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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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22회 작성일 2018-06-03 10:01본문
히브리서12:1-3 예수를 바라보자
사람들은 세상을 고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괴로움과 근심이 많아 그치지 아니함을 바다에 비유한 말로 잠시도 고뇌가 떠날 날이 없으므로 파도가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와 같다는 말이다
참으로 얼마나 일들이 많습니까
살아 갈수록 태산입니다
본문에서도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을 했네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부끄러움 죄책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상황이라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질 만큼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추위와 햇빛, 바람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이유는 바로 창피하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한다.
굳이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동물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짐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을 것이다.
분노, 우울, 불안 등의 감정과 달리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인간만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피곤함과 낙심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의 인물들을 소개했습니다
가인과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자 이들이 어떻게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아 멸하는 것도 보기도 했습니다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아타까움, 형제간의 다툼
물론 수많은 내우외환 전쟁 등의 경험으로 생명이 죽고
극한 경제적 어려움
다른 이들의 손가락을 받고 살아야만 했던 세월
등등 다 고해를 보내고 살아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이게 오늘 날 우리 이름 하나하나 불러 말하면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이들이 어떠했다는 말입니까
잘 살았다는 말입니까 못 살았다는 말입니까
잘 살았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잘 살았다는 말입니까
돈으로 권력으로 자존심으로 오기로 인기로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13장 서두에 이러므로 말은 12장에 나오는 인물들도 고해와 같은 삶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살았듯이
우리 또한 믿음으로 잘 살아 보자는 말입니다
이 믿음의 주체 원조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렐루야!
이들이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의 주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
믿음의 모델, 앞에 서서 믿음으로 인도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예수가 내 속에서 믿음을 시작하시고,
또 이 믿음이 자라도록 앞에서 본을 보이시며,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될 때까지 지금까지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인생을 잘 살아 갈 수 있음은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만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그에게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 오라입니다
마태복음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에게 마지막 주신 말씀도 동일하게 나를 따르라 입니다
요한복음21:18-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 말고 베드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누가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개의치 마세요
로마서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린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것 그 자체가
내 인생의 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들고
오히려 점점 더 올무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어떠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을 살리려고 준, 선의 기준으로 준 율법으로는
인간이 완성해야 할 짐으로 여겨져 그 짐에 깔려 죽게 생겼습니다
스스로 회복되어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 즉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셨다.
특별히 선택받아 선의 기준이 되는 율법의 말씀을 받는 민족도 이렇게 다 죽어 가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이야 말로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인생에게 구원의 대책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는 인간이 어떤 행위에 전혀 상관이 없는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면서 정말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이 두 가지 사실이다.
저렇게 안 믿고 저렇게 불순종을 하는데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가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렇게도 용서하시고 저렇게 사랑하시는데도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도 불순종만 거듭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제가 그렇습니다
참으로 형편없는데 지금까지도 물론이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 질 것 같지 않고 그렇게 살아 갈 것 뻔 한 일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잘 압니다
구제불능입니다
로마서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예수를 바라봅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더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 합니다
히브리서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은 신실한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신실하지 못했다.
율법을 통해서는 약한 사람들이 신실해지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새로운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의를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라 예수 믿어라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구주시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내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이외의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은 상태이다.
돈을 내라 떡을 내라 잘 해라 이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으니 의인의 신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내 신분, 내 정체성의 변화가 필요하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를 행하여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의가 됩니다.
이제 이 사실을 믿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안 됩니다
원래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진분이 바뀐 유대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과 함께 사역하였던 바나바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리스도인 유대인이 핍박으로 인하여 집 직장 고향을 잃어버리고 흩어져 고난을 당하여 다시 유대교로 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신앙적으로 권면하고, 붙잡아주어 믿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또 다시 인간적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의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 앞에 놓여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은 마라톤 경주입니다.
처음 출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결코 믿음의 경주도중에 포기하거나,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하는 믿음의 경주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거운 것 이란 운동선수가 달리는데 방해되는 체중을 가리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 란 무엇입니까?
모든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인 것은 부상입니다.
한번 부상당하면 몇 개월씩, 아니 몇 년씩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기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부상당하기 전의 기량으로 회복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삶은 기쁨이 있습니다
인내로서 기쁨을 맛본다
191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올림픽 경기 마라톤에서 일본선수로 유일하게 대회에 참가한 마라톤 선수인 시소 카니쿠리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그를 실종 처리했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62년에, 스웨덴의 한 신문사에서 올림픽 50주년 기념으로, 실종된 일본인 마라톤 선수의 행방을 추적하였고, 일본에 살고 있는 당사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50년간 의문에 싸였던 실종의 사실은 너무 더워 그 더위로 어느 집의 정원에 쓰러졌고, 그 선수는 그 집으로 들어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에 빠졌고 몰래 일본 행 배편으로 일본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더위와 고단함, 졸음을 인내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마라톤 경주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76세에 스웨덴에 방문하였을 때에 올림픽 위원회에서는 그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가 실격이 아니라 실종으로 되었기 때문에 선수의 자격이 아직 유효한 상태였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림픽 스테디움을 한 바퀴 돌고 결승점을 통과토록 해서 마라톤을 완주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기록상의 마라톤 최장기록 54년 8개월 6일, 5시간32분, 20.3초라고 합니다. 기네스북에도 올라왔다고 합니다.
