서 얼어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추위가 몰아치고 자신의 현실에 대해 절망을 하자 그 절망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때는 봄이었고 냉동차는 고장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기온에서는 절대사람이 얼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내는 결국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냉동차 벽에 낙서처럼 남기고 다음 정류장에서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고장 난 냉동차 안에서 사람이 얼어 죽을 수 있는지 모두들 의아해 했습니다.
십자가를 전후해서 성경 속에 그려져 있는 주의 제자의 서로 다른 두면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한 면의 얼굴은 희망을 온전히 상실해 버린 버림받은 자의 실망하는 자의 얼굴로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 이후 공포와 낙담과 체념과 불안의 분위기 속에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덜덜 떨며 문을 잠그고 움츠려 있는 제자들의 얼굴입니다.
또 한 면의 얼굴은 용기와 산 소망이 넘치는 승리자의 얼굴로서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얼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얼굴은 언제나 우리 각자 얼굴의 양면일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사망의 그늘의 삶에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새 생명을 누리는 풍성한 삶을 사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생활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생명을 체험의 종교입니다.
이제 인생의 모든 문제는 부활의 신앙으로 해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울음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안식후 첫날 이른 새벽에 주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런 마리아를 향해 주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찾아오셔서 그의 눈물을 멈추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남모르는 아픈 사연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과 절망의 눈물을 많이 흘렸지만 오늘 주의 방문을 받기만 하면 그 모든 눈물도 멈추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승리의 낭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부활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도 절망의 인생을 넘치는 소망을 안겨주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과제만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부활의 삶을 살아내느냐이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내가 잘하여 내 힘으로 구원을 얻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부여받은 새 생명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희망과 비전은, 세상의 어떤 소유나 재정적 풍부나 세상적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희망과 미래는 부활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안에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까지 극복할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라면, 오늘에 처한 어떤 환경도 뛰어넘지 못할 문제는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젊은 20대 초반의 의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선교사가 1885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 인천항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을 먼저 받아드린 선진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본 19세기의 조선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나태와 무기력, 불결과 사치, 까다로움이나 탐욕, 수다스러움, 폭식과 폭음, 느슨한 시간과 수량 개념을 흠으로 잡는 이들도 있다
서구인들이 조선에 와서 가장 연민을 느낀 것은 여성들의 삶이다. 사회적 멸시와 남존여비에서 오는 비애와 절망, 힘든 노동, 병, 사랑 부족, 은둔 등이 그를 자극한 조선 여성상이다. 남자들의 방탕한 외도와 축첩을 놓고 조선 사람들에게는 집(하우스)은 있으나 가정(홈)은 없으며, 조선의 딸들은 아버지에 손에 처형되며 아내는 남편한테 살해당한다는 끔직한 표현마저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식탐이 조선인들이 가진 악덕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의정이나 임금도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그래도 아무도 놀라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혼자 쉬도록 내버려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습이다. 그래서 허용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말 그대로 캄캄하고 답답하고 가난하고 무지하였습니다.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을 보면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알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누구에게나 이 소식은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시의(侍醫)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명성황후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왕비는 크리스마스 전날에 나를 불러서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축하하는 방법 따위를 물었다. 누가 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천사들의 합창과 별들에 대하여, 그리고 말구유에 누운 어린아이에 대하여,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왕비는 깊은 흥미를 느끼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며칠 뒤 왕과 왕비는 미국에 대하여 많은 것을 묻고는 왠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 조선도 미국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자유롭고 힘이 있다면!
나는 미국이 비록 부유하고 강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가장 강하고 훌륭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죄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나라, 무한한 영광과 기쁨만이 있는 나라를 설명할 기회를 다시 한 번 얻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비통한 감정으로 왕비는 탄식하며 전하와 세자와 내가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죄인은 안 된다고? 왕비는 얼굴을 떨구었고 방금 전에 그렇게 빛났던 표정은 어두워졌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했다. 왕비는 사려 깊게 내 말을 들었다. 그 후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나 그 일로 왕비에게 구원의 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한국은 복음으로 거듭난 나라입니다
복음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물론 나 역시 부활의 권능을 힘입고 날마다 거듭나며 날마다 생명의 즐거움을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