인생의 믿음의 경주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완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갈라디아서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주를 바라보는 가운데는 낙심은 없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는 무서워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담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고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괴로움과 근심이 많아 그치지 아니함을 바다에 비유한 말로 잠시도 고뇌가 떠날 날이 없으므로 파도가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와 같다는 말이다
참으로 얼마나 일들이 많습니까
살아 갈수록 태산입니다
본문에서도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을 했네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부끄러움 죄책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상황이라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질 만큼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추위와 햇빛, 바람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이유는 바로 창피하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한다.
굳이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동물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짐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을 것이다.
분노, 우울, 불안 등의 감정과 달리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인간만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피곤함과 낙심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의 인물들을 소개했습니다
가인과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자 이들이 어떻게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이고 죽임을 당하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심판을 받아 멸하는 것도 보기도 했습니다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아타까움, 형제간의 다툼
물론 수많은 내우외환 전쟁 등의 경험으로 생명이 죽고
극한 경제적 어려움
다른 이들의 손가락을 받고 살아야만 했던 세월
등등 다 고해를 보내고 살아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이게 오늘 날 우리 이름 하나하나 불러 말하면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이들이 어떠했다는 말입니까
잘 살았다는 말입니까 못 살았다는 말입니까
잘 살았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잘 살았다는 말입니까
돈으로 권력으로 자존심으로 오기로 인기로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13장 서두에 이러므로 말은 12장에 나오는 인물들도 고해와 같은 삶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살았듯이
우리 또한 믿음으로 잘 살아 보자는 말입니다
이 믿음의 주체 원조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렐루야!
이들이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의 주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
믿음의 모델, 앞에 서서 믿음으로 인도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예수가 내 속에서 믿음을 시작하시고,
또 이 믿음이 자라도록 앞에서 본을 보이시며,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될 때까지 지금까지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인생을 잘 살아 갈 수 있음은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만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그에게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 오라입니다
마태복음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에게 마지막 주신 말씀도 동일하게 나를 따르라 입니다
요한복음21:18-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 말고 베드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누가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개의치 마세요
로마서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린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것 그 자체가
내 인생의 짐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들고
오히려 점점 더 올무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어떠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을 살리려고 준, 선의 기준으로 준 율법으로는
인간이 완성해야 할 짐으로 여겨져 그 짐에 깔려 죽게 생겼습니다
스스로 회복되어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 즉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셨다.
특별히 선택받아 선의 기준이 되는 율법의 말씀을 받는 민족도 이렇게 다 죽어 가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율법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이야 말로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인생에게 구원의 대책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는 인간이 어떤 행위에 전혀 상관이 없는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면서 정말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이 두 가지 사실이다.
저렇게 안 믿고 저렇게 불순종을 하는데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가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렇게도 용서하시고 저렇게 사랑하시는데도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도 불순종만 거듭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제가 그렇습니다
참으로 형편없는데 지금까지도 물론이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 질 것 같지 않고 그렇게 살아 갈 것 뻔 한 일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잘 압니다
구제불능입니다
로마서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예수를 바라봅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이 더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 합니다
히브리서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은 신실한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신실하지 못했다.
율법을 통해서는 약한 사람들이 신실해지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새로운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의를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라 예수 믿어라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구주시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내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이외의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은 상태이다.
돈을 내라 떡을 내라 잘 해라 이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으니 의인의 신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내 신분, 내 정체성의 변화가 필요하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를 행하여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의가 됩니다.
이제 이 사실을 믿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안 됩니다
원래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진분이 바뀐 유대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기록한 사람은 바울과 함께 사역하였던 바나바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리스도인 유대인이 핍박으로 인하여 집 직장 고향을 잃어버리고 흩어져 고난을 당하여 다시 유대교로 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신앙적으로 권면하고, 붙잡아주어 믿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또 다시 인간적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의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 앞에 놓여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은 마라톤 경주입니다.
처음 출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결코 믿음의 경주도중에 포기하거나,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하는 믿음의 경주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거운 것 이란 운동선수가 달리는데 방해되는 체중을 가리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 란 무엇입니까?
모든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인 것은 부상입니다.
한번 부상당하면 몇 개월씩, 아니 몇 년씩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기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부상당하기 전의 기량으로 회복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의 삶은 기쁨이 있습니다
인내로서 기쁨을 맛본다
191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올림픽 경기 마라톤에서 일본선수로 유일하게 대회에 참가한 마라톤 선수인 시소 카니쿠리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그를 실종 처리했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62년에, 스웨덴의 한 신문사에서 올림픽 50주년 기념으로, 실종된 일본인 마라톤 선수의 행방을 추적하였고, 일본에 살고 있는 당사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50년간 의문에 싸였던 실종의 사실은 너무 더워 그 더위로 어느 집의 정원에 쓰러졌고, 그 선수는 그 집으로 들어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에 빠졌고 몰래 일본 행 배편으로 일본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더위와 고단함, 졸음을 인내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마라톤 경주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76세에 스웨덴에 방문하였을 때에 올림픽 위원회에서는 그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가 실격이 아니라 실종으로 되었기 때문에 선수의 자격이 아직 유효한 상태였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림픽 스테디움을 한 바퀴 돌고 결승점을 통과토록 해서 마라톤을 완주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기록상의 마라톤 최장기록 54년 8개월 6일, 5시간32분, 20.3초라고 합니다. 기네스북에도 올라왔다고 합니다.
인생의 믿음의 경주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러나 완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갈라디아서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주를 바라보는 가운데는 낙심은 없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는 무서워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담